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강해 26)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는 이유 (수요예배 20180718)
성경본문: 고린도전서 9:1~12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설교: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는 이유
필라델피아에 ‘존’이라는 13세의 소년이 있었습니다. 벽돌공장에서 노동하는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존’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교회로 들어가는 길이였습니다. 비가 조금만 내려도 진창길이 되어 몹시 불편했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대책을 안 세웠습니다. 자기 집 같으면 벌써 훌륭하게 벽돌이나 돌로 포장되었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어느 주일날, 존은 결심했습니다. 이미 존의 눈에는 벽돌로 포장된 길과 그리로 들어가는 많은 아이와 어른들이 보였던 것입니다. 존은 7센트의 임금 속에서 날마다 벽돌을 한 장씩 자기 공장에서 사서 깔기 시작했습니다. 이 길고 넓은 길을 존 혼자서 완성하려면 2년이 걸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적은 1개월 안에 일어났습니다. 이런 존의 모습을 보고 이기적이며 형식적이었던 신앙생활을 반성한 교인들은 길뿐이 아니라 낡은 교회당을 헐고 신축하기로 결의했던 것입니다.
이 소년의 이름이 존 워너메이커입니다. 미국의 백화점 왕이 되었고 미국과 전 세계에 YMCA 건물을 수없이 지어주었는데 서울 종로 2가에 있던 YMCA벽돌건물도 워너메이커의 기증이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일을 위해 자기 스스로를 희생하였더니 하나님께서 큰일을 행하셨습니다.
오늘 베드로와 비교하며 바울이 사도가 아니라고 의심하는 고린도 교회에 바울은 자신이 사도임을 설명합니다. 반대파에서 바울이 예수님 살아계실 때에 함께 생활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바울의 사도가 아니라고 하며 비난했는데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을 보았고 고린도에 복음을 전하고 사역한 결과 고린도 교회가 세워진 것이 증거라고 말합니다.
로마시민권이나 유대인으로서의 바리새인의 권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베드로처럼 가족과 함께 다니지 않고 스스로 일해서 선교를 하는 바울을 의심하는 것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자비량 선교 때문에 사도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자기나 동역자 바나바에게도 그런 권리는 당연히 가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데 이런 저런 변명과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일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행할 일도 거스르고 있습니다. 이런 일에 대해 사도 바울은 스스로 권리를 포기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합니다. 복음이 말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이 순간 주시는 말씀을 통해 주님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1~2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사도'란 '파견된 자'란 뜻으로, 특별한 사명을 받아 보냄을 받은 자를 뜻합니다. (요 13:16) 예수님 당시에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복음을 전하는 권세를 위임받은 자라야 했습니다. (눅 6:13)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고 난 후에 살아계신 예수를 보고 부활을 경험했으며 이 사실을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을 사도로 불렀습니다. (고전 9:1) 그래서 이런 경험을 가지고 복음을 전파하고 성경 말씀을 증거하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고, 교회를 세울 뿐 아니라 병 고침이나 귀신을 내쫓는 이적을 행하였습니다. 또한 방언을 하는 것(고전 14:8)이 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바울은 사도직을 교회의 제일가는 것으로 성경 여러 군데에서 말하고 있고( 고전 12:28, 엡 4:11) 이런 사명은 지금까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면 모두가 감당해야 합니다.
바울이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사명자의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아주 쉽고 간단합니다. 복음을 맡은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성실하고 충성스러운 마음 이외의 다른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도의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외의 나머지 것들은 다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고, 축복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그 어떤 자격이나 그 어떤 조건도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혼을 주께 인도하고자 하는 열정만 있으면 됩니다.
전당포 주인이었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새로운 생활을 하게 된 사람이 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신앙생활을 하게 된 후 주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하루는 술에 취한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라고 전도했습니다. 그때 술 취한 사람이 빈정거리며 말했습니다.
"여보슈, 내가 정말 지옥과 천당이 있다는 걸 확신한다면 당신처럼 이렇게 소신 없게 전하지는 않겠소, 나는 더 열정적으로 전할 거요."
이 말에 충격을 받은 그 사람은 그 때부터 열정적으로 전도하고 구제 활동을 펼쳤습니다. 그가 1878년 구세군을 창설한 윌리엄 부스입니다.
이렇게 잃어버린 영혼들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주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는 이 사명을 사도 바울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10~12절입니다.
10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11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12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당시 헬라 문화권에서 철학자들은 사람들을 가르치며서 생계의 수단으로 대부분 학생들로부터 받는 수업료 혹은 감사의 사례를 받았고, 혹은 독지가의 후원을 통해 생활을 했습니다. 그럴 형편이 되지 못하는 선생은 몸으로 노동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육체노동으로 생계를 해결하는 교사는 능력없는 교사의 표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자비량 선교사였다는 점은 그를 능력없는 전도자로 보이게 했습니다. 더욱이 그를 ‘사도’로 보기에는 더욱 어려운 상황을 갖게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전혀 후원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에게 참 좋은 후원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교회로부터는 전혀 후원을 받지 않았고, 또 의도적으로 받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고린도교회의 특별한 상황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울의 의도와 관계없이 이 일로 바울은 더 급이 낮은 전도자로 취급되는 고통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서의 특권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먹고 마시는 권리, 일을 아니하고 교회의 후원을 통해 생활할 수 있는 특권 등입니다. 군인과 농부와 목동의 비유를 통해 다시 강조하고, 율법의 말씀을 통해 사도의 권리를 누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이런 것을 다 포기 한다고 말합니까? 왜 그럽니까?
12절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정당한 권리보다 예수님의 복음전파가 절대적으로 중요했기 때문에 배고프고 힘들어도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자기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남을 위해 자기의 자유를 제한하고 권리를 포기하는 것은 아름답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선한 목자와 삯꾼 목자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0;5) 삯꾼 목자는 편안하고 재미있을 때에는 목자 노릇을 하지만 제 목숨을 너무 아끼어 이리가 공격해 오거나 고난이 있고 위험한 일이 닥칠 때에는 양을 버리고 도망갑니다. 주인이 맡긴 양들에 대해 아무런 희생을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진짜 주인의 종이 아닙니다.
얼마전에 기독교은행 설립 출자금 명목으로 목사, 신도 등에게서 수십억원을 받아 가로채어 사기 혐의로 구속된 목사의 기사를 읽었습니다. 이 강목사는 신도들에게 작년 8월부터 올 초까지 기독교를 위한 은행을 설립한다며 주식 매매대금 명목으로 23억8천여만원을 받아 가로채었습니다. 피라미드식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여 주식을 판매하고 그 대금을 은행을 세운 것이 아니라 서로 나눠 가진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다시 말하면 고리대금 돈 놀이를 한 것입니다. 이들은 투자금을 끌어내기 위해 "이미 1조 5천억원의 자금을 확보해 둔 상태이며, 매장량 1조원 규모의 규석광산과 납골당을 보유하고 있다"고 거짓 홍보까지 했습니다. 방글라데시의 그라민은행처럼 소외계층을 돕고 미자립 교회나 원로목사를 지원하며 은행설립 후에는 출자자를 우선해 저리 대출을 해주겠다고 속여 200여원의 사기를 저질렀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주신 목사라는 지위를 통해 복음 전도의 사명을 이루기 보다는 그 지위를 이용해 자기 사리사욕을 채운 자들은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피해를 입은 성도들은 아마 다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기 무서울 것입니다. 하나님께 다시 가기 힘들 것입니다. 복음 전도하기도 회의가 들 것입니다. 한 목사의 일탈로, 사리사욕을 채운 일로 많은 영혼들이 상처를 입었습니다. 어떻게 구한 영혼들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피흘려 이루신 영혼들입니다. 이런 인간적인 넘어짐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커다란 장애가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 사도 바울이 스스로의 권리를 포기하고 배고프고 힘든 길을 걸어가는 모습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는 우스워보이고, 바울의 사도성까지 의심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런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보시고 크게 들어 쓰시며 전 세계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의 사역이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본받아야겠습니다. 믿음 외에는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외에는 없습니다. 이 믿음을 본받아 주님의 놀라운 은혜 안에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내어주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그 희생의 사랑을 기억하고 또 기억합니다. 아낌없이 주신 은혜에 아낌없이 충성으로 나아가고자 하오니, 우리를 날마다 주의 말씀대로 살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