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선교교회/한국어예배

로마서 강해 30)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 (수요예배 20170426)

온누리선교 2017. 4. 26. 17:15


 

성경본문: 로마서 8: 18~25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설교: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

 

로키 산맥 해발 3천미터 높이에 수목 한계선인 지대가 있습니다.

이 지대의 나무들은 매서운 바람으로 인해 곧게 자라지 못하고 '무릎 꿇고 있는 모습'을 한 채 있어야 합니다.

이 나무들은 열악한 조건이지만 생존을 위해 무서운 인내를 발휘하며 지냅니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가장 공명이 잘 되는 명품 바이올린은 바로 이 '무릎 꿇고 있는 나무'로 만든다고 합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이 고통스런 세상에서 편안해지기만을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 다 잘 될 거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를 보아도 예수만 믿으면 고통 없고, 모든 일이 다 잘되고 넘치는 복을 받는다는 말은 없습니다.

신명기 28장은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이 있는데, 여기서도 무조건 복을 준다하시지 않습니다. 신명기 28:1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한 조건이 있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이 복을 받기 위해 우리가 치러야 할 것이 무엇인지, 또 참아 내야할 것이 무엇인지 아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진정 좋은 것, 가치 있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 주시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18절 말씀입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만약에 6살짜리 아이에게 금덩이를 줘보십시오.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 금덩이를 은행으로 가져가 돈으로 바꾸겠습니까?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사겠습니까? 그저 번쩍번쩍 빛나니까 신기해서 가지고 놀기만 할 것입니다. 그만큼 가치를 모릅니다. 자기가 무엇을 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현재의 고난지금 고난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미래에 우리가 받을 영광이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금덩이를 쥐고 있는 어린 아이와 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구원을 모릅니다. 그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저 던지는데 금덩이가 무겁다고 징징거리는 아이처럼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에 대해 불평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틀립니다. 그 금덩어리의 가치를 아는 것처럼 그 금덩어리를 닦고, 광내고 감싸고 꼭 품에 앉습니다. 불편해도 힘들어도 참아내며 그 금덩어리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정신 똑바로 차립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황제의 그 어마어마한 핍박에서도 믿음을 포기 하지 않았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어떠한 고난을 받고 있습니까?

사실 시간이 있으면 교회 나오고, 시간 없으면 말고, 이런 사람에게는 고난이란 말조차 의미가 없는 말입니다. 없는 시간이라도 쪼개고, 만들어내고, 하나님 앞에 해결해야 하는 것 다음으로 미루지 않습니다. 내게 비록 손해가 와도 우선 갚고 해결하려는 각오가 없는데 그런 사람에게는 고난이란 전혀 없습니다. 그런 이의 신앙은 악세사리와 같습니다. 멋으로 믿는 척하는 사람에게는 평생 고난이 따르지 않습니다.

고난 받지 않는 것이 복이 아닙니다. 주님의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고 나아가는 사람이 진정 복된 사람입니다.

데이비드 프라이어라는 믿음 좋으신 분이 다음과 같이 간증했습니다.

"병들었을 때에는 내가 병들지 않았다면 못했을 기도가 있습니다. 병들었을 때에 은혜되는 나름의 찬송이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는 믿어지지 않는 기적이 있었습니다. 병들지 않고는 들리지 않는 말씀이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는 가까이 하는 않는 성경이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는 우러러보지 못할 영안이 있었습니다"고 했습니다.

프라이어라는 분은 질병을 통하여 참으로 위대한 신앙으로 들어갔습니다. 건강할 때에도 기도를 드리지만, 병들었을 때에 드리는 기도는 달랐습니다. 어느 때에도 간절한 기도를 드릴 수 있지만, 병들고 보니 간절한 기도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병들지 않고는 부르지 못할 찬송도 있습니다. 건강할 때에는 기적이 믿어지지 않았는데 병들고 보니 기적이 믿어졌습니다. 병들지 않고는 듣지 못할 말씀이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는 이해되지 않고 가까이할 수 없었던 성경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프라이어 성도님은 "오 하나님, 그런고로 나는 병들지 않고는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 주님을 배우기를 원하십니까? 주의 멍에를 지고 배울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주님을 따를 수도 없고, 배울 수가 없습니다. 멍에를 지고 십자가를 지시고 주님을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요,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큰 복이 되는 것입니다.

 

23~25절의 말씀 함께 이어서 보겠습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우리의 구원은 어디서 얻었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얻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또 3일만에 부활하셔서 우리의 소망이 되셨습니다. 주님께서 받으신 고통보다 우리의 고통이 나을리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그 엄청난 고통을 당하셨고,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사단의 사망권세, 죽음의 힘을 물리치쳤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 주님과 함께 하는 것,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 받는 것! 이 모든 것은 다 우리에게 가치가 있는 것이고, 반드시 해야합니다.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면서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그 옛날 요르단 계곡에 세 그루의 나무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세 나무는 각기 갖고 있는 꿈을 이야기했습니다. 첫 번째 나무가 말했습니다. "나의 꿈은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이 되는 것이야. 그렇게 되면 평생 하나님께 봉사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자 두 번째 나무가 말했습니다. "나는 사람들을 섬기고 싶어. 나의 몸으로 큰 배를 만들어 푸른 바다를 가로지르며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것 말야."

두 나무의 얘기를 듣고 있던 세 번째 나무도 가지를 높이 쳐들며 말했습니다. "나는 여기에 남아 있을 테야. 그 무엇보다도 높게 그리고 넓게 가지를 칠거야. 그래서 뜨거운 한낮, 피곤한 길손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고 싶어."

얼마 후 드디어 세 그루의 나무는 이름 모를 도끼에 의해 잘려지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나무는 자기의 꿈이 이루어지는 줄 알고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그의 기쁨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이 된 것이 아니라 베들레헴 어느 집의 냄새나는 말구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내가 겨우 구유가 되다니..."하며 그는 심한 모욕감에 눈물까지 글썽였습니다.

두 번째 나무는 소원대로 배 만드는 공장으로 보내졌으나 큰 바다를 항해하는 큰 배가 아니라 갈릴리 호숫가에 머무는 작은 고깃배가 되었습니다. 그 역시 자신의 큰 꿈이 깨어진 것에 대단한 절망을 느꼈습니다.

세 번째 나무 역시 잘려졌습니다.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는 나무로 남지 못하고 큰 죄인을 처형하는 십자가 형틀로 만들어졌습니다. 그 나무는 자신의 옛 꿈과 현실을 비교해 보고는 크게 슬퍼하며 수치감에 몸을 떨었습니다.

세 그루의 나무들은 자기들의 짧은 생각 끝에 그들의 생이 무의미하며 실패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현재의 불행이나 고통에 너무 쉽게 좌절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현재의 고통 속에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이 숨겨져 있었던 것을....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가장 아름다운 미래를 준비해 놓은 것을 말입니다.

첫 번째 나무는 심히 냄새나고 누추한 말구유가 되었으나 어느 날 밤 가장 거룩하고 성스러운 아기 예수가 눕혀지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두 번째 나무는 갈릴리 호숫가의 조그만 고깃배가 되었으나 어느 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그 배에 오르셔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 어떤 범선보다 더 큰 명예를 얻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 나무는 그 자리에 서 있지 못하고 잘려졌으나, 인류를 대신하여 희생을 당하신 예수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가 되어 그 후 영원한 구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요르단 계곡에 서 있던 세 그루의 나무들은 한 때 자신들의 꿈이 좌절되는 듯한 고통을 겪었으나 그 고통 이후에 참으로 영광이 넘치는 기쁨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지금 이 순간 내 자신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쉽게 낙담하고 쉽게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오늘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기억하시면서 더욱 더 주님을, 더욱 더 하나님을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영광의 주님! 주님의 영광을 향해 하루하루 나아가는 우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말씀대로 주님의 뜻을 위해 살게 하옵시고, 우리가 당하는 이 고통을 견디고 이겨낼 힘을 주시옵소서! 내 판단이 아니고 오로지 주님의 말씀대로 살기 원하오니 주여 역사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