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선교교회/한국어예배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마라 (빌 4:4~8, 주일예배 20200823)

온누리선교 2020. 8. 20. 16:08

성경말씀: 빌립보서 4:4~8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설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마라 (이 영 목사, St. Erkenwald's Church, UK)

 

인생을 갉아먹는 두개의 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어제에 대한 후회이고 다른 하나는 내일에 대한 염려입니다.

, 왜 내가 그렇게 말했을까? 왜 그렇게 행동했지? 왜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

우리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자랄까? 앞으로 내 삶과 미래는 어떻게 될까?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챤이 되면 걱정과 모든 문제들에서 자유하게 될거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는 크리스챤의 삶은 평화가 넘치는 삶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삶에 평화가 없으면 우리안에 무언가가 잘못된 것이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의 삶속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크리스챤이든 아니든, 어제에 대한 후회와 내일에 대한 염려가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돌고 도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에게 지금 가장 걱정이 되는 것이 무엇이 있죠?

3가지만 생각해 보세요. 가장 걱정과 염려가 되는 것 세 가지!

,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걱정에 대해 사도바울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Be anxious for nothing!"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걱정을 조금만 해라" 아니면, "일주일에 한번만 걱정해라" 또는 "아주 어려운일이 닥칠때만 걱정해라" 이 정도만 하는 것도 충분한 도전이 되는데~사도바울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라고 합니다.

이게 정말 가능한 삶인가? 혹시 사도바울은 현실감각이 좀 떨어지는 사람이 아닐까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알아야 할 게, 걱정이나 근심 그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이 걱정하는것에 대해서 걱정하지 마세요.

다만 우리의 걱정이 죄악된 행동으로 인도하는 것을 우리는 조심해야합니다.

걱정과 근심은 굉장히 toxic, 독성이 강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걱정은 배우자를 버리게 만들고, 자녀들을 돌보지 않게 만들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게 만들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부수게 만듭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그 걱정에서 승리하는 영적인 원칙, 세 가지만 나누고 싶습니다.

첫번째 원칙은,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자입니다. 뭐라고요?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자" Rejoice in the Lord Always!

항상 기뻐하기 위해서 먼저 왜 우리가 기뻐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알아야합니다.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과거의 후회와 죄책감입니다.

저에게 소중한 3명의 자녀들이 있는데요. 요즘 들어 제가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제가 제 아내와 종종 말다툼을 할 때가 있는데, 그때 제가 하는 잘못된 말투와 태도를 이 아이들이 배워서 엄마에게 똑같이 말하는 걸 보고 놀랐습니다.

그걸 보면서, 내가 부모로서 본이 되지 못하고, 아내에게도 제대로 된 남편이 되지 못했구나 라는 후회와 죄책감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런 죄책감은 콘크리트 돌덩이같이 우리 영혼에 묵직하게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이 죄책감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항상 제대로 하는게 없구나"

그리고 이 죄책감은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나는 안돼. 나는 희망이 없어."

그리고 이 죄책감의 결과는 바로 염려와 걱정입니다. 삶에 기쁨이 있을수가 없어요.

인류 최초로 이 죄책감으로 생긴 걱정에 사로 잡혔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군지 아시죠?

(3: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일류 최초의 이 가족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숨길것이 없었어요.

그러나 이제는 염려와 걱정에 하나님 앞에서 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해결되지 않은 죄책감이 있습니까? 그 사람은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을 한 후에 시편에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32:3)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32:4)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하지만 우리가 낙담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에겐 항상 기뻐해야할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책감이 우리의 영혼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때, 예수님의 은혜가 그 영혼을 회복시키십니다.

사도 바울을 회복시키신 것도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그 은혜입니다.

사도바울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의 손에는 크리스챤이 흘린 피가 묻어있었고, 그 집의 벽에는 종교학 학위가 걸려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보는 그 순간 다른 것들은 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더이상 자기의 이력서나 스펙을 보지 않았습니다.

더이상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랑할 것들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더 얘기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덜 얘기하게 되는 옵션밖에는 볼 수 없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서 37절 그리고 8절에서 얘기합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그이유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

사도바울은 자기의 죄책감을 예수그리스도께 내려놓았습니다.

바울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자비 안에서 기뻐하였습니다.

더이상 무화과 나무 잎 뒤로 숨을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에 던져 넣을 때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주안에서 기뻐하실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을 수 있는 두번째 원칙은, "기도와 간구로 예수님께 나아가자!"입니다.

 

6절말씀 다시 보겠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예수님의 유명한 비유(parable)중에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재판관은 아주 부패한 재판관이었어요. 여기저기서 청탁을 받고 자신의 부를 불리고, 자신의 위치로 권력을 누리던 불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난한 과부가 있었습니다. 아주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이 재판관에게 청탁하려고 해도 돈도 없습니다. 사회적 지위도 없습니다. 이 당시 과부라고 하면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계층에 속합니다.

그래서 이 과부는 이 재판관을 계속 찾아갑니다.

아침에 집앞에서 기다리고, 법정에도 찾아가 도와달라 부탁하고, 재판관의 아내가 가는 쇼핑에도 따라가 사정을 합니다.

이 끈질김에 지친 이 재판관의 아내도 재판관에게 이 아주머니를 어떻게 좀 하라고 잔소리를 합니다.

결국에 이 재판관은 이 과부의 부탁을 들어주죠.

이 재판관이 정의로와서 도와준 걸까요? 아닙니다. 어떻게든 이 아주머니를 보지 않으려고 한 결정이었지요.

도대체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무엇을 가르치시려고 한 걸까요?

이 비유의 핵심은 비교(comparison)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불의한 재판관 그리고 과부와 우리를 비교하는 게 포인트가 아닙니다.

핵심은 바로 대조(contrast)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관이 아니십니다. 우리는 과부가 아닙니다.

이야기 속의 과부는 최하층민이고,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왕의 자녀들로서 최상층에 속해 있습니다. 하늘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어요.

우리는 아무 때나 하나님께 나아가 도움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절대로 이것을 미루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나중에 다시 얘기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음성듣기를 항상 좋아하시고, 우리가 부를 때 숨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얘기합니다. 이사야서 62:6-7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

여러분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들이 있을 겁니다. 여호와로 기억하게 하십시요.

어떻게요? 기도와 간구 그리고 감사함으로.

여호와여, 당신이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이사야 43:2) 라고 말씀하셨지요?

당신께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인도하신다고 약속하셨쟎습니까? (시편 23:4)

당신께서 나를 결코 버리지도 떠나지도 않으리라고 말씀하셨지요? (히브리서 13:5)

우리가 이렇게 기도로 나아갈 때, 걱정이 우리 생각속에 더이상 자리를 잡을 수 없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게 됩니다.

, 마지막 영적인 원칙은, "주께서 가까우심을 기억하자." 입니다.

 

5절말씀 다시 보겠습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사도바울이 이 글을 빌립보 교회에 보낼 때, 이 글에는 장(chapter)과 절(verses)이 없었습니다. 왜요? 편지니까요.

여기 아무도 편지나 이메일 보낼 때, ", 11, 건강히 잘 지내시죠? 12절 예수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이렇게 안하쟎아요?

그러므로 5절과 6절을 따로 나눠서 볼 필요가 없습니다. 한 호흡으로 읽을 수 있지요.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그러므로/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마라." (대신) "기도와 간구로..." 이렇게요.

주께서 가까이 계십니다. 여러분은 혼자가 아니예요.

때론 홀로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그렇게 생각이 들 때가 있어도, 여러분 삶속에서 한순간도 하나님께서 멀리 계신적은 없습니다.

성경 전체를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람들에게 반복적으로 약속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분의 임재 (presence), 실재입니다.

아브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15:1)

하갈(Hagar)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말라. 하나님께서 너의 간구를 들으셨다." (21:17)

이삭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자신의 땅에서 쫒겨나서 이곳저곳을 방황할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26:24)

모세가 죽고,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십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여호수아 1:9)

다윗이 간음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윗과 함께 하셨고, 남을 속이는데 익숙한 야곱과도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하나님 당신이 사람의 몸을 가지고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그 이름은 임마누엘, 그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말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선, 당신의 영이신 성령님을 통해서 지금도 우리를 가르치시고, 위로하시고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면 주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자녀의 교육 때문에 걱정하시는 분들 있을 겁니다. 건강문제로 걱정하시는 분들 있을 겁니다.

부부관계로 걱정하시는 분들도 있을 거고,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걱정하시는 분들 있을 겁니다.

또는 미래의 불확실성 때문에 걱정하시는 분들 있을 겁니다.

, 여러분의 한 손에는 이렇게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손에는 정말, 제한된 자원, 지혜, 에너지, 그리고 제한된 시간과 인내가 있고. 그것은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하기에 결코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대신에, 예수님과 시작해보는게 어떻겠습니까?

그분의 제한 없으신 부()와 그분의 무한한 풍요로움과 그분의 전능한 힘으로 시작을 해봅시다.

예수님께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나아 갔을때 오천명을 먹인 역사가 일어났듯이, 예수그리스도께 우리의 문제를 들고 나아갈 때 오병이어의 역사가 여러분의 삶 속에 일어날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짧은 이야기 하나만 나누고 마치겠습니다.

빌 프레이라는 작가분이 쓴 책, The Dance of Hope에 나오는 이분의 어릴적 이야기입니다.

어느날, 우리 집 앞 공터에서 큰 나무 그루터기가 올라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그루터기를 뽑아보려고, 몇시간 동안 당겨도 보고 밀어도 보았지만, 뿌리가 너무 깊어서인지 꺼낼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아버지가 일을 마치시고 집으로 귀가를 하시다가 내가 무엇을 하나 찬찬히 보고 계셨습니다.

"나는 너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겠다." 아버지가 말씀하십니다.

"뭐가 문제죠?" 나는 궁금해서 물어보았습니다.

"너는 너의 모든 힘을 사용하지 않고 있어" 라고 아버지가 대답하셨습니다.

아버지의 그 말은 나를 화나게 만들었습니다. "아버지, 제가 몇시간 동안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모르니까 그런 소리를 하시는 거죠?"

여전히 아버지는 고개를 저으시면서 "아니, 너는 너의 모든 힘을 사용하지 않고 있어."

흥분을 가라앉힌 나는 아버지께 그 뜻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너는 아직 나에게 도와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쟎아."

우리가 우리의 걱정을 다루는 것은 마치 이 소년처럼 그루터기를 땅에서 뽑아내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분의 걱정은 아마도 아주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뿌리까지 캐내는 것은 아주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혼자의 힘으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문제를 그분께 맡기고 그분의 도움을 바라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힘이요 능력이시기 때문입니다.

주안에서 그분의 은혜와 자비를 기억하며 항상 기뻐하십시요

기도와 간구로 여러분의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십시요.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며 그분이 여러분의 능력 되심을 기억하십시요.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