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강해 14)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 (수요예배 20200527)
성경: 갈라디아서 4:21~31
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5.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노릇 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설교: 자유있는 여자의 자녀
자녀는 다른 남의 아이와는 다릅니다. 세상에 많은 아이가 있어도 내 자녀와는 다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세상의 자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자녀로 불러 주신 것에 대한 확신을 오늘 말씀으로 더 확실히 아시기 바랍니다.
21~26절 말씀입니다.
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5.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노릇 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아브라함의 두 아들은 하나는 계집종 하갈에게서 났고, 다른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 사라에게서 났습니다. 바울은 이를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을 따라 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이 여자들을 두 언약이라 하면서, 계집종인 하갈은 시내산과 지금 있는 예루살렘으로 종노릇을 뜻하고, 자유하는 여자인 사라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자유를 뜻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하갈과 사라 이야기를 현재 갈라디아 교회의 상황에서 재해석하면서 “하갈과 그의 종 됨”, 그리고 “사라와 그의 자유자 됨”을 강조합니다. 그리고서 이를 율법 아래에서의 종 됨,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함과 연결하게 합니다. 이처럼 “종노릇”은 율법 아래 있는 것이고 “자유함”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보면, 결국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쫓습니다. 그리고 사라와 이삭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이어가셨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맞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자녀된 것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를 비유이야기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눅 15장)
두 아들을 가진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자기 몫을 미리 달라고 합니다.
신명기 21:17절에 보면 장남은 재산 분배시 다른 형제들의 두 배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둘째 아들은 아버지 재산의 삼분의 일을 받았을 것입니다. 재산을 분배받는 것은 어디까지나 부친이 자식에게 주는 은총이요 선물이지 권리가 아닙니다. 그런 것도 모르고 , 당당히 아버지에게 재산을 달라 요구하고 집을 나가버린 이 아들은 허랑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재산을 탕진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흉년이 들어 살길이 막막해 졌습니다.
결국 그 아들은 돼지를 치는 이방인의 집에 붙여 살게 되었습니다. 즉 더부살이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마저 내주는 사람이 없어 굶어 죽을 지경이 된 것입니다.
이제 집을 나가 자기 맘대로 산 이 아들은 완전히 다 잃은 자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도 잃었습니다. 배고픔과 가난 때문에 자신의 자존심 마저도 잃어버렸습니다. 아버지의 축복 안에 살던 아들이 이제는 홀로 내버려져서 돼지보다 못한 인생을 사는 사람으로 신세가 바뀌어져 버렸습니다. 도대체 왜 이 아들은 이런 신세가 되었을까요?
둘째 아들은 아버지 곁을 떠나 자기 맘대로 자유롭게 살아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떠나 먼 나라로 가서 맘껏 자기 뜻대로 허랑방탕하던지 어쩐지 간에 살아서 나름 멋지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가서 종노릇이라도 하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날, 아버지는 멀리서 아들을 보고 달려갔습니다. 그때 아들은 아버지를 볼 수 없었으나 아버지는 아들을 봤습니다. 유대인의 탈무드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일보 전진하면 하나님께서는 백보 달려오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기를 매일 고대하면서 기다렸기에 비록 아들의 모습이 변했고, 상거가 멀었으나 즉시 알아보고 달려갔습니다. 아들은 서서히 걸어갔으나 아버지는 달려갔습니다. 이와같이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동작은 느리고 하나님은 매우 빠르십니다.
그리고 아들이 죄를 고백하기 전에 아버지는 아들의 죄를 먼저 용서해 주셨습니다.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 벌써 아들의 잘못을 용서한 것입니다.
집나가서 망해가지고 온 이 아들은 다시 둘째 아들로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수속도 필요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이렇듯 빠를 수가 없습니다. 물어볼 말도 없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이것 말고 다른 조건이 필요 없습니다. '아버지'라 불러주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용서합니다.
과연 종이라면 이렇게 아버지가 했을까요? 자기 아들이기에 이렇게 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7~31절의 말씀입니다.
27.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과거 육체를 따라 난 이스마엘이 성령을 따라 난 이삭을 핍박한 것과 같이 지금도 그러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경이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아 그가 유업을 얻지 못하도록 한 것을 상기시킵니다.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 하는 여자의 자녀라고 결론짓습니다.
당시 유대주의자들이 주장한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위에 율법적 행위를 더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몇몇 율법적 행위가 믿음을 대체하는 결과를 낫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이 가진 연약함이요 죄성입니다.
우리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로서 몇몇 율법적 행위가 아닌 참된 믿음을 실천하는 자로 서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되시는 하나님!
우리가 그동안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지 못했음을 이 시간 고백합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율법 아래에서 종 됨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자가 되게 하시고,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로서 참된 믿음을 실천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이 모든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