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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누리선교교회/한국어예배

요한복음 강해 62) 내 이름으로 구하면 (주일예배 20130224)

by 온누리선교 2013. 2. 24.

 

성경본문: 요한복음 14장 7~15절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설교: 내 이름으로 구하면!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지 전에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대화하는 내용입니다. 13~14절을 보니, “13)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14)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두 절에 똑같이 등장하는 문장이 있습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행하겠다”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이 문장에서 가장 강조되어야 하고, 중심 되는 부분이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이 문장을 세부분으로 세부적으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첫 번째, “내 이름으로”, 두 번째, "무엇이든지 구한다" 세 번째, “다 행하여 준다”이 세 부분 중에서 어느 부분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가장 강조되어야 하는 부분일까요? 바로 “내 이름으로”라는 부분입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도 중요하고 다 행하여 준다는 약속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이름으로” 표현되고 있는 부분입니다.

“내 이름으로”라는 부분은 누구의 이름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할 때에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할 때에 기적이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주는 권세와 가진 능력”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말씀 가운데, 성령충만함이 우리 안에 있임을 알고, 우리의 모든 삶에 예수님의 이름이 주는 권세와 능력을 받아 누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7~9절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제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런던 대 공습기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한 아버지가 어린 딸의 손을 잡고 폭탄 맞은 건물에서 달려 나왔습니다. 마당 앞에는 며칠 전 투하된 포탄 때문에 커다란 구덩이가 생겨져 있었습니다. 가능한 빨리 은신처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아버지는 그 구덩이 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손을 들고 딸에게 따라 오라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주위의 폭발에 겁을 먹은데다가 어두운 구덩이 속으로 들어간 아버지가 보이지 않자, 소녀는 "아빠! 아빠가 안보여!"하고 부르짖었습니다. 하늘은 백색예광탄 불빛으로 환했고, 불타는 건물 때문에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고개를 든 아버지는 구덩이 바로 앞의 선 딸의 윤곽을 향해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하지만 아빠는 네가 보여, 그러니까 뛰어!" 꼬마소녀는 펄쩍 뛰어내렸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이 보여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과 자신을 위해 최선의 결정을 내린 것이라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예수님과 제자의 아주 신앙적이고 신학적인 중요한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는 말합니다. "예수님! 하나님을 보여주세요. 하나님을 보면 족하겠나이다. 하나님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소원했습니다만 예수님의 대답은 "벌써 보았느니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는데 아직도 못 보았느냐? 아직도 너희는 하나님을 못 보았느냐?"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내가 아무리 무엇을 보았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내가 무엇을 보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경험이라는 것은 이상하게도 사람을 스스로 위험에 빠뜨립니다. 그래서 고집이 생기고 자기 우상화에 빠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 마음속에 우상이 무엇입니까? 요새 보니까 자존심이라고 하는 불치병이 있습니다. 자존심 하나 때문에 망칩니다. 오늘과 내일을 다 망치는 그런 것을 볼 때에 자기 우상이라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병입니다. 또한 감각적 지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 운동선수들을 봅시다. 운동장에서 뛸 때에나 혹은 볼을 찰 때, 저기서 오는 볼을 보고 '가만있어보자, 이렇게 차면 어떻게 될까? 저렇게 차면 어떻게 될까?' 이렇게 생각하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벌써 많은 시간이 훈련이 되어서 볼을 보자마자 벌써 탁 갖다 대는 것이 아닙니까? 감각적입니다. 아주 자동적으로. 여기에 무슨 판단하고 무엇 할 겨를이 없습니다. 아주 몸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완전히 익숙해진 감각적 지식, 그것은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감각화 된 지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를 들어보십시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무슨 말입니까? 벌써 보았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나와 함께 하지 않았느냐?" 그것을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하나님을 보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느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벌써 깨달을 수 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 이제 예수님을 보면서 하나님을 만나야 됩니다. 여러분, 얼마만큼 하나님을 보고 삽니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제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와 같이 다니면서 보지 않았느냐? 네 마음속으로는 나를 보면서 하나님을 벌써 만났어야 되는데 아직도 못 만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교훈인지 모릅니다. 늘 주님과 함께 거하는 삶을 경험하고도 결국은 주님은 내게 아무것도 해주시지 않는다하여 포기하시는 성도들이 계십니다. 마치 공기처럼, 마치 가족처럼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믿고 그 분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10~11절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프랑스인 샤르니가 나폴레옹 황제에게 밉게 보여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그는 친구들은 물론 가족들에게도 잊혀졌습니다. 처음에 자주 면회 오던 가족들도 점점 멀어졌습니다. 그는 벽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아무도 나를 돌보지 않는다!" 소망을 잃어버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감옥 바닥에 있던 돌 틈에서 푸른 싹하나가 돋아났습니다. 샤르니는 간수가 매일 주는 물을 조금씩 남겨서 잎사귀에 부어주었습니다. 마침내 꽃봉오리가 생기더니 아름다운 꽃을 피우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본 샤르니는 먼저 썼던 글을 지우고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하나님이 돌보신다!" 감옥에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는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어 조세핀 왕비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꽃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돌보는 이는 결코 나쁜 사람이 될 수 없다"며, 왕비는 나폴레옹에게 제고를 건의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샤르니는 석방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조건 자기를 믿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너희를 돌보았으니, 그 돌본 것을 기억하고, 맹목적으로 “믿으라, 기다리라” 하지 않으십니다.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이 상황은 이제 바로, 십자가의 길을 가기 전입니다. 항상 말씀하셔왔지만, 자신의 말은 전부다 혼자서 생각하시고 판단하셔서 말하시고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뜻과 권능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계시면서 많은 표적을 행하셔서 예수님의 이름을 많은 사람들이 믿고 따랐지만,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다”(요2:24)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사람에 대해 잘 아셨고, 하나님 외에 누구의 증언도, 어떤 인기도 필요 없었으며, 사람 가운데 사단이 있어, 그들의 칭송과 따름은 다 하나도 쓸모없는 신기루와 같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어떠한 믿음이 있습니까? 가끔 성도 분들께서 농담으로 묻습니다! “예수님! 부르기도 그렇고, 하나님! 부르기도 하여서 그냥 주여!라고 부른다”고 말입니다. 어떻게 부르는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 안에 있는 권세와 능력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라고 부르면 어떻고, 하나님이라면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과 그 안에서 행하시는 모든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문제, 걱정거리, 고통들을 주님 앞에 내려놓을 수 있게 됩니다. 샤르니가 감옥 속에서 자기의 귀중한 물을 조금씩 주어가며, 꽃을 자라게 했듯이 우리의 믿음도 주님의 계획안에서 자라는 것이며, 이 믿음으로 인하여 우리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생각지도 못한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12~14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엘리스(Bret Easton Ellis)라는 미국 현대 소설작가가 잇습니다. 엘리스가 저술한 소설“Less than Zero(제로미만)”이란 책을 보면, 로스앤젤러스에 사는 연예인 재벌들의 십대 자녀들의 생활을 자세하게 묘사해 놓았습니다. 그들은 대부분이 문란한 성생활, 마약, 폭력 등에 물들어 비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식들이 엉망진창으로 살아가자, 부모들은 “너에게 모든 것을 다 해 주었는데, 왜 그렇게 사느냐?”고 질문합니다.

그러자 그 자녀들은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이 있습니까? 나를 진정으로 생각해 줄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울고 싶을 때 나와 함께 있어 줄 사람이 있습니까? 나를 붙들어 주고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해 줄 사람이 있습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부모가 자식에게 용돈 넉넉하게 쓸 수 있도록 아낌없이 주고, 고급차에다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주는 것이 부모의 참된 모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돈을 한 다발씩 던져 주기 보다는 자식들의 아픔을 헤아리고, 슬픔을 나눌 수 있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실한 우리의 요구를 그저 들어주시고 이루어주시는 것만이 아니라, 스스로 엄청난 고통과 대속의 희생을 치루셨기에 우리를 철저히 이해하십니다. 그래서 가끔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기다리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이기신 권세는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공장의 기계처럼, 우리가 요구하는 즉시, 모든 것을 “착!”하고 내놓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심령을 감찰하시고, 또한 위로하시고, 그리고 예비해 놓으신 더 좋은 것으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를 때,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놀라운 특권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은 무엇을 요구하고 있으십니까? 말씀에 순종을 요구하고 있으며,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장 먼저 요구하는 사항은 “주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15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성도이며, 성도는 예수님의 이름이 주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성도에게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계명을 지키고, 순종하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 이름의 능력을 행하는 성도가 되십시오.

지금도 시험을 겪고 계신 분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나 혼자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안고 고통을 당하고 있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꼭 물리쳐야 하는 데, 그것을 물리치지 못해서 어려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혼자 견디기 어려운 나날의 삶을 살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현대 문명은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런 말에 현대인들은 쉽게 속아 넘어 갑니다. 현대인들은 병나면 모든 질병을 현대 의학이 고쳐줄 것이라는 것에 속고 있습니다. 돈만 있으면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다는 말에 속고 있습니다. 그러나 돈이나 현대인의 지혜나 기술이 모든 일을 다 해줄 수는 없습니다. 현대인의 지혜도 만능은 아닙니다. 이런 것 때문에 예수 이름의 권세를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물론 현대 의학을 사용하기도 하고, 물질이나 지혜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우리 믿는 자들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 능력을 활용하며 살아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이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시험도, 고난도, 가난도, 어려운 문제들도 물리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 자신의 연약함도 이기고, 세상도 이기고, 사단도 이기는 여러분들 되기를 축원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가 충만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

오늘 주신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주시겠다는 말씀! 믿음으로 받듭니다. 우리가 힘들고 괴로울 때, 외로울 때, 지칠 때, 방도가 없어 망연자실 할 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손을 놓지 않으시며, 사랑하심을 압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용서하여주시고, 이 한주간도 주님의 말씀 붙잡고, 날마다 승리하게 하옵소서. 귀하시고 하늘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