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감동하신 믿음 (눅 7:6~10 주일예배 20190811)
성경본문: 누가복음 7:6~10
6.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7.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8.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9.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10.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나아 있었더라
설교 : 예수님이 감동하신 믿음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감동하신 이야기입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랑하던 유대인이 아닙니다. 바로 이방인, 그것도 유대인의 적이라고 한 로마군인 백부장이 예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무엇으로 말입니까? 백부장의 믿음으로 말입니다.
도대체 믿음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감동시켰을까요?
의학박사 허버트 벤슨이라는 사람이 ‘믿음’이라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두통을 없애준다. 협심증을 제거한다. 특히 적극적인 믿음은 80%의 협심증 환자를 고칠 수 있다. 창조력을 증진시킨다. 불면증이 사라진다. 중풍을 예방한다. 혈압을 감소시켜 고혈압 치료에 도움을 준다. 암의 치료에 유익하다. 공포로 인한 충격을 조절해 준다. 콜레스테롤의 함량을 낮춘다. 근심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증세인 설사, 구토, 변비, 불안, 울화병,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증세 등을 제거해 준다.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마음의 평안과 감정의 균형을 가져다 준다.“
그리고 덧붙여서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나는 결코 종교나 철학적인 것에 관심을 지닌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고찰한 바에 의하면 '믿음'이라는 현상이 위에서 열거한 것과 같은 의학적인 효능이 있음을 밝혀내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자신은 철저히 과학에 근거하여 병을 치료하는 사람이라 초자연적인 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보이지 않는 것이고 세상 사람들이 ‘종교’적이라 하지만 분명한 것은 ‘믿음’ 때문에 많은 병들이 낫는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감동적인 것,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행동으로 나오기 힘듭니다. 야고보서 2:17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하였습니다. 믿지 않으면 아무 것도 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알면서도 믿음을 갖지를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아들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고 순종하지 못한다는데 있습니다. 사람도 어떤 이가 믿어주면 최선을 다해서 그 믿음에 보답하려 합니다. 하물며 온 세상 능력을 다 가지신 예수님께선 어쩌시겠습니까?
오늘 말씀에 예수님께서 그 믿음을 보시고 놀라신 백부장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믿음에 대해 한 마디로 이렇게 이야기 하십니다.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셨습니다. 도대체 어떤 믿음이길래 예수님께서 “이만한”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감동하셨을까요?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이길래 예수님께서 감동하셨는지 알아보고 또 우리가 그 믿음의 분량대로 사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첫째로, 도대체 이 백부장은 어떠한 사람인지 보도록하겠습니다.
6~8절 말씀입니다.
6.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7.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8.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당시 로마시대의 백부장은 백 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있는 군대지휘자, 오늘로 보면, 중대장정도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이름도 나타나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보면, 로마인이요, 이방인인데 유대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장의 2절 이하에 보면, 유대 장로들이 예수님께 와서, 간곡히 탄원하길, “그는 선생님에게서 은혜를 받을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우리에게 회당을 지어주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로마의 백부장이 유대인을 위한 회당을 지어주었다는 것은 보통 큰 사랑을 보여준 것이 아닙니다. 용기도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 백부장은 일반적인 정복자의 모습으로 가버나움에 있지 않았습니다. 피정복민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어려운 고충들을 듣고 해결해 주려고 노력했던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의 말에 귀 기울여 주고 자신의 통치 아래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을 무시하지 않고 귀하게 여겨주는 백부장이야 말로 인품이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믿음도 성격대로 간다는 말들을 합니다. 백부장의 믿음도 바로 이러한 성품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렇게 세상 적으로 무시할 수 있고 하찮게 여길 수도 있는 유대인들을 인간적으로 귀하게 여길 수 있는 사람은 그 당시 흔치 않았습니다. 그럴 이유가 없었습니다. 힘이 약한 유대는 힘이 강한 로마제국에게 나라를 빼앗겼고, 그 대가를 치루는게 당연했습니다. 빼앗기고, 무시당하고, 억울해도 말 못하고,... 당시에 이 모든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백부장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지금 예수님께 유대인의 장로들을 누구 때문에 보냅니까? 정 때문입니다. 종하나 병들어서 보냅니다.
종은 그 당시 노예입니다. 사고 파는 노예입니다. 사고 팔 수 있으면 재산이요, 물건입니다. 우리는 물건이 고장 나면 어떻게 합니까? 고쳐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돈이 너무 많이 들고 신경 쓰면 어떻게 합니까?
예전에 노트북하나를 굉장히 오래 쓴 적이 있습니다. 삼성AS센터에 여러번 가서 윈도우도 몇 번씩 깔고 해서 돈 좀 들었습니다. 나중엔 하다하다 안되니까, 고치는 기사분이, ‘이번에 보고 안되면 하나 구입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시 버리고 구입하면 됩니다. 물건이란 그렇습니다.
이 백부장의 종도 당시에는 그런 취급을 받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이 종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살리려 했습니다. 마치 자신의 가족처럼, 소중한 인간 대우를 해준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장로들을 예수님께 보내기 전에 갖은 방법으로 이 종을 고치고자 노력했을 것입니다. 좋은 약을 먹였을 것이고, 의사도 불러 종을 치료하게 했을 것입니다. 이도저도 안되니,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예수 라는 사람이 가버나움으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까지 보냅니다. 가버나움의 백부장은 병들어 죽어가던 종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 종을 고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그 믿음은 진짜 믿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 백부장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는 것을 분명히 보였습니다.
첫째로, 그의 믿음은 예수님의 권위를 확실히 인정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얼마나 높게 보셨는가 하면 그의 최고의 상관보다도 더 높이 보았습니다. 그런 믿음이 6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주님, 더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내 집에 모셔들일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세례 요한도 예수님을 만났을 때 비슷한 고백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에게 혹시 그리스도가 아니냐고 물었을 때에, 분명히 아니라고 대답하면서, ‘그분은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자기는 그의 신발끈을 풀 만한 자격도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 죄 사함 받고 의롭다 인정을 받습니다.
둘째로, 이 가버나움의 백부장의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를 철저하게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곧 능력과 생명의 말씀으로 믿었습니다. 병자에게 가지 않아도 멀리서 말씀만 해도 고쳐질 것으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7절에 보면, “그저 말씀만 하셔서, 내 종을 낫게 해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
이 백부장이 말씀의 권위를 잘 이해하게 된 것은 그의 군인으로서의 경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군인들은 명령이 살고 명령에 죽는, 상명하복의 문화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상관의 명령은 곧 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경험으로 볼 때, 만 왕의 왕이시며 만유 주의 주이신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가 얼마나 클지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실 필요 없이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을 보인 백부장 때문에 예수님은 크게 감동하십니다.
9~10절입니다.
9.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10.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나아 있었더라
여기까지도 예수님 앞에 백부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백부장이 보낸 유대 장로들, 그리고 그의 친구들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통해 보인 백부장의 모습은 훌륭한 인품의 사람이요, 커다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다 더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을 놀라게 한 믿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9절에 보면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만한 믿음’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메시야로 인정하고 그 권위를 받든다는 것입니다. 진짜로 허투루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권위를 믿는 다는 것입니다. 복음서 전체를 보아도 이 이야기를 다룬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예수님께서 이런 표현을 딱 한번 이 백부장에게만 쓰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감동시킨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0절에 보면, 이미 그 종은 나아있었다고 나옵니다. 얼마나 감동받으셨으면, 바로 즉시 고쳐주셨겠습니까? 얼굴한번 보지 않았던 백부장의 정성에 이렇게 빨리도 반응하셨던 것입니다. 얼굴보는 것이 중요하지도 애걸하는 것이 중요하지도 않고 주 예수님은 자신의 권위를 정확히 알고 인정하고 순종하는 그 모습에 감동받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말씀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것을 곧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합니다. 그 믿음을 세상에서 지키고 산다는 것이 어렵다고~ 이런 분들에게 마지막으로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며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어떤 군목이 최전방에서 군목생활을 하면서 짬짬이 벌통을 쳐서 꿀을 땄습니다. 아주 좋은 꿀을 따서 부대에 있는 모든 군인들에게 광고를 하여 누구든지 빈그릇을 가지고 와서 꿀을 타가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군인은 박카스병을 가지고 와서 꿀을 받아갔고, 어떤 군인은 링겔 병을 가지고 왔고 어떤 이는 스페아 깡통을 가지고 왔습니다. 군목은 군인들이 가져온 모든 빈병에 꿀을 가득히 넣어주었습니다. 박카스병은 박카스병만큼 링겔 병은 링겔병 만큼 스페아통은 스페아 통만큼 꿀을 부어주었습니다. 그 후 군인들이 항의를 했습니다. 공평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랬더니 군목이 대답하기를 "누가 박카스병을 가지고 오라고 했소? 나는 빈그릇을 가져오라고 했고 그 빈그릇대로 채워줬을 뿐이요"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얼마큼입니까? 예수님에게 나아갈 때 예수님을 감동시킬만한 믿음을 백부장처럼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도 예수님을 감동시키는 이 믿음을 갖게 되길 원합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믿고 순종하여 우리의 믿음의 그릇을 가득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있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의 믿음을 항상 보시는 줄 압니다. ‘너희의 믿음을 보이라’ 하시는 주님! 우리의 약하고 늘 세상에 눌리는 믿음을 용서하여 주시고, 오늘 말씀에서 보여주신 백부장의 믿음을 본받아 늘 주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권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에서 우리가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주 안에서 승리하며 살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 받들어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