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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누리선교교회/한국어예배

요한복음 강해 65) 너희는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수요예배 20130306)

by 온누리선교 2013. 3. 6.

성경본문: 요한복음 15:9~17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설교: 너희는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간디는 젊은 학생 시절, 기독교에 관심이 많아서 성경을 열심히 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기독교인이 되려고 심각하게 고민을 하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나라인 인도와 힌두교가 가진 카스트 제도의 신분차별을 기독교라면 분명히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교회에 갔지만, 교회 안내원이 인도인인 자신을 차별하고 무시하는 모습에 큰 상처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 뒤로는 그는 기독교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난 예수를 좋아하고 그의 가르침을 배우고자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닮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예수님께 붙어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예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엉뚱한 열매를 맺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열매들을 맺어놓고 ‘나는 예수라는 나무에 붙어 있소.’라고 떠벌려놓은 결과,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기독교에 대해 오해를 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도 이런 일들이 얼마나 많았는지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으킨 십자군 전쟁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중세에는 수많은 여인들을 마녀로 화형을 시켰습니다.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수많은 유럽 교회들이 본문을 인용해 예수님의 이름으로 젊은이들에게 “국가를 위해 너희 목숨을 벌리라.”고 촉구하여 전쟁에 나가 자신의 목숨을 내 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는 “세상에 전할 기독교인의 메시지”라는 그의 유명한 설교에서 1차 대전 당시 교회가 징병사무소 역할을 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기독교 메시지를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데에 이용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또 현대에 들어와서도 미국 911 테러 당시, 수많은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은 이슬람과 전쟁을 벌여야 한다며 종교전쟁론을 주장하는 일들도 있었습니다. 바로 이슬람이 그랬듯이 우리도 예수의 이름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바로 이런 일들이 예수라는 열매와 전혀 상관이 없는 열매를 맺으면서도 자신들은 예수라는 나무의 가지라고 주장하는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진정으로 예수님이신 참포도나무의 가지가 되어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를 알려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진정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는지를 알고, 이를 통해 능력있는 그리스도인,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9~11절 함께 읽겠습니다.

“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는 참 포도나무인 나에게, 가지인 너희는 꼭 붙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라는 것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주님은 1절부터 8절까지 말씀하신 포도나무와 농부와 가지의 비유를 여기서 설명해주고 계신 겁니다.

 

열매와 나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사실 열매와 나무는 하나입니다. 그 나무에서 나올 열매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마 7:16, 20)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 예수님이 보여주셨던 열매를 당연히 우리도 맺게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즉 신앙생활에서는 열매 맺는 것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맺어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기만 하면 그 나무와 농부에 의해 당연히 열매를 맺는 것처럼, 성도인 우리가 예수님과의 관계가 제대로만 되면 신앙의 열매는 당연히 맺게 되어 있습니다.

“내 사랑 안에 거하라.”가 내게 붙어 있으라는 의미라면, 우리가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을 때, 우리에게 맺어질 열매는 무엇일까요?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12, 17)가 바로 열매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께 붙어 있을 때 우리가 맺을 수밖에 없는 열매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또한 예수님께서 맺으신 열매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안에 거하실 때 맺으신 열매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사랑이라는 나무이시고, 그 사랑이라는 나무에서 맺어야 하는 열매도 또한 사랑일 수밖에 없습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가 날 수 없고, 엉겅퀴에서 무화과열매가 날 수 없습니다. 좋은 나무에서 나쁜 열매가 날 수 없고, 나쁜 나무에서 좋은 열매 또한 날 수 없습니다. 예수라는 나무에 붙어 있다면 예수라는 열매를 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이라는 나무에서 사랑의 열매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기대하신 열매는 다름 아닌 사랑입니다. 사랑뿐입니다. 사랑으로만 알아보십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내 사랑 안에 거하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가 명령형으로 되어 있어서, 뭔가를 만족시켜야 할 조건처럼 여겨지지만, 본문의 예수님의 설명을 자세히 보면, 그것은 조건이 아니라, 하나의 결과요 다른 조건에 의해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말씀드리지만, 지금 열매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열매는 가지가 할 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열매 맺는 것은 가지인 우리에게 요구된 것이 아닙니다. 열매 맺는 것은 농부의 일이요, 나무의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라는 것은 농부의 일의 결과요, 참포도나무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맺게 되는 현상이라는 말입니다. 이 점을 분명히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라.”는 어떤 전제 조건으로부터 나온 것입니까?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했으니”가 전제 조건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내 사랑 안에 거하라!”가 나온 겁니다. 이걸 좀 더 풀어서 자세히 설명한 것이 10절입니다. 이번에는 명령형이 아니라, “내 사랑에 거하게 될 것이다.” 예상될 결과로 말씀합니다. 이것은 어떤 전제 조건에서 나옵니까?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이 전제 조건입니다.

 

즉,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은 먼저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다는 점입니다. 전제되어야 할 것은 바로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셨고, 예수님께서 또한 제자들(우리들)을 사랑하셨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붙어 있다는 것도 사실은 우리가 한 일이 아니라, 이미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셨듯이,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결과로써 우리는 예수님께 붙어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이 이미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다는 놀라운 사랑의 행위로써 우리는 이미 예수님께 가지로서 재탄생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할 때, 당연히 나타나는 사실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은 먼저 하나님의 사랑,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셨고, 예수님이 당신이 택한 자들을 사랑하셨다는 점을 알 때 비로소 가능한 결과입니다. 이렇게 결과로서 서로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시는 주님의 명을 따라 사랑의 삶을 살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욱더 강력하게 예수님께 붙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을 알 때, 우리는 사랑의 삶을 살게 되고, 사랑의 삶을 삶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12~15절 함께 읽겠습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번에는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는 더 확실한 전제 조건에 의해서 반드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필연적인 결과로써 말씀합니다. 이 전제 조건들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물론 미숙하거나, 아직 서툴거나 한 차이는 있어도 언젠가는 사랑의 사람으로 변할 수밖에 없고, 사랑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의 전제 조건은 먼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12). 그런데 그냥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더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은 바로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종이 아닌,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불렀으니 ‘나를 위해 희생해라, 나를 위해 죽어다오!’라고 하시는 건가요?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어줄 정도로 참된 친구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그렇게 친구로 삼으시고 친구를 위해 죽어주시는 가장 큰 사랑을 베푸셨으니,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먼저 택하심으로써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먼저 택하신 이유는 바로 열매 맺고, 그 열매로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다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리하자면,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말은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이기 이전에, 예수님께서 이런 사랑으로 사랑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그 사랑을 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받으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그 사랑을 제대로 받으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실패하는 이유는, 우리가 사랑하는 능력이 부족하거나 사랑의 기술이 숙달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어떤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는지, 얼마나 큰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고 섬기셨는지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그저 나 스스로 알아서, 내가 아는 수준에서 사랑이라는 열매를 맺어 보려고 애를 썼기 때문입니다. 사랑받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사랑을 베풀기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그렇게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잘 모르면 신앙으로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제대로 살 수 없고,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모든 일에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은 무엇입니까?

 

6.25 전쟁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한 만삭이 된 어머니가 아기를 낳기 위해 어떤 집을 찾아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만 그 집을 다가지 못하고 길에서 진통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던 어머니는 어느 다리 밑에 겨우 자리를 잡아 아기를 분만하게 되었습니다. 추운 겨울 아무도 도와 줄 사람이 없는 가운데 그 어머니는 모든 것을 혼자 처리하고는 아기가 춥지 않도록 자기 옷을 모두 벗어서 아기를 감싸주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해산 직후 추위에 어머니는 그만 얼어죽고 말았습니다. 얼마 시간이 지난 후 어느 미군 장교 한 사람이 차를 타고 그 근처를 지나가다가 휘발유가 떨어지게 된 것을 알아서 연락을 취해 놓고 그 부근을 거닐면서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아기 울음 소리같은 것이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그 군인은 그 소리를 따라 다리 밑까지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그 군인은 기가 막힌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어머니는 벌거벗은 채 얼어죽어 있었고 어머니의 옷에 둘러싸인 갓난아기가 몹시 울고 있었습니다. "내가 여기서 기름이 떨어진 것이 어쩌면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살리시기 위함인지도 모르겠군." 이렇게 생각한 군인은 그 아기를 데려다가 양자를 삼아 잘 키웠습니다. 그 아기는 미국에서 훌륭하게 자라 멋진 청년이 되었습니다. 늘 자신의 출생에 대해 알고 싶어 하던 그 아들은 어느 날 자기를 키워 준 아버지로부터 자기를 낳아 준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덤을 찾아 한국에까지 왔습니다. 그 아들은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자기 옷을 벗어서 무덤 위를 덮으면서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어머니 얼마나 추우셨어요! 나를 살리기 위해 어머니는 그런 희생을 치르셨군요! 저는 어머니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벌거벗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겠어요!"

어떤 이들은 기독교를 예수님의 훌륭한 가르침이 있는 도덕적 종교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아주 행동이 따르는 실천적이고 영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그 사랑을 이어받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먼저 택하셨고, 먼저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신 것처럼 예수님도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종이 아니라, 친구로 대하셨고,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 큰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택하셔서 우리에게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열매가 늘 있어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 다 받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제 사랑할 때입니다. 사랑의 삶을 다시 시작할 때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은혜와 실천이 우리의 삶과,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일터에 차서 넘쳐 하나님의 크나크신 축복을 받으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이 가득 넘치시는 주님! 주님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여 우리가 서로 사랑하겠사오니, 우리를 붙잡아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셨으니,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루하루 우리가 숨쉬며, 악한 곳에 빠지지 아니하고 주님의 말씀 가운데 사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결코 주님의 변하지 아니하시고 포기 하지 않으시는 사랑을 의지하여, 그 사랑 이어받아 주님을 모르는 자들에게 그 사랑 전하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주 예수님 이름 받들어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