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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꼐서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 (롬 8:23~27 주일예배 20180527)

온누리선교 2018. 5. 26. 18:25

성경본문: 로마서 8:24~27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설교: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

 

세상에서 고통 없이 아주 편하게 너무 편하게 사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무도 없습니다. 그저 예전보다는 더 편해지고, 아니면 앞으로 더 좋은 것이 있을 거다 생각하고 참거나 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시사영어사에서 일을 할 때에 너무 힘들고, 스트레스 받고 어려웠습니다. 10시간씩 일을 하고, 육체적으로도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달까지만 해야지, 더 이상 못하겠다하더라도 한 달 뒤 은행통장에 월급이 딱 들어오는 것을 보면, ‘아 앞으로 한 달만 더하자!’하며 어쩔 수 없이 일을 해야했습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내가 힘든데, 내가 불행한데, 그런데 돈 때문에, 살아야하기 때문에 힘든 일을 계속하면서 산다는 것이 결코 행복한 일은 아닙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 모든 것들이 다 고통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것 보면 성경말씀이 우리가 사는 상황과 너무나 딱 맞습니다.

그럼 우리는 이러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지금 우리는 교회에 와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려고 와 있습니다. 예배를 그래서 드립니다. 하나님 만나서 무엇을 하려고 합니까? 주님 앞에 우리가 오는 이유는 세상의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바로 행복이고, 그 고통이 주님의 손에서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한 구절 한 구절 마음속에 있는 질문들에 답을 해주고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24~25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바울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분명히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우리의 구원에 소망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구원은 현재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장차 완성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되 미래에 이루어질 구원을 소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믿음과 소망이 동반될 때에 온전해 질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약속을 받았을 때에는 아직 아들 한 명도 낳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약속이 미래에 성취될 것을 바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믿음과 소망으로 구원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기에 우리에게 인내를 필요로 합니다. 아브라함은 후손의 줄 것이라는 약속을 받은 즉시 아들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 아들을 얻기 위해 25년을 더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손을 통해 모든 족속이 복을 받기까지는 수 천년의 세월이 더 필요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실행될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참고 기다리는 일이 우리에게 당연한 것이지만, 너무나도 힘듭니다. 사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 맞다는 것이 알면서도 사람의 힘으로는 참고 기다리는 것이 힘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6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26절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바로 성령님께서 우리가 참고 기다릴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기도로 견딜 수 있도록, 기도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연약하더라도 말입니다. 헬라어로 연약함이란 아스데네이아, 문자적으로 보면 힘이 없는 상태를 의미 합니다. 혹은 나약함으로도 비겁함으로도 쓰이기도 합니다. 이는 우리의 모습이 너무 약하다 못해 무기력하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기도하지 못함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그 무기력을 이기도록 도우시는 기도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우시나니라는 헬라어 쉬난틸람바네타이는 문자적으로 함께 가담하여 열심히 돕다라는 뜻입니다. ‘그럼 왜 돕는가?’에 대해서 바로 그 이유가 나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고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님은 우리에게 기도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돕는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와 함께 짐을 옮기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너희에게 보낼 것인데 그는 너희를 돕는 자 보혜사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를 돕고 계십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성령께서 내짐을 져주므로 돕는 것을 말합니다. 기도가 쉬운가요? 기도는 무거운 짐입니다. 힘이 듭니다. 성령님이 내 짐을 져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기도하지 못합니다. 기도하기가 너무 힘이 들기에 때문에 기도한다해도 그저 형식적인 기도로, 혹은 잘못된 기도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할 때에 성령께서 도와주시기를 간청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도우시는 기도는 내 마음에서 기도가 샘물처럼 솟아 흐릅니다. 이런 기도는 시간이 30분이 지났는지, 1시간이 지났는지 모를 정도입니다. 그 때에 기도 속에는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교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 즉 기름부으심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빌 바를 알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우리의 문제와 죄를 깨닫게 해줍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우리의 그 문제와 죄의 뿌리를 뽑아내십니다. 그래서 성령의 불은 더러움을 태우는 소독작용을 합니다. 이 세상에 가장 좋은 소독 방법은 불로써 태우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로 죄악의 병균으로 가득한 우리의 영과 마음과 몸 가운데 성령께서 임하셔서 소독하시므로 정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의 부흥은 놀라웠습니다. 2000명이 넘는 신자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통회 자복하는 바람에 그들의 기도소리가 교회당 지붕을 날려 버릴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성령이 임하자 어떤 어머니는 피난을 가다가 자기 아이를 강에 빠뜨리고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 온 죄를 고백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간통한 죄를 자백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도둑질, 간음, 미움, 질투 등 온갖 더러운 죄를 한꺼번에 토해 놓기 시작했습니다. 이 모습을 두려워서 많은 성도들이 교회에서 뛰쳐나가 도망을 치다가 무슨 강력한 힘에 이끌려 도로 교회로 돌아와서 뒹굴며 가슴을 치며 회개하고 죄를 토해 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거꾸러져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춥기로 유명한 평양의 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저녁 7시에 시작된 부흥회는 새벽 2시가 되어도 끝날 줄을 모르고 사람들은 모두 성령의 은혜에 취해 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의 일로서 당시에는 유교와 불교가 나라에 널리 장려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한 시대에 성령이 임하심으로 저녁 7시부터 새벽 2시까지 성도들이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통회하고 자복하는 운동이 일어났고 이 불길이 한국에 넘쳐나 오늘날 한국교회에 부흥을 일으키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이 임하면 우리 안에 온갖 더럽고 흉악한 죄들이 드러나고 모든 육체적 소욕이 한꺼번에 태워지는 것입니다.

 

이 깊은 교제를 위해 성령께서 우리에게 선물을, 은사를 주시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2:1~13에 나오는 방언입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성령이 임할 때 다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방언이라는 것은 우리말이 아닌 다른 나라의 말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말이 아닌 천사의 말을 하는 것을 방언이라고 말합니다. 성령이 임할 때 체험하게 되는 방언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갖도록 하는 중요한 수단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때 말로다 할 수 없는 심정이 되면 정말로 말로 표현할 수 없게 됩니다. 구약의 엘리 제사장 때에 한나는 마음이 괴로워서 야훼께 기도하고 통곡할 때에 말을 못하고 입술만 덜썩 거렸습니다. 이에 엘리 제사장이 한나여 언제까지 술이 취해 있겠느냐?” 라고 묻자 한나가 대답하기를 여종은 술이 취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마음이 답답하고 또 이 원통함을 말로 표현할 수 없어서 그렇습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무엘상 115절에 한나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야훼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에 너무 간절하고 한이 서리면 사람의 말로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럴 때 방언으로 말하면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 속을 시원하게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드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26절 다시 함께 읽겠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이 말씀은 참으로 맞고 진실이며,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성령께서 얼마나 우리를 깊이 도우시는지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저 돕기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까? 이어서 27절 함께 읽겠습니다.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는 분입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는 현재형으로 쓰였습니다. 이 동사의 기본의미는 조사하다,’‘검사하다’,‘자세히 살피다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성령의 생각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조사는 정확하고 완전하시므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마음속 깊이 숨겨진 것이라도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서 늘 간구하시는 성령님의 생각에 대해서도 무엇이든지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과 하나님께서는 함께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 우리에게 가장 완벽한 것을 위하여 일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솔직해져야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이루고 싶은 것을 위해 아무 말이나 해서는 안 됩니다. 어차피 내 맘대로 할 것을 하나님 말씀 잘 듣겠다고 공수표를 마구 날려서도 안되겠습니다. 헛된 맹세, 위선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직업으로 평생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말은 하나님을 섬겼지만, 그 마음은 세상의 정치, 권력, 돈에 사로잡혀있었습니다. 사랑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말하지만 세상 그 누구보다 더 세속적이고 세상적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예수님은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3:25)라고 했습니다. 미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흑인이 백인들만 모이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려고 했는데 못 들어오게 해서 문 밖 계단에 앉아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 잠깐 잠이 들었는데 비몽사몽간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너는 왜 거기서 울고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제가 흑인이라고 이 교회에 못 들어가게 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너만 그 교회에 못 들어갔다고 슬퍼하지 말아라. 실은 나도 아직 이 교회에 못 들어가봤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불신자가 구원을 받는 일입니다. 성도를 향해서는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상한 분량에 이르는 삶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는 주께하듯 하고 종살이 하는 사람은 단 마음으로 주를 섬기듯이 하라고 했습니다.(4:8)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나 혼자 무엇을 하겠다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기도란 하나님의 뜻에 나를 맞추는 것입니다. 성령은 이것을 목적으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만이 열납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인도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내 뜻대로 안된다고 고통 가운데 사시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성령의 능력으로 사셔서 진정한 하늘의 축복을 누리시며 가장 행복하게 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우리가 힘들고 어렵고 쓰러지고 고통가운데에서 건져내 돕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우리가 주의 능력을 바라봅니다. 성령이여!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사 우리가 교만치 않고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하며 믿음으로 살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