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 (요 1:14 주일예배 20170820)
예배기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지니라'(요4:24)
살아계신 하나님! 당신을 찬양하고 예배하러 저희들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친히 임재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찬양 받아주시옵소서 이모든 말씀 주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설교: 예수 그리스도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나이 많은 대주교가 교회에서 기도합니다. 날마다 기도 합니다. “예수님..” 하고.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느 날 “왜 그러냐” 라고 말씀하시자 그만 깜짝 놀라가지고 심장마비로 죽었답니다. ‘예수 그리스도’ 라고 매일 부르기는 했지만 그냥 불렀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살아계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불렀다가 예수님 답하실 거라고 생각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평생 교회에 다니고 교회에서 높은 자리까지 올라 살았으니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습관적으로 주님을 부르고 이제는 주님이 있으나 마나 뭐~ 마치 세상사람들이 미신 믿듯이 믿었으니 예수님 진짜 대주교를 부르셨으니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지금 우리도 이런 일들이 많습니다. 어떻게 해야 예수님을 제대로 알 수 있을까요?
제가 예전에 천안 나사렛대학교강의를 가다가 고속도로에서 'Jesus loves you'라고 쓴 간판을 보게 되었습니다. 희한하다 생각하였는데 알고 보니 고려 은단 사장님이 서울 소망 교회 장로님인데 기업 광고를 그렇게 하셨습니다. ‘Jesus loves you' 이것은 ’God loves you'하고 같은 것 같으면서도 굉장히 차이가 나는 겁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 서양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 할 때 그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으로 알고 있기에 문제가 없겠습니다. 그러나 한국적 문화와 한국적 심성으로는 ‘God loves you' 하면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자기마음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이 나를 사랑한다. 귀신이 나를 사랑한다. 조상신이 나를 사랑한다‘라고 말입니다.
’Jesus loves you' ‘예수님이 너를 사랑하신다.’ ‘예수께서 십자가와 그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신다.’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한국에 미국이니 영국이니 서양에서 선교사들이 복음 전하러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들 보기에 너무 황당한 것이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대문에서부터 저 뒷간까지 부엌과 온갖 곳곳에 귀신들이 다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뭐라고 얘기했냐면 “다 그만두고 그저 딱 하나 예수 귀신 믿읍시다. 예수 귀신이 제일 강한 신이요.” 이렇게 이야기 했답니다.
그랬더니 한국사람들이 자기들이 믿는 신보다 더 강한 신들이 있다는 걸 들고 무슨 말인가 선교사들한테 예수님에 대해 들으러 왔습니다. 이렇게한 다음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말씀 속에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깨닫게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장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말씀’이라는 단어는 그리스말로 '로고스'라고 말합니다. 그리스철학자들이 가장 마지막에 내리는 최고의 개념이었습니다. 그 ‘로고스’. 원리라고 하는 것. 궁극적 원리, 온 만물이 그로부터 나온다고 여겨지는 그 마지막 존재를 '로고스'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옛날 한글 성경으로 번역할 때, 초기에는 ‘태초에 도가 계시니라.’라고 했답니다. 그리고 나중에 개혁 성경으로 다시 번역될 때는 그것을 보다 더 쉽게 풀어서 ‘말씀이 계시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냥 이 ‘말씀’이라고 번역한 많은 말들은 다 딱 맞지가 않습니다. 마치 떠다니는 구름과 같은 말입니다. 잡히지도 않고 ‘아~ 그런가보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히브리말로 설명합니다. 히브리말로 ‘따바르’. 이 ‘따바르’라고 하는 말씀은 선지자를 통해서 들려주신 말씀.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구원하시고, 때로는 심판하시고, 절망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위로하시고, 약속을 주셨던 그 말씀입니다. 헬라 사람들의 ‘로고스’와 히브리 사람들의 ‘따바르’라고 하는 그 말씀을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로 묶어서 ‘이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이 전하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로고스’ 이신 말씀, ‘따바르’라는 그 말씀이 사람의 몸을 입고 나타나신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말씀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을 몸소 그 몸으로 감당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
하나님의 방법은 참으로 놀랄만한 것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생각하거나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떠신 분인지를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들, 제자들, 사도들에 의해서 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지 않아도 성령받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뭐라고 말합니까?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다.” 우린 이제 더 줄여가지고 ‘예수 그리스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나온 대로 정확하게 말한다면 "예수가 그리스도다. 예수가 메시야다. 예수가 내 인생의 모든 물음에 해답이 되시는 분이다. 그리고 오늘 내 삶 속에 모든 문제와 모든 물음에 응답을 주시는 분이다. 예수가 그리스도다. "
이러한 신앙고백을 헬라어로 ‘케리그마’ 라고 합니다. 사도들을 통해서 증거된 예수. 그리고 성령을 체험한 사도들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다른 거 하는 거 아닙니다. 교회는 구제도 열심히 하고 서로 모여 교제도하고 열심히 배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생명력은 성경공부 많이 하는데 있는 거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 열심히 돕는데 있는 거 아닙니다. 우리끼리 열심히 서로 교제하는 거 아닙니다.
가장 근본적으로는 이곳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라고 하는 유명한 신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 번 오신다. 첫째는 인간이 되어 성육신 되어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다시 재림하여 그 몸을 보이실 것이다. 그럼 두 번째는 뭐냐? 그 분은 성령으로 교회를 이루면서 이 땅에 오신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이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해야 됩니다.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집중해야 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좋은 일을 해도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제가 유럽을 가봤더니 궁전 같은 교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그 큰 교회들의 정원이나 뜰에는 공동묘지가 있습니다.
유럽이나 미국, 캐나다, 호주 등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거의 다가 ‘난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매주일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아이 세례, 결혼식, 그리고 친척이나 친구 장례식’때 외에는 교회를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거의 15년 전 일이지만 영국인 목회자들도 잘 없어서 외국인 목회자들이 와서 몇 개의 작은 교회들을 목회하는 경우들도 많았습니다. 교회 건물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이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이 교회입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18:20)라고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우습게보지 마십시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직접 우리 눈앞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면 사울이었던 바울과 같이 예전에 예수님께 죄를 많이 지어야 합니다. 농담입니다. 사울로 살던 바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을 괴롭히고 감옥에 가두고 죽였던 사람입니다. 스데반 집사도 그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던 사울을 부르신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바알이 부른 것도 아니요, 아세라가 부른 것도 아니요, 귀신이 부른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자신의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으십니다.
예전에 교회에서 대학부를 맡고 있었는데 교회학교 교사로 열심히 봉사하던 여자 청년이 있었습니다. 사실 제가 맡진 않았지만 아주 신앙적이신 분이라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사실 예쁘고 성격이 좋아서 총각 전도사님들이 짝사랑들을 많이 했습니다.
이렇게 예쁘고 괜찮으니 남자친구가 없었겠습니까?
이 남자친구도 너무 괜찮은 겁니다. 좋은 집안에 좋은 성격에 좋은 직장에 멋진 외모까지~ 너무나 빠질 것이 없는 친구였습니다.
나이가 들어 결혼을 해야하는데 이 여자청년이 고민에 빠졌습니다.
너무 완벽한 남자친구에게 단 한 가지 결점이 있었는데 믿음이 없었습니다. 교회에 그렇게 오라고 전도를 해도 이리 저리 핑계만 대고 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름 어디서 받았는지 교인에게 상처 받은 일도 있어서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남자친구를 너무 사랑하는 마음에 날마다 진심으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또 그 가장 길다는 시편을 손으로 쓰기도 했습니다. 금식 기도도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느 날 이 남자친구가 여자청년의 말을 듣고 “한 번 교회에 가보자”고 했습니다.
너무 뛸 듯이 기뻤던 이 여자청년은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며 그 주일에 목사님께서 아주 은혜로운 설교를 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 날이 왔습니다. 남자친구가 정말로 교회에 왔고 함께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주보를 보고 너무나 놀랐습니다. 그 날 말씀이 마태복음 1장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장의 내용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라고 시작하여 누가 누구를 낳고 또 누가 누구를 낳고~~
목사님께서 예수님 족보, 예수님 조상들에 대해 쭉 재미없게 그 날따라 설명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여자청년은 너무나 실망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목사님 설교를 들어주는 남자친구가 너무나 고맙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예배 내내 주님을 원망했습니다. “어떻게 내가 기도했는데 이러실 수 있나”
그리고 이 주일예배가 끝나고 남자친구는 아무 말없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토요일이 다가왔습니다. 미안해서 교회가자는 소리를 못하고 있는 여자청년에게 내일 몇 시 예배 같이 볼 거냐고 물어보면서 그 때 같이 예배 보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요일을 몇 번 같이 예배 보더니 주일학교 행사 때문에 같이 예배를 못보게 되자, 자기 혼자 와서 주일예배를 이 남자친구가 보더랍니다.
그래서 여자청년이 물어봤습니다. “왜 예배를 드리게 되었어? 교회 실망하지 않았어?”
남자친구가 말하길, “난 예수라 하길래 무슨 허황된 가짜 신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이 믿고 싶은데로 믿는 줄 알았지~ 그런데 진짜 이 세상에 있었던 분이시더라구, 가족도 있었고 가짜라면 저렇게 촘촘한 조상들이 있을 수 없잖아~, 뭔가 있다싶더라구 그래서 예수를 더 잘 알고 싶어서 그동안 예배 온 거야. 그리고 알았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얼마나 훌륭하신 분인 걸~ 날 포기하지 않고 교회에 와서 예수님 만나게 해줘서 고마워~”
예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모를 뿐입니다. 피와 물을 흘리며 죽음으로 생명으로 산 영혼들을 결코 포기하실 리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오늘 이 시간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십자가에 죽으셨다.”(빌 2:5~8)
기도하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주님의 은혜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루 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시고 우리와 같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성령으로 이끄시는 그 은혜를 받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온전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놀라운 능력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시고 예수님의 복음을 널리 전하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