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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강해 6) 일꾼된 그리스도인 (수요기도회20210317)

온누리선교 2021. 3. 17. 09:02

 

성경말씀: 골로새서 1:21~25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설교: 일꾼된 그리스도인

 

우리가 함께 할 말씀은 바울이 제시한 교회가 필요로 하는 일꾼이 누구인지를 적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얼마나 우리가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인지를 아시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1~22절의 말씀입니다. 구체적으로 골로새교회에 필요한 일꾼, 우리 교회가 필요로 하는 일꾼도 바로 이런 조건의 사역자들입니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 이런 사역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우선 그는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가진 자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일꾼입니다만, 정말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복음의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복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확인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교회의 일꾼인 것은 사실이나 교회의 일꾼이란 것은 교회의 조직을 공고히 하기 위해 헌신해야 하는 사람이란 뜻이 아닙니다. 본질적으로는 복음의 일꾼이 되라는 뜻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각자가 복음에 대한 확신,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복음에 대해 어떤 확신을 갖고 계십니까?

 

23절을 보시겠습니다.

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고 합니다. 복음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웃에게 간증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교회의 일꾼은 필연적으로 복음의 일꾼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자기도 믿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웃에게 복음을 말할 수 있겠으며, 어떻게 그들을 주님 앞으로 이끌어 올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교회의 전도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니 교회의 일꾼 이전에 복음의 일꾼이 되어야 하고, 그 이전에 복음에 대한 신념과 간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왜 교회의 일꾼 노릇을 제대로 못 합니까? 결국 개인적으로 복음에 대한 신념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얼마나 가슴이 뜨겁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웃을 향해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런 사람들의 모임이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복음에 대한 확신이 없기에 타성에 젖어서, 경직된 조직의 일원으로서 아무런 생산적인 사역도 못하고 정말 주님이 기뻐하실만한 헌신도 못한 채 시간만 보내고 있습니다. 간증이 있어야 합니다. 주관적인 복음에 대한 신념이 약하면 안 됩니다. 골로새교회 일꾼들을 얘기하면서 바울은 교회의 일꾼 이전에 복음의 일꾼을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어떤 직책을 맡기 전에 사람이 되라는 것과 같은 겁니다. 복음에 대한 신념이 확고부동해야 합니다. 그래서 고백과 간증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분명한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25절입니다.

25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여기서 말하는 일꾼이라는 단어는 어떤 의미입니까? 우리가 아는 것처럼 바울은 사도였기 때문에 이 단어가 목회자나 사역자에게 국한된 단어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게다가 여기서는 '교회의 일꾼'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사도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일꾼이라는 단어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즉 여기서 언급된 '교회 일꾼'이란 성직자를 가리키는 말이 아나라, 말 그대로 일꾼입니다. 헬라어 디아코노스’ (diakonos)를 번역한 말인데, 이 헬라어에서 영어의 “deacon”, 집사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디아코노스는 특별히 성직자들에게만 사용되던 단어가 아니라 교회를 섬기는 모든 자들에게 사용되는 보편적인 용어입니다.

이와 같은 표현이 ''입니다. 헬라어로 '둘로스'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같은 의미입니다. 이 단어들이 사도 바울이 자신을 표현할 때 자주 쓰는 단어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표현할 때 '' 혹은 '일꾼'이라고 할 때는 그의 신앙고백이 들어가 있습니다.

당시 사회는 노예제도가 있었습니다. 지금의 우리가 갖는 ''의 느낌과 당시 사회에서 자신을 ''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상당한 느낌의 차이가 있습니다. 노예제도가 있는 사회에서 자신을 종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고, 게다가 노예 신분이 아닌 사람이 스스로를 '' 혹은 '일꾼'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거의 드문 일이었습니다. 어느 누가 자원해서 종이 되겠습니까?

구약성경에 보면 딱 한 가지 예가 있습니다. 종으로 있던 자를 희년이 되면 빚을 탕감해주고 자유인으로 보내주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종이 주인의 종으로 남아있기를 원하는 경우에는 그대로 종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종은 이전과는 다른 지위를 가집니다. 종은 종이되 자유를 가진 종입니다. 즉 자유인의 신분을 얻었지만 주인을 사랑한 나머지 스스로 종이 된 것이기 때문에 그는 자유인이고 주인도 그를 종으로 여기지 않았고 친구로 가족으로 여겼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종이라고 표현할 때는 그런 성경적인 개념을 가지고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자유인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구원해주신 주님의 그 사랑과 은혜가 너무나도 고맙고 감사해서 스스로 종이 되었다는 그런 말입니다. 이런 종을 사랑의 종, 자유의 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종은 자기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한 일은 모두 주인을 사랑해서 한 일이기에 일을 하고나서 자기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는 말이 "나는 무익한 종이라"고 합니다. 내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이 종은 또한 겸손의 종입니다.

바울은 그런 의미로 자신을 표현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일꾼된 자를 이렇게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꾼이란, 종이란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은 자며, 그 사랑을 알기에 기꺼이 즐거움으로 또한 겸손함으로 주님을 위해 자신을 드리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자신들을 주의 종으로, 교회의 일꾼으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위기가 무엇입니까? 이런 의식, 이런 정체성을 가진 일꾼들이 적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 교회의 일꾼으로 알고 즐거움으로 헌신하고 겸손함으로 자신을 낮추는 일꾼들이 많을 때 교회는 교회다울 수 있고 참다운 주님의 교회로 서 나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 교회를 섬기는가 하는 것입니다. , 목표의식입니다. 어느 책에선가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간다. 왜 가는가? 아마도 교회에 가기 위해서 가는가 보다. 사람들은 예배를 드린다. 왜 드리는가? 아마도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드리는 모양이다. 사람들은 기도한다. 왜 기도하는가? 아마도 기도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모양이다. 사람들은 성경을 공부한다. 왜 공부하는가? 아마도 성경을 공부하기 위해서 하는 모양이다. 사람들은 봉사한다. 왜 하는가? 아마도 봉사하기 위해서 하는 모양이다.”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무언가 신앙생활도 하고 봉사는 하고 무언가 교회를 위해 일은 하는 것 같은데, 정작 무엇을 위해 하는지 모르고 한다는 것을 꼬집고 있는 말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목표를 상실한 채 종교적인 형식이나 행위에만 치우치고 그저 습관적으로 혹은 체면치레 정도로 교회생활을 하는 것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이요 교회의 일꾼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일을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무기력해지고 세속화되는 큰 원인 중 하나는 일의 목표를 망각하는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꾼으로 세워 주신 이유, 목표는 무엇입니까? 25절에서 바울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바울이 일꾼이 된 것은 바울 자신의 개인적인 야망이나 명예를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라는 말입니다.

 

찬송가 작사가 가운데 프랜시스 해버갈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영국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유학했습니다. 독일 뮌헨 미술관에 가서 렘브란트 그림을 보다가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라는 그림을 보고 감동과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아래에 글귀가 적혀 있었는데, 우리 새찬송가 311장입니다. ‘나는 널 위해 내 몸을 주었으나 너는 날 위해 무엇을 주느냐는 글귀입니다. 그는 집에 돌아와 이 찬송가를 작사합니다. 여러분, 주님의 남은 고난을 여러분의 육체에 채우십시오. 십자가를 노래하는 사람은 많으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를 향한 주님의 안타까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비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드러내고, 나아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교적 사명, 곧 전세계에 예수님의 풍성하신 비밀을 전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 즉 예수님을 닮은 제자들로 성장할 수 있는 그런 건강한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어야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하나님의 축복된 일꾼들이 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우리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사시고,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만들어 주심을 감사합니다. 감사하여 주님의 일꾼으로 기꺼이 살겠사오니, 우리에게 순종과 말씀으로 이끌어 주시어 주님의 복된 사명을 감당하며 살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슴 주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