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5)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셨다 (수요예배 20161019)
성경본문: 로마서 1: 26~32
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28.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설교: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셨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작품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에게 두 여인이 찾아왔습니다. 한 여인은 자기는 큰 죄를 지은 죄인이라며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고, 또 한 여인은 자기는 일생에 이렇다 할 큰 죄는 짓지 않았지만 자질구레한 잘못은 많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두 여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들 수 있는 가장 큰 돌덩이를 가져오시오. 그리고 당신은~" 목사님은 일생동안 이렇다 할 큰 죄를 지은 기억이 없다는 여인에게 말했습니다. "자잘한 돌멩이들을 치마폭이 가득 주워 오시오."
한참 후에 두 여인은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하여, 한 여인은 커다란 바윗돌을 낑낑거리며 옮겨왔습니다. 다른 여인은 새알만한 잔돌들을 치마폭 가득 주워왔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다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미안하지만 이번에는 그 돌멩이들을 제자리에 갖다 놓고 오시오" 큰 바윗돌을 가져온 여인은 다시 낑낑거리며 바윗돌을 제자리에 갖다 놓았습니다. 어디에서 가져온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새알만한 잔돌을 치마폭에 가득히 주워온 여인은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거요!"목사님이 소리쳤습니다. "하나님께 당신이 지은 죄도 바로 이런 것입니다! 당신은 하루하루 이러저러한 죄를 지으면서도 하나님께 죄책감 없이 일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많은 죄를 지었어도 한번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큰 바윗돌을 가져온 여인은 큰 죄를 짓고 이렇게 통회하고 자복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용서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목사님은 큰 죄를 지은 여인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를 진정 회개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살면서 알고도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죄들에 대해 무감각하게 살면서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으면서도 하나님을 무시하면서 죄지은 데로 그저 살아가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셨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모든 일들을 행하면서도 회개치 아니하는 자들에게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을 통해 크나큰 깨달음을 얻고 또한 은혜 받으시는 귀한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26~27절의 말씀입니다.
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결론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부끄러운 욕심을 내버려 두셨다”라는 것입니다. 그 부끄러운 욕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대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 마음대로 이기적이게 사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7~30절에 보면,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28)라고 나오면서 식물들 또한 인간들이 먹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을 잘 관리하고 다스릴 수 있도록 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들의 즐거움과 자신들의 만족을 위해서 이 모든 관계와 섭리를 마음대로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중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동성애’입니다.
바울 당시의 그리스-로마 사회는 동성애에 대해 아주 관대했을 뿐 아니라 어떤 사람들에게서는 이성간의 사랑보다도 우월한 것으로 여겨지기조차 했습니다. 윌리엄 바클리라는 신약주석가에 따르면 로마제국의 첫 열다섯 명의 황제 가운데 열네 명은 동성애자였다고 합니다. 고대 로마 제국의 황제들의 전기를 쓰는 데 일생을 보낸 작가로서 유명한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율리우스 시저는 모든 여인의 남자였고 또한 모든 남자의 여자였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동성애가 만연되어 있었을 로마에 살고 있으면서 어쩌면 그런 비정상적인 윤리현상에 대해서 불감증에 걸려있었을지도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하며 그것이 “부끄러운 욕심”을 따라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는 것이며(26) “부끄러운 일”을 행하는 것이고 “그릇됨”이라고 분명히 말한 것입니다(27). 또한 사도 바울은 남색하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라고도 말했습니다(고전6:9-10).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가 남자를,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동성애가 아직도 우리 안에 있습니다. 심지어 몇몇 유럽의 교회들은 게이나 레즈비언을 목사나 사제가 될 수 있도록 하기도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 교회들이 어떻게 바라봐야하는가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인간이 먼저냐, 동성애의 죄가 먼저냐”
아주 민감한 문제입니다. 이에 대해 김동호 목사님이라는 분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미국에서 동성애 법이 통과 되면서 동성애자들의 결혼주례를 거부한 목사가 벌금을 물고 감옥에도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만에 하나 동성애 결혼주례를 하지 않아 감옥에 가야하는 일이 한국에서도 일어나게 된다면 나는 아마 벌금을 물고 감옥에도 갈 것이다. 전 재산을 다 잃고 그것도 부족하여 감옥 생활을 한다고 하여도 내 신앙 양심상 동의 할 수 없는 동성애자들의 결혼주례를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동성애자들을 적으로 삼고 싸우지는 않을 것이다. 벌금을 물고 감옥에 갈 수는 있어도 저들과 싸울 순 없다. 정신 차리고 저들과 싸워 교회를 지키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저들과 전쟁을 벌일 순 없다. 그러는 순간 우리는 저들과 교회를 둘 다 다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저들은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내 선교와 목회의 대상이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혼탁한 죄들과 싸우면서 하나님의 사랑 또한 전하는 방법입니다. 인간이 나중이 될 수도 동성애가 죄가 아닐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라는 것을 옳게 전해야하며, 그 안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보겠습니다. 28~32절입니다.
28.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도스토예프스키의 유명한 명언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만약 신이 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만 한다면 사람들은 못할 일이 없다." 참으로 무서운 말입니다. 사람들이 악한 일을 하면서도 그나마 어느 정도 자신을 절제하는 이유는 "어쩌면 내가 이러다 혼나지"라는 신에 대한 어떤 의식이 그들의 양심을 억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신이 없다고 확신하게 되면 이 땅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이렇게 바꿔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자기가 신이라고 느낀다면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신이 없다고 확신한다는 것도 위험한 일이지만 자기가 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더욱 위험한 일입니다. 모든 것에 대한 판단의 기준은 자신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신이라면 마음대로 해도 누가 상관하겠습니까? 그때부터 사람들은 용감하게 타락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바로 이 상황을 지금 사도 바울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먼저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기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사실 이 세상은 하나님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 일어나는 모든 것 뒤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없는 데가 없습니다. 그 손길을 보는 믿음의 눈만 있으면 다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늘 감사할 수 있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악한 자가 앞에서 날뛰고 잘난 체하고 위협하고 힘들게 해도 태연할 수도 있고 웃을 수도 있는 것은 그 뒤에서 빙긋이 웃으시며 염려 말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있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연과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보다 확실하게 성경을 통해서 말씀을 하시며 자신을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경을 가까이 하고 교회에 나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며 그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면 하나님과 소통이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더 가까이 더 온전히 두면 둘수록 하나님과의 소통이 더 원활해집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가 내 안에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십니다.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둔다는 것은 “타락한 마음대로” 내버려둔다는 것입니다. 삶의 문제들을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판단하며 바르게 행할 능력을 상실하게 되는 대로 내버려두신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게 하시려고 지으신 존재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살려면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두어야 합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두어야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대로 만사를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대로 만사를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곧바로 부패하고 타락하며 상실의 상태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두어야 하나님께 합당한 일을 할 터인데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으니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더 무서운 것은 무엇인줄 아십니까? 이러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그저 내버려 두셨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심판의 날에 의인들을 온전히 데려가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알곡과 가라지 비유를 기억하십시오. 주인이 무엇이라 말합니까?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마태복음 13:29)
악한 일들을 그대로 놔두시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입니다. 내버려두신다하여 힘없이 건드리실 줄 모르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란 말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에 번쩍 정신이 드시기 바랍니다. 영혼이 깨어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주 앞에 나옵니다. 우리의 알고도 지은지, 모르고도 지은 죄 다 용서하여 주시고, 주님의 백성으로 날마다 살게 하옵소서! 악인들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도록 날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던 그 은혜 주시옵소서! 오늘도 주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모든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 받들어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