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강해 14) 주님을 위하여 사는 자 (수요예배 20190731)
성경본문: 고린도후서 5:11~15
11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앎으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
12.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로 말미암아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대답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13.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14.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설교: 주님을 위하여 사는 자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는 말씀이 옳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우리는, 저와 여러분들은,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과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될 가능성과 희망이 전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복음 중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다 사함 받게 되었습니다. 주홍 같이 붉은 죄가, 진홍 같이 붉은 죄가 흰 눈 같이, 양털 같이 희게 되었습니다.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옮기어 졌습니다. 하나님조차 기억치 못하시게 되었습니다.
시험을 보다가 답을 잘못 적으면 선생이 다시 해 시험지를 주시듯, 그림을 그리다가 망친 학생에게 선생님이 다시 새 도화지를 주시듯, 죄로 말미암아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망친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다시 새 도화지를 주시며 다시 시작하라 하십니다. 내가 너의 모든 죄와 허물을 다 씻어 주고 사하여 주었으니, 그리고 시간도 다시 충분히 줄 터이니 용기를 내어 다시 아름답고 근사한 인생을 시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인생의 기회를 주시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아 그 값을 치루셨습니다. 그것이 우리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고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지 함께 말씀을 보며 주님의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11~12절 말씀입니다.
11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앎으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
12.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로 말미암아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대답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11절에 "주의 두려우심을 앎으로"라고 했습니다. 주의 두려우심을 안다고 합니다. 이 두려움이 바로~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주의 두려우심"을 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무엇을 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살았습니까? 우리가 마침내는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단 한번이라도 생각하셨습니까? 주의 두려움을 알지 못하면 주님의 용서도 사랑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주 예수께 받은 복음이 얼마나 바른 복음인지를 알려주고자 합니다.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로 고린도교회 교인들 앞에 서기를 원하는 것이 보입니다.
교회사에 내려오는 사도요한의 말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에베소에서 사역의 마지막을 보냈는데, 그가 너무 연로하여 걸을 수가 없어서 들것에 실려 교회에 가서 말씀을 전하곤 했는데,
그의 메시지는 늘 “사랑하는 형제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다시 말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였다고 합니다.
한번은 성도들이 요한에게 “선생님 다른 말씀은 없습니까?” 하니
“이것은 주의 명령인데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느니라” 라고 했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명령 안에서 주님의 복음 전하는 자로 사는 것이 바로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3~15절의 말씀입니다.
13.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14.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어떤 정신 병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사람이 큰 소리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를 믿으라! 나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외쳤습니다. 이층에서 그 광경을 내려다보던 어떤 사람이 “야! 이놈아 조용히 해라! 오래 살다보니 별 미친놈 다 보겠네, 나는 너 같은 아들을 둔 적이 없다. 내가 하나님이다!” 하고 호통을 치니 조용해졌습니다.
모두들 미친 듯이 살아갑니다. 재물에 미치고 권력에 미쳤습니다. 어떤 남자는 술에 미치고 어떤 여자는 치장에 미쳤습니다. 미치려면 제대로 미쳐야 합니다. 미쳐야 할 것에 미치는 것입니다. 잡기에 미치면 안됩니다. 학생은 공부에 미쳐야 합니다. 목회자는 목야에 미쳐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미쳐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정체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 미치는 것이 정상입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13절) 라 했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재판정에서 미쳤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베스도가 큰 소리로 바울아 네가 미쳤구나”라고 하니 바울이 대답합니다. “베스도 총독님, 나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나는 맑은 정신으로 참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그립바 임금님 예언자들을 믿으십니까? 라고 하자 네가 적은 말로 나를 설복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가? 바울이 대답하기를 말이 짧거나 길거나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 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행26:24-29절).
바울을 보고 미쳤다고 하지만 미친 사람은 바울이 아닙니다.
복음 전하는 사람이 미친 사람이 아니라 전도하지 못하는 것이 부족한 그리스도인 무능한 교회입니다. 교회가 제 정신이면 전도하는 것이 맞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면서도 열심히 전도하는 사람을 이상하게 본다면 그 사람이 이상한 사람입니다.
어떤 노인이 동네에 와서 무어라고 하면서 다닙니다. 보아하니 미친 사람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르키며 횡설수설합니다. 수상한 사람으로 신고가 들어와 경찰이 뒷조사를 했습니다. 그의 정체가 밝혀졌는데 그는 천주교 신부였습니다. 전에 그 동네에 성당이 있었고 그 성당의 주임 신부였는데 공산당이 들어와 교회를 불살라 버렸고 믿는 자는 모두 흩어졌었습니다.
종교탄압으로 전도 할 수 없게 되자 미친 사람으로 가장하여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 신부님은 총살을 당했습니다. 복음이 뭐길래 그렇게까지 하면서 전도했을까? 그는 하나님께 미친 자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럼 왜 이 신부님이 이렇게 했을까요?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셨기” (14절)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복음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부자가 되고, 예수를 믿으면 어떤 병에 걸렸든지 다 낫고, 기도를 통하여 자기의 소원을 이루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축복입니다.
우리가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도 우리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 때문입니다. 우리가 훌륭해서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훌륭하지 못해서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이 못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고 우리의 허물을 가리워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가게 하시고 새것이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이 은혜와 축복을 알게 되면 다른 축복에는 별로 관심이 없게 됩니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이 하나입니다. 나 중심적인 삶을 살 때는 사는 것이 좋고 죽는 것은 싫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알아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게 되면 사는 것도 주를 위하여 죽은 것도 주를 위하여가 됩니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이 매 일반입니다. 가난과 부함도 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얼마든지 가난해 질 수 있습니다. 부자가 된다고 하여도 부자의 의미는 부에 대한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주를 위하여 더 많이 쓸 수 있음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주를 위하여 죽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바울의 그와 같은 마음을 오늘 본문 15절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사는 자가 얼마나 복된 참 그리스도인인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있는 자, 오직 하나님을 향해 달려가는 자, 그런 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
우리가 주님의 놀라우신 사랑으로 하나님의 복된 백성이 되게해주시고 주님만 바라보고 나아갈 수 있도록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연약하고 세상의 유혹으로 주님께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면 오직 주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주님의 구원에 다다르도록 말씀에 순종하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