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91) 끝까지 순종하는 자세 (수요예배 20160302)
성경본문: 사도행전 21: 15~26
15.이 여러 날 후에 여장을 꾸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새
16.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머물려 함이라
17.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18.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19.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20.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21.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22.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
23.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24.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25.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26.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
설교: 끝까지 순종하는 자세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요?
자신이 한 일도 아닌데 누가 나를 이용하고 죄를 덮어씌운다면, 그처럼 답답하고 황당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얼마 전 차를 타고 라디오를 들었는데 직장생활을 한 사람의 사연을 들었습니다. 직속 후배라서 이리저리 가르쳐주고 또 실수하지 말라고 따끔하게 이야기 했더니, 도리어 자신이 후배를 괴롭히는 사람으로 소문이 나있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소문이 났을까요? 아마도 후배가 그 직속선배에 대한 이야기를 그렇게 했기 때문이겠지요. 아주 착한 척을 하면서 말입니다.
이런 일이든 저런 일이든 진실은 아시는 분은 우리 주님 밖에 없습니다. 모든 일의 전말은 오직 하나님밖에 아십니다.
사람들은 이야기 합니다. ‘에이~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겠어?’
자신이 직접 당해보지 않고서는 아무도 완전히 그 억울한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늘 사도바울이 제 3차 선교여행까지 마치고 예루살렘에 이릅니다. 여기서 루머에 휩싸여 오해를 받게 됩니다. 참으로 억울할 만 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위해 산전수전 다 겪은 바울은 작은 일이라도 긴 안목을 가지고 은혜 안에서 이 문제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습니다. 주님께서 해결하시게 말입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을 통해 균형 잡힌 대안을 마련해놓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말씀을 통해 우리도 이와 같은 일이 있다면 주님께 내어놓고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믿음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17~21절의 말씀입니다.
17.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18.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19.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20.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21.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을 만났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한쪽에는 이방인을 위해 부름받은 사도 바울의 일행들이 앉아있고, 또 한 쪽에는 유대인들을 위해 부름받은 사도 야고보와 교회 장로들이 앉아있는 모습을 말입니다. 이 가운데에서 사도 바울이 그동안 이방인을 위한 선교와 세워진 에베소, 고린도같은 교회들, 그리고 그 교회들의 상황과 부흥 등에 대하여 선교보고를 했습니다. 아마도 이같은 선교의 열매에 대하여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기본적으로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이들에게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 교인들 사이에 사도 바울에 관한 괴소문이 돌고 있었습니다. 내용은 세 가지였습니다. 바울이 이방 곳곳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모세를 배반하고, 할례를 행하지 말고, 관습을 지키지 말라고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오해입니다. 아니, 누군가가 진실을 왜곡하여 퍼뜨린 잘못된 정보입니다. 바울은 모세를 배반하지 않았고, 관습을 지키지 말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할례에 대해서도 그것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고 가르쳤을 뿐입니다.
제가 구약에서 보면, 가장 억울했던 사람이 한 명이 바로 요셉입니다. 그 끝이 좋게 끝나서 다행이지, 아마도 이집트에서 성공했어도 형제들과의 관계가 좋게 끝나지 않았다면 너무나 안타깝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가장 믿었던 가족이며 형제들에게 버림받았습니다. 꿈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말입니다. 아버지께 사랑받는다는 이유 때문에 버림받았습니다. 꿈꾼 것이, 아버지께 사랑받는 것이 엄밀히 말해서 요셉 때문은 아니지 않습니까?
또한 보디발의 아내의 거짓말 때문에 감옥에 들어갑니다. 주인의 아내와 연애하는 것은 잘 못된 것이라 도망한 것인데 그것 때문에 무시무시한 감옥에서 그 꽃다운 청춘을 지내야만 했던 것은 참으로 억울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또 왕의 떡을 맡은 관장의 꿈을 잘 해석해주어서 풀려나고 부탁까지 했건만 그것도 잠시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 요셉을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억울한 일이었지만, 요셉은 원통해하지 않고 속상해하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억울한 일들 모두 다 받아들이고 하나님만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세 가지 행동을 합니다. 전말을 밝히거나, 복수하거나, 이도저도 안되면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끝까지 그 힘든 시간을 잘 기다렸습니다. 어떻게요? 하나님 안에서 ‘형통한 자’(창39:2)로 만드실 것을 믿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러한 믿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이 권면합니다.
22~25절의 말씀입니다.
22.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
23.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24.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25.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예루살렘교회 지도자들은 이러한 루머 때문에 사도 바울이 위험할 것을 걱정하여 대안을 입니다. 바로 '서약한 네 사람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 결례의식을 행하고 이들이 삭발할 수 있도록 비용을 데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하면 율법에 열심있는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바울에 대한 소문이 잘못된 것임을 확인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서원한 네 사람은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사람들로서 나실인의 서약을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나실인의 서약은 스스로 하나님께 헌신하고 경건한 인생을 살겠다는 서약으로 이 서약을 한 사람은 최소한 30일간은 포도주를 삼가고, 죽은 시체를 멀리하고 머리를 갂지 않고 구별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미 6:4~8) 이 서약이 성공적으로 마쳐질 때는 모세의 율법에 지정된 대로 삭발을 하고 각종 희생 제사를 머리카락과 함께 하나님께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나실인들의 입장에서 희생재물을 마련하는데 드는 경비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1인당 숫양 두 마리와 암양 한 마리와 소제물과 전제물을 위한 비용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일을 교회 장로들이 바울로 말하는 이유는 유대인들에게는 가난한 나실인들을 대신하여 이러한 경비를 부담하는 것이 극히 경건한 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어떻게 했을까요? 이미 겐그리아에서 나실인의 서약을 통해 다 이루고 율법에 따라 삭발을 했습니다.(행 18장) 율법을 지킨 일에 대해서 너무나도 당당합니다. 한두 푼도 아니고 비싼 돈을 치루어가면서 가난한 나실인들의 희생 제물 비용을 낼 이유가 없습니다. 또 괜히 지불했다가 자신이 율법을 잘 지키지 못한 유대인이라는 누명이 더 확실해질지도 모른 상황입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사도 바울은 어떻게 했는지 26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26.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
순종하였습니다. 끝까지 순종하였습니다. 기도로 준비하고 구제와 나눔을 선교현장에서 실천했던 사도바울은 교회 연합과 일치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의 자유도, 주머니도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자존심을 내세우며 버티지 않고 기꺼이 내어주고 또 내어줍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고수요, 은혜의 고수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 12:17)고 썼고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자신의 악을 크신 선으로 응대하신 예수님의 무한한 사랑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바울에게나 우리에게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동일하게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주신 은혜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결코 이 철저한 순종이 자신의 힘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자신도 알았을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만큼은 아닐지라도 우리도 종종 오해와 헛소문의 당사자가 되곤 합니다. 나의 선의가 곡해되어 악의적으로 확대재생산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순식간에 나는 나쁜 사람, 욕심 많은 사람, 공동체를 파괴하는 사람, 타인을 선동하고 편을 나누는 사람의 이미지를 입어 사람들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처지에 놓이면 억울하고 갑갑한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은혜로 살아가는 믿음의 고수들은 오해 때문에 주저앉지 않습니다. 괴소문과 헛소문에 당황하지 않고 도리어 더욱 기도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주님의 교회를 위한 일이라면 기꺼이 나의 자유를 포기하고 희생도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있음을 이거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설령 억울하게 손가락질 받고, 공격당하는 자리에 놓일지라도 도리어 하나님께 감사하는 놀라운 은혜의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전능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
우리가 주 안에서 살면서 억울함을 당하는 일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자존심이 상하고 명예가 떨어지고 아주 이상한 사람 취급받을 상황도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주님만을 바라보겠습니다. 기도의 자리를 지키겠습니다. 말씀 가운데 더 든든히 믿음을 보이겠습니다.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라면, 복음을 위해서라면 내 모든 것을 내려놓는 은헤의 사람이 되게 축복하옵소서! 그래서 주님의 제자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데 부족함이 없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