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아버지"되시는 하나님 (갈 4:6, 주일예배 20220116)
성경: 갈라디아서 4:6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설교: “아빠, 아버지”되시는 하나님
성경말씀에 가장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탕자의 이야기입니다. 이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는 탕자가 타국에서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고 섰다가, 아들이 돌아오는 모습이 눈에 띄자 먼 거리를 달려가 안아 주는 장면입니다. (눅15:20)
여기서, 어른이 '달려간다'라는 표현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보통 들을 수 없습니다. 남자 성인 유대인이 발목이나 발바닥을 드러내 보이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발바닥을 드러내 보이는 행동은 주변 사람들을 모욕하는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지금도 정통 유대인들은 상대방이 다리를 꼬고 앉으면 자신들을 모욕한 것으로 간주하고 자리를 뜹니다.
그럼에도 그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체면을 포기하는 것은 물론, 그는 ‘남들이 손가락질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발바닥을 드러내며, 아들에게 달려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 많은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만약에 ‘종’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그 아버지가 그렇게 뛰어갔겠습니까? 아닙니다. 자기 ‘아들’이 집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모습에 발바닥을 보일 만큼 뛰어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우리는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원래가 그 신분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창세전에 이미 택정 하셨을 때부터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사는 우리는 하나님의 때가 이르기까지 후견인과 청지기인 ‘율법’ 아래서 지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들의 명분을 주시고 아들로서의 유업을 이을 자로 결정하셨다’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이 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지금 이 어려운 시기에 스스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존감이 무너지려고 한다면, 오늘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아시고 자존감을 세우시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6~7절의 말씀입니다.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는 어떤 사람인지를 한마디로 정의 내릴 수 있는 단어가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종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우리는 주님의 자녀라고 말하기도 하지요. 종이든 자녀이든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를 부분적으로만 표현할 뿐이지 우리의 전부를 표현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일군으로 존재할 때에는 종이라는 표현을 쓰고, 반면에 구원의 문제를 말할 때에는 자녀라는 표현을 씁니다.
‘주인과 종’은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는 관계가 아니라 사실은 법적인 관계입니다. 주인은 종을 소유하고 있거나 종에 대해 지배권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종은 정해진 노임을 받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자신의 힘으로는 주인이 될 수 없고, 주인의 것을 물려받지도 못합니다.
반면에 자녀는 법적인 관계가 아니라 사랑과 은혜와 이해와 그리고 인간적인 관계입니다.
세상일에는 법대로 해결해야 할 상황이 수시로 생기겠지만 부모와 자녀가 법대로 해결해야 할 상황이 된다면 그 집안은 이미 콩가루 집안이 되었다는 의미 아닙니까?
6절에 보면 ‘너희가 아들이므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종으로 부르지 않으시고 자녀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처럼 계약서를 쓰고 하나님과 관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자녀를 낳고 사랑으로 기르고 양육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의 생명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자비와 은혜로 오늘도 우리의 삶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6절을 계속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그 아들, 즉 예수님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로 부르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종들을 대할 때 주인은 단호한 명령, 엄한 규율과 질서를 가지고 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예수님 때문에 따스한 사랑과 자비로 하나님께서는 대하여 주십니다.
6절 마지막에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서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특히 아빠라고 하는 표현에는 부모와 어린 자녀 사이에 존재하는 진실한 사랑이 담겨 있지 않습니까?
“아빠”라고 부르는 곳에 세상의 법과 규율과 엄한 질서를 앞세우면 이것은 절대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들과 당신과의 관계가 진실한 사랑으로 맺어지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사도바울은 우리가 예수를 알기 전에는 종이었는데 이제는 종이 아니라 자녀가 되었고, 자녀가 되었기에 하나님의 유업을 받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유대인들이 들어와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갈라디아교회의 교인들을 다시 율법의 굴레에 얽매이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 일 때문에, ‘또 너희들은 그렇게 쉽게 다시 율법의 굴레에 얽매여지고 있는데 이게 얼마나 어리석고 답답한 일이냐’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참으로 귀한 것을 깨닫습니다.
‘자녀’과 ‘종’의 신분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하나님 자녀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유업을 이어받고, 그분의 통치를 완성하는 아들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종’은 세상의 속박 속에서 사단의 종으로 자유없이 늘 고통과 고난 가운데에서 살아갑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종처럼 살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아시는 바 되어 그분과 인격적 교제가 가능해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녀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들을 끊어 내야 합니다. 또 종처럼 얽매여 있던 율법 조문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유대교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제사’와 ‘절기’를 지키는 일들은 예수님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계속해서 그것들에 종노릇한다면, 우리를 구속하신 은혜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끝까지 ‘하나님의 자녀가 됨’의 특권을 저버리지 말고 믿음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모든 것을 다 이루셨기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고,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순종하며 살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우리가 사단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요즘 ‘판박이’, ‘붕어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가 막히게 자녀들은 부모를 닮는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을 닮아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데 왜 하나님을 닮지 않았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소명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복과 권세를 누리도록 늘 주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지 말고 늘 말씀과 기도로 사시며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저 혼자 해 보려고 낑낑대며 애쓰던 일들을 모두 아버지 하나님 앞에 가져가오니 은혜로 덮어 주소서.
주님! 하나님 자녀의 권리를 누리지 못한 채 율법주의에 빠져 종처럼 아무 기쁨 없이 두려움 가운데 살아가는 형제자매를 진리로 이끌어 주는 우리가 되게 하소서.
이 모든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