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선교교회/한국어예배

고린도후서강해 11) 질그릇에 담긴 보배 (수요예배 20190710)

온누리선교 2019. 7. 9. 13:40


 

성경본문: 고린도후서 4:7~12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려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설교: 질그릇에 담긴 보배

 

오늘 사도 바울이 우리의 신앙에 대해 아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질그릇에 비유해서 말입니다. 왜 하필이면 질그릇을 우리에 비유하여 하늘의 지혜를 알려주고 있을까요?

 

진흙을 가지고 빚어 그릇을 만드는 도공의 작업실에서 하루는 진흙덩이가 이렇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도공의 손에서 최고의 작품이 되어, 왕궁의 식탁이나 부잣집 장식장에 올라가고 싶다! 이런 꿈을 꾸었습니다.

드디어 이 진흙덩이를 도공은 반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진흙은 부푼 꿈을 안고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기뻐하였습니다.

부푼 가슴으로 기대하고 있는데, 좀 이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토기장이가 자기를 빚는 모습은 예전과는 달랐습니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주둥이며, 유난히도 넓은 손잡이며...자기를 지켜보는 다른 흙들의 웃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진흙은 너무나 속이 상하여 눈물이 날것 같았습니다.

자기를 이렇게 흉측한 모습으로 지은 도공이 밉고 또 미웠습니다. 진흙은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정말로 절망스러웠습니다. 토기장이가 날 왜 이런 모습으로 지었는지?...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토기장이는 가마에서 나오자마자 자기를 품에 않고 어디론가 갔습니다. 그가 도착한 곳은 어느 가난한 농부의 집이었습니다.

아무리 나를 이런 가난한 농부에게 팔려고 해도 나를 이런 모습으로 짓다

... 자기를 이렇게 만든 토기장이를 미워하였습니다.

차라리 바닥에 떨어져 깨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밖으로 나오는 농부의 모습을 보는 순간, 질그릇은 너무나 놀랐습니다.

그 농부는 농사일을 하다가 두 손이 잘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평범하게 생긴 그릇을 사용할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토기장이는 이 농부를 위해 특별히 만든 그릇이었습니다.

자기를 붙잡고 눈물을 글썽이는 농부에게 토기장이는 말했습니다.

"고마운 것은 나요, 내가 질그릇을 만들면서 이렇게 기뻤던 일은 처음이요, 이 그릇은 나의 최고의 작품이요" 라고...

비로소 질그릇은 토기장이가 만든 최고의 작품이 자기라는 것을 알고 그제야 토기장이에게 감사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느끼십니까? 우리의 꿈이 바로 하나님의 꿈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꿈이 이루어지면 바로 그것이 우리에게 축복이라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주신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을 뒤돌아보시고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가시는 축복의 사람 되시기를 바랍니다.

7절의 말씀입니다.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보배는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질그릇은 우리 그리스도인을 뜻합니다. 그런데 보면, 참 표현이 흥미롭습니다. 바울은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딤후 2:20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라고 나와있는 거 보면, 바울이 살던 시대 때에 질그릇은 아주 펀하게 쓰는 그릇이었습니다.

싸고 값싼 별거아닌 질그릇에 귀하디 귀한 보배라...

귀한 것은 귀한 것에 담습니다. 음식을 열심히 준비해서 아무 그릇에나 담아내지 않습니다. 비싼 선물을 사서 검은 봉지에 담아 주지 않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질그릇에 담겨 있어야 할 것은 특별하지 않은 것입니다. 귀하지 않은 것입니다. 귀한 것이 질그릇에 담겨 있다면, 만약 그 상태로 사람들에게 보여진다면 우리는 그 보물의 가치도 떨어진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내용물에 맞게 포장이 되어야 하고, 심지어 포장이 더 잘 되어야 내용물의 가치도 올라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선물세트들을 보면 포장에 그렇게 공을 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상식은 질그릇에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특별하지 않은 것이 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질그릇에 보배가 담겨있습니다.

무슨 이유일까요? 우선 바울의 당시 상황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12제자 중 하나는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서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문제 삼기도 했습니다. 더구나 바울은 그전에는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스스로를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표현하기도 했고,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또 구원을 받은 후 바울 스스로도 말하길 육신의 연약함으로 죄에 넘어지고 좌절하기도 했습니다.

바울을 깎아 내리려는 자들은 이런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렇게 바울을 비난하고 공격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변명하지 않고 오히려 그 모든 것을 인정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질그릇임을 인정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질그릇에 보물을 담을 수 없으니 바울에게는 참된 보물이 없다고 공격을 했습니다.

그럼 바울은 왜 이런 공격에 자신은 질그릇이 아니라고 반박하지 않고 오히려 질그릇임을 인정했을까요?

8~10절입니다.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려 하려 함이라

 

질그릇이 만들어질 때 어떻게 만들어질까요?

먼저 질그릇의 시작은 진흙을 먼저 고르는 데서 시작됩니다. 토기장이가 좋은 그릇을 만들기 위해 질그릇의 재료가 되는 좋은 흙을 흙더미에서 골라내듯이 하나님께서도 천국백성을 빚으시기 위해 우리를 세상이라는 분토 속에서 선택하시고 골라내시는 과정이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 과정은 골라온 진흙을 말린 후 다시 채로 쳐서 작은 돌멩이들을 걸러내는 과정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신앙의 길로 인도하실 때에 우리를 말씀의 볕에 비추어 말리시기도 하고 또한 돌멩이 같고 고르지 못한 심성들을 말씀의 채로 쳐서 걸러내는 선별작업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후에 토기장이는 곱게 만든 진흙을 다시 물에 개어 반죽을 한 후 쓰임에 맞는 모양으로 빚어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신앙의 길위에 선 성도들을 은혜의 눈물로 반죽하시며 각자의 달란트와 소명을 따라 천국백성의 그릇 모양으로 빚어가시는 과정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최종적으로 불에 구워지는 과정입니다.

질그릇이 되는 최종 과정은 불가마 속에서 뜨거운 열을 견디는 것입니다. 질그릇이 물같은 액체를 담을 수 있는 정도로 투습성이 적어지려면 뜨거운 불에 구워져 흙의 성분들이 유리질화 되어야 합니다. 도자기(ceramics)의 세계에서는 어떤 재료로 만드냐도 중요하지만 어느 정도의 온도에서 얼마나 구워지느냐가 도자기(陶瓷器)의 도기(또는 토기;earthenware)와 자기(또는 사기;porcelain)를 나누는 기준이 된다고 합니다. 물론 당시 고대 이스라엘 같은 중근동 문화권에서는 당시 토기만을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이와 같이 토기장이가 불가마를 통해 질그릇을 더욱 단단하면서도 물도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 만들어 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성령의 불가마, 시련의 불가마를 통해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마음과 하나님의 눈물을 담아낼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워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담길 우리도 바로 질그릇과 같습니다. 질그릇이 만들어지는 온갖 우겨쌈과 답답한 일과 핍박과 거꾸러뜨림이 있을지라도 낙심하지도 버린바되지도 망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보배를 담을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가 질그릇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질그릇이라는 것은 깨어지기 쉬운 자라는 것입니다. 약한 자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놀라운 비밀이 담겨있습니다. 일반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금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힘으로 모든 것을 다 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결코 성령의 역사가 없습니다. 자기가 질그릇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성령이 역사할 수가 없습니다. 깨어져야 주님 앞에 자신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깨어져야 성령이 역사할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다음의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11~12절입니다.

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사망이 우리 안에서 나타난다는 것은 우리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질그릇처럼 날마다 깨어지면 생명이 너희 안에서 다른 영혼들을 위하여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에 성령께서 우리의 몸을 통제하시고 컨트롤할 수 있도록 육이 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영이 우리를 지배할 수 있도록 성령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리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로우신 주님

우리의 토기장이 되시고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가 순종합니다. 주님의 뜻대로 우리가 살아가게 하시고 주님의 계획 안에서 늘 따라가며 주님의 은혜 가운데 쓰임받길 원합니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주님을 향하게 하시고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게 하여 주옵소서! 이 모든 말씀 주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