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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강해 22) 십자가의 길 (수요기도회 20200721)

온누리선교 2020. 7. 21. 13:48

 

성경: 갈라디아서 6:11~13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설교: 십자가의 길

 

에드워드 하이머씨는 유명한 조각가인 동시에 알프스 산의 등반가였습니다. 그는 언제나 마티호온이란 험한 정상을 오르지 못해 늘 야심에 차 있었습니다. 그는 몇 번이나 시도해보았지만 정상까지 오르는 데에는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한번 이태리 등반대들과 함께 그 산을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 등반대는 네 명의 등반가와 세 명의 안내자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예정대로 모든 것 이 잘되어 그들은 드디어 그 정상을 정복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특히 하이머 씨는 그 자신의 생애에 최고의 환희를 느꼈습니다. 이제 그들은 밧줄을 타고 하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선두의 안내자가 먼저 밧줄을 몸에 감고 발 디딜 곳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를 따르던 한 등반가가 비명을 지르며 선두 안내자에게로 덮쳐 내렸습니다. 이에 놀란 그 뒤의 두 등반가도 그만 중심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산장에 남아있던 두 안내자와 하이머씨는 밧줄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이 다시 중심을 잡도록 밧줄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밧줄이 힘없이 끊어지면서 네 사람은 4천 피트나 되는 빙하 계곡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들이 붉은 줄이 들어간 규격품의 알프스 클럽의 밧줄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무서운 사고를 일으킨 것처럼 우리의 구원에도 다른 대용품이 있을 수 없다는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그 어떤 밧줄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런 것들은 결정적인 순간에는 끊어져 버림으로 구원을 잃게 합니다. 당신은 붉은 줄을 섞어 만든 밧줄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줄로 말미암아 분명히 거듭나야 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사단은 늘 이 생명과도 같은 붉은 줄, 십자가와 멀어지게 만듭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그 십자가의 길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알려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주심에는 우리의 영적인 나태함에 대해 다시 한 번 새롭게 일깨워주려하시는 뜻이 있는 줄 압니다. 이 시간 함께 말씀을 나눔으로 큰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11~13절의 말씀입니다.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예수의 흔적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헬라어 원어는 스티그마타입니다. 영어의 스티그마 (stigma ) 오점, 오염이라고 번역되는 단어가 여기서 나온 것인데, 일반세속 헬라어에서는 사람의 몸에 세긴 문신이나 동물의 몸에 찍은 낙인을 가리키지만, 일반적으로는 어떤 표지나 아니면 찢어진 상처 흉터를 가리킵니다.

 

그동안에는 예수의 흔적을 두 가지로 해석을 하고 있는데요, 몸에 나타난 종교적인 어떤 흔적은 이런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11장에 보면 바울은 유대인들에게서 40에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은 돌로 맞았고 어떤 때는 죽은 것처럼 얻어맞아서 시체를 버리는 도란에다가 버려진 적도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본다면 바울이 말하는 몸에 예수의 흔적은 복음을 전하다가 고통을 당하며 생긴 몸의 상처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을 자기의 몸에 예수의 흔적이 있다는 것을 강조했습니까? 바울의 적대자들이 할레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면서 몸에 있는 할레의 흔적을 자랑했기 때문입니다. 15:1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유대에 살던 어떤 몇몇 사람들이 갈라디아에 있는 인근지역에 와서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할례가 무엇입니까? 할례란 남성의 생식기에 표피를 제거함으로 하나님과 계약을 맺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지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과의 계약, 언약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흘러내려오는 이 언약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 된 징표요, 증거이기 때문에 이들에게 할례는 하나의 자부심이요, 자랑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있어서 할례는 몸에 남아 있는 하나님과의 계약의 흔적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몸 안에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흔적이 있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 수 있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당연하게 유대주의 자였든 바울의 적대자들은 갈라디아교인들에게도 할례를 받을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할례 받은 것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됩니까? 건강에도 좋고 또 구약에서는 이스라엘백성들이 할례도 받았는데 못 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도 믿고 할례도 받으면 되지 않으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적대자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권했던 이유는 십자가와 그로 인한 박해를 피하려는데 가장 중요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12절에 보면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을 그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할 뿐이라그러면 왜 할례를 받으면 박해를 피할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알다시피 로마시대에 유대인들이 워낙 종교심이 강하고 유대종교에 열심이었기 때문에 유대종교를 건드리면 반란을 꽤하고 목숨 걸고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로마당국으로서는 골치가 아픈 자들입니다. 그래서 로마가 이스라엘에게는 특별히 자기 종교를 믿도록 허락을 했습니다. 그래서 할례가 유대인들에게 분명한 표식 되었던 것입니다. 이 할례 받은 것을 보여주면 유대종교를 믿는 자들이라는 것이 증표가 되어 박해를 피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는 유대주의 자들이 할례를 가르치도록, 그리고 할례를 받도록 요구했는데 그렇지 않으면 유대주의자들이 박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로마로부터 박해를 받지 않으려면, 또한 유대주의자들에게 박해를 받지 않으려면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했습니다.

 

따라서 할례를 받으면 박해를 피할 수도 있고 게다가 구원도 받을 수 있으니까 이게 일거양득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왜 바울은 할례를 강조하는 유대인들에게 거짓선지자, 거짓교사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핵심적인 중요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주장하는 그 명분 뒷면에 십자가를 피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기초가 되어야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공로로 인해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그 구원 후의 삶을 부활의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의 신앙의 기초인데, 즉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의 기초인데, 그것을 무시하게 되면 모든 것이 다 헛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지요.

 

그런데 할례는 인간적인 비위를 맞추는 것이기 때문에 귀에 거슬리지 않습니다. 할례만 받으면, 즉 인간 스스로 이 의식만 행하면 구원이 있다고 하니까 할례를 전하는 것은 걸림돌이 되지 않지만 십자가를 전하는 것은 걸림돌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할 뿐만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듣기 싫고 거북한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우리가 십자가도 믿고 할례도 받고 하는 것이 뭐가 그렇게 문제가 되느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믿지 않습니까? 그리고 할례를 받아서 건강에도 좋고 또 핍박도 피할 수 있고 이런 방법이 없어서 그렇지 있으면 이 방법을 택해야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가 뭐냐는 말입니다. 그것은 할례와 십자가를 동등하게 두게 됩니다. 동등하게 두게 된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십자가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로만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말은 십자가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 아닙니까? 그것은 십자가의 능력, 십자가의 은혜, 십자가의 구원 이 모든 것을 사실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십자가의 능력과 구원을 부인하고 할례를 받아야 구원이 있다는 것 아닙니까? 이것은 굉장히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우리 가정을 덮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세상 방법으로 살아가는데 십자가가 걸림돌이 된다는 말이지요.

 

오히려 세상에서 사는데 십자가가 얼마나 불편한지 모릅니다. 마음대로 화도 낼 수 없고 즐길 수도 없고 십자가가 내가 생활하는데 얼마나 불편하게 느낍니까?

 

예나 지금이나 십자가는 걸림돌이지요. 아니 십자가는 요즘이 더 걸림돌인지도 모릅니다. 풍요를 모르는 시대보다 풍요가 넘치는 지금이 십자가가 더 큰 걸림돌이 되는 것 같아요. 어쨌든 예나 지금이나 상황은 변화지 않았습니다. 예수에다가 할례만 더 하면 되는데 무엇이 문제냐 그러면서 십자가보다는 할례를 더 좋아합니다. 이런 거짓설교자들의 가르침을 받아 할례를 받는 갈라디아 교인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이 늘어나는 것이 바울의 적대자들에게 자랑이었습니다. 13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함이라

 

정말 아이러니한 것은 갈라디아인들에게 율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된다고 하던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율법을 다 지키더라도 하나만 지키지 못하면 결국 율법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 사람들은 할례를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음에도 왜 다른 사람에게 할례를 강요했는가? 그 이유는 자신들처럼 할례를 받은 제자들의 수가 늘어나는 것을 자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에 담긴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순종, 섬김, 용서, 생명의 신앙을 하나로 묶는 열쇠는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순종하고, 사랑으로 섬기고, 사랑으로 용서하고, 사랑으로 생명을 나누며 연합할 때 십자가의 도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한 쪽의 막대기가 모자라 기형이 아닌지, 토막 난 막대기로 남을 찌르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사도 바울을 찔렀고, 사도 바울은 그 십자가로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그 상흔을 지니고 살았던 사도 바울처럼 우리도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살아가길 바랍니다. 그 흔적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순종하며, 섬기며, 용서하며, 생명을 살리기 위해 연합합니다. 교회는 예수의 흔적을 지닌 공동체요,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의 흔적을 지니지 않고 구원은 없습니다. 십자가 외에 구원이 없다는 말씀,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이시라는 말씀은 이런 의미입니다. 순종, 섬김, 용서함,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노력 없는 곳에는 십자가도 예수도 없습니다.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로우신 주님!

주님의 놀라운 은혜와 십자가 사랑의 흔적을 우리가 갖고 있습니다. 이 십자가의 길을 포기하게 하지 마시고 끝까지 주의 영광을 위해 이루게 하소서! 이 모든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