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강해 9) 빛나는 영광 (수요예배 20190626 )
성경본문: 고린도후서 3: 12~18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설교: 빛나는 영광
이란 북부에서 농사를 지으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수도승 한 사람이 찾아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이렇게 농사를 짓고 밥만 먹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겠나? 이 세상에는 다이아몬드라는 것이 있다네. 이 다이아몬드를 캐내기만 하면 큰 부자가 될 수 있을 걸세."
이 말을 들은 농부는 그때부터 다이아몬드에 대한 탐욕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 농부는 농사짓는 일이 제 분수인 줄도 모르고 다이아몬드를 찾겠다고 집과 전토를 다 팔고 가족들은 친구에게 부탁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이 농부는 일확천금의 탐욕을 갖고 유럽을 다 돌아다녔습니다. 결국 이 농부는 노자를 다 써버리고 초췌한 모습으로 이탈리아의 나폴리 항까지 왔습니다. 그는 지친 몸으로 절망에 몸부림치다가 넘실대는 파도에 몸을 던져 자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얼마간의 세월이 지나 그 농부의 땅을 산 사람이 어느 날 들에 나갔다가 반짝 반짝 빛나는 검은 돌을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이 돌을 주워 자기 집 장식품으로 진열해 두었습니다. 몇 년 후 그 수도승이 또 다시 옛 농부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집에 들어선 그 수도승은 이 돌을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다이아몬드 원광석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원광석은 잘 다듬어져 러시아 황제의 왕관에 박힌 다이아몬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아주 큰 다이아몬드 광산이 바로 죽은 그 농부의 집터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행복의 다이아몬드 광산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자신의 믿음의 자리, 하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수건을 쓴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에서도 제대로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율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던 자들이 이제는 그리스도의 법에서 자유로워져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있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빛나는 영광 가운데 사는 법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12~14절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습관이나 방식에서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대부분 자신의 습관이나 태도에 갇혀 살아갑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셨음에도 율법의 그림자에 집착했습니다. 자신들의 영적 무지에 갇힌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들에게 이러한 영적 무지에서 벗어나기를 권합니다.
사실 우리도 예수님을 알고 구원도 받았다면서 예전에 자신들이 습관을 버리지 못합니다. 어떤 목사님께서 어느 지방에 집회를 인도하려고 갔었는데 중풍으로 쓰러진 어느 집사님께서 만나자고 해서 심방을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집사님은 40대의 아주 잘생긴 미남이었습니다. 중풍으로 누워있는 이 집사님이 목사님의 손을 붙잡고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죄를 고백하는데 엄청 놀랐습니다.
"저는 예수 믿고 집사까지 되었는데도 교회는 형식으로 다녔고전에 했던 습관대로 몰래 술도 마시고 바람도 피며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중풍으로 쓰러지기 전에 여자데리고 술마시고 친구들이랑 놀다가 돌아와서 대낮에 선풍기를 틀어놓고 자가다 이렇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고 집사가 되고도 예전의 자신의 나쁜 습관을 버리지 못해 젊은 나이에 아주 큰일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식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법대로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참 소망’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 참 소망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언약’을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정죄하고 죄를 깨닫게 하지만 사람을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복음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구원을 줍니다. 이것은 영생에 이르는 참된 소망입니다. 바울은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면서 율법은 구원의 소망이 될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원한 구원의 소망이 되신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야 우리들의 영적 무지가 벗어집니다.
13, 14절에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했습니다.
율법의 영광으로 율법을 수여받은 모세의 얼굴에도 광채가 났습니다. 하지만 율법의 광채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만 가능합니다. 율법의 마침이요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그림자에 불과한 율법으로 나타나는 영광에 집착했습니다. 모세가 율법의 사라질 영광에 주목하지 말라고 그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는데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 의미를 아직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참된 영광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고집만 세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마음은 여전히 영적 무지의 수건으로 덮여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에 잠입한 유대주의자들도 동일한 수건으로 눈이 가려진 자들입니다. 이제 율법으로 가려진 수건은 제거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십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이 밝게 빛날 때 율법의 그림자는 뒤로 물러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자유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15~18절입니다.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는 유대인들은 이 모세의 글을 읽으며 '오실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 모세의 글들과 함께 구약에 써 있는 메시야에 대한 글들이 참으로 여러 가지였습니다. 어떤 성경에서는 십자가에서 처참히 고난당하시는 메시야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어떤 성경에서는 영광의 왕, 심판주로 오시는 강력한 메시야의 모습이 동시에 그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수건에 덮여져 있었던 구약에 계시된 메시야는 다시 사신 예수그리스도로 확실하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수건이 벗어지고 베일에 싸여 있었던 모든 것들이 실체로서 드러나고 입증되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약에 섞여 있었던 여러 모습의 메시야로서 주님이 뚜렷하게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수건으로 눈이 가려진 것처럼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영광을 보지 못합니다.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자들은 즉시 믿음으로 그 무지의 수건이 벗겨질 것이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무지의 수건은 벗겨집니다.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면 율법의 사라질 영광에 빠져 영적 혼돈을 느끼고 방황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시는 분입니다. 죄와 사망의 올무에 매여 마귀의 종노릇에서 해방시켜 주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사람을 죄에서 영원히 자유하게 합니다. 율법에는 참자유가 없습니다. 복음을 깨달은 자는 가려진 것이 없기에 찬란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제대로 보고 있습니까? 이야기 하나를 통해 우리의 지금을 함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옛날 임금이 타는 당나귀가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임금이 당나귀를 타고 나라를 한 바퀴 순찰하면 온 국민들이 나와서 왕에게 환호하고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임금을 등에 태운 나귀는 왕을 태운 역할에 걸맞게 온갖 아름다운 장식을 해서 멋지게 보였습니다. 국민들은 왕과 함께 그 나귀를 향해서도 갈채와 찬사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갈채와 환호에 고무된 나귀는 어느날 왕을 땅에다 내동댕이쳤습니다. 왜냐하면 국민들의 갈채와 환호를 혼자서 다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나귀는 왕이 없으면 그 모든 환호와 갈채를 자신이 모두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나귀가 왕을 땅에다 내동댕이치는 순간, 나귀에게는 나귀를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당연히 나귀는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이렇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때문에 영광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버리면 모든 것으로부터 멀어집니다. 바울 시대의 유대인들도 그림자에 불과한 율법을 여전히 자신들의 소망이요 구원자로 삼고 살았습니다. 영안이 영적 무지로 닫힌 것입니다. 우리의 참된 소망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임을 기억하시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집중해야 그 영광 안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시간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빛나는 영광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늘 하나님께 나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감사합니다. 저로 하여금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부활의 증거를 주시고, 이 부활을 근거로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영접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매일 살아가는 삶 속에서도 율법과 같이 가리운 영광의 믿음이 아닌 구체적이고 실체가 된 믿음으로 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진실로 우리 안에 함께 계심으로 성령하나님의 충만하신 능력 가운데 살아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빛나는 영광을 바라보며 주님을 경배하게 하소소서! 이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