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강해 101) 세상의 일이 영적으로 풀리는 기적 (수요예배 20160518)
성경본문: 사도행전 24:10~21
10.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꺼이 변명하나이다
11.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열이틀밖에 안 되었고
12.그들은 내가 성전에서 누구와 변론하는 것이나 회당 또는 시중에서 무리를 소동하게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13.이제 나를 고발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그들이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
14.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15.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16.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17.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18.드리는 중에 내가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그들이 보았나이다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으니
19.그들이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당신 앞에 와서 고발하였을 것이요
20.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
21.오직 내가 그들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만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
설교: 세상의 일이 영적으로 풀리는 기적
어려운 일들이 자꾸 생기고 해결점이 없어보일 때 우리는 그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님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는 영의 생각이 있고, 육의 생각이 있습니다. 로마서 8:6에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했습니다. 아주 쉽게 생각해보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탈무드에 보면, 유대인들은 자녀교육을 할 때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꿈을 꾸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항상 말하는 것이 바로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골리앗을 물리치기에는 너무 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들은 두려움에 떨며 감히 저항하지도 싸우러 나가지도 못했다. 그러나 소년 다윗은 돌팔매가 빗나가기에는 골리앗의 몸집이 너무 크다며 자신만만하게 덤볐다. 생각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
그저 긍정적인 생각을 가져야지~ 한다고 해서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눈으로 일어나는 일들을 바라보아야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해결책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아주 욕심많고 세속적인 벨릭스 총독과 어떻게 해서든 죄를 덮어씌워서 죽이려는 유대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이 무엇이고, 진실이 무엇이든지 소용없이 결론이 나오는 재판입니다. 이 가운데에서 충분히 두렵고 무서울 수 있는 상황인데도 바울은 담대히 침착하게 조목조목 죄목에 대해서 반박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용기이고 지혜입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놀라운 지혜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우리 마음 안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확인하시기를 바랍니다.
10~13절의 말씀입니다.
10.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꺼이 변명하나이다
11.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열이틀밖에 안 되었고
12.그들은 내가 성전에서 누구와 변론하는 것이나 회당 또는 시중에서 무리를 소동하게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13.이제 나를 고발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그들이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
드디어 바울에게 말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분위기는 좋지 않습니다.
10절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라는 부분을 보니, 총독이 바울에게 변론할 기회를 주는데, 오만하게도 고갯짓으로 지시하고 있습니다. 총독이 아주 자기가 위인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권위를 부릴 데로 부리고 있습니다. 만약에 이런 모습을 보면, 다른 사람 같으면 온 몸에 힘이 빠져 말할 용기도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저 총독은 마음속에 결정 내려놓고 말을 안들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조금도 기죽지 않고 낙망하지도 않았습니다. 당당히 자신의 입장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어서 말합니다. “그가 대답하되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쁘게 변명하나이다” 바울은 혐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이 재판은 바울에게 불리한 재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낙심치 않았습니다. 그는 벨릭스가 유대 총독으로 부임한지 6년이 지났다는 이 한 가지에다 소망을 걸었습니다. 6년이면 유대의 문화를 잘 알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일 뒤에는 유대인지도자들의 정치적인 욕심이 있다는 것도 알 것이고, 또 거기서 어떻게 해야 일이 해결될 지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말하는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도 남는다는 것입니다. 정공법으로 사도 바울은 벨릭스 총독에게 맞대어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반드시 느끼는 바가 있어야 합니다. 영의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이렇게 합니다. 360도 꽉 막혀있는 어려움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가장 큰 바위 같은 어려움을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하여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일을 육적으로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해결되는 것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러한 신앙자세로 있었던 바울이 조목조목 유대인들이 고발한 성전 모독죄에 대해 자신이 아닌 이유에 대해 말합니다. 11~13절을 보면, 바울 자신은 예루살렘에 선동하기 위해 올라간 것이 아니라, 다른 이방에서 온 유대인들처럼 예배하러 간 것이라고 분명히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는 예루살렘에 온지 불과 열이틀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선동할 사람들을 모으고 또 선동할 시간이 있었겠느냐는 말입니다. 또한 만약에 성전이나 회당에서 소동한 일이 있다면 거기에 대한 증인이나 고소자가 그 당시에 없다는 말입니다. 사실 바울이 나타나자 소동을 일으킨 자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을 도와 소동을 일으킨 적이 없습니다. 이 모든 일에 바울이 혼자 이 많은 유대인들을 상대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3절에 아주 분명히 말합니다. “이제 나를 송사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저희가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 혐의가 없으므로 정죄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평안하고 아주 차분한 논리적인 변호입니다. 보통 이런 분위기에 처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당연히 있어서 제대로 말을 못했을 텐데, 바울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때보다도 차분하고 그 어떤 때보다도 평안하였습니다. 이런 힘이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한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어 재판을 받고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습니다. 사형 집행이 있기 전날 밤 그의 사랑하는 동생이 찾아왔습니다. 동생은 형과 마지막 밤을 함께 지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형은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는 ‘나는 평상시와 하나도 다를 바 없이 잠자리에 누워서 잠을 자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당하는 죽음을 어떤 자세로 받아들였는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는 동생을 통해서 힘을 얻기를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신앙을 가진 이후 이제껏 하나님께서 인도하여 주심을 생각하면서 평안을 얻고 담담한 마음으로 순교의 잔을 마시기로 마음을 굳혔던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승리의 요인이 우리에게서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영적 생활에서 참으로 중요합니다. 승리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며, 하나님을 의지하면 의지할수록 누릴 수 있는 평안의 능력은 훨씬 더 강해집니다. 왜냐? 하나님은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굳게 서는 모습을 가장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에 바울은 힘을 얻어 그 위기의 순간에서도 올바른 신앙을 전합니다. 14~20절입니다.
14.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15.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16.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17.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18.드리는 중에 내가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그들이 보았나이다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으니
19.그들이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당신 앞에 와서 고발하였을 것이요
20.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리킵니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는 바로 이것입니다. 유대교는 아직도 구약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를 만났으므로 신약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내 구주되시고, 하나님 자녀되게끔 모든 죄값을 치루시고 승리하셔서 예수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 큰 구원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한 단계 넘어서지 못하면 사단은 그것으로 우리의 발목을 잡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붙잡아 두어 육의 생각에 가두어 멸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유대인들과 총독들 앞에서 진정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15-16절에 “저희의 기다리는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라고 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부활을 다시 언급한 것은 유대인들의 고소가 교리적으로도 타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가진 믿음을 바울도 가졌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힘쓰노라”는 의미는 늘 습관적으로 연습하고 훈련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영적인 사람은 미래의 부활을 믿을 뿐 아니라 현재의 부활을 경험하며 살아야 합니다. (요5:25)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주님의 부활을 실제로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이 살아있음도 경험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17절에서 이방교회에서 예루살렘의 사람들이 가뭄에 고통당하고 있었을 때 도움을 준 사실들을 언급하면서 살아있는 신앙, 행동하는 신앙이야말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왜곡하여 마치 유대인들을 해하고 하나님을 모욕하는 행위를 한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총독의 지도력을 반대한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면서, 19~20절에서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이미 벌써 자신은 총독 앞에 고발당해 왔어야 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사건은 총독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뜻도 됩니다.
이렇게 당당히 말하고 변호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신앙의 문제까지 말하는 바울은 육적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세상에서 많은 일을 겪습니다. 교회에 다니고 또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세상의 어려운 일이 닥치고 억울한 경우가 생겼을 때 과연 우리도 이렇게 하나님의 인도 안에서 영적으로 일을 처리했는가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오늘 주님께서 바울과 함께 하셨던 것처럼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께 날마다 의지하며 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 우리의 힘이시오, 방패시오, 요새이오, 우리의 구원자 되심을 감사드립니다. 바울이 영적으로 세상일을 대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의 신앙도 늘 주님을 향하여 나갈 수 있도록 성령으로 붙들어 주소서. 이모든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 받들어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