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전서강해 4) 선한 싸움을 싸우라 (수요기도회 20220209)
성경말씀: 디모데전서 1:18~20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설교: 선한 싸움을 싸우라
어느 주유소에서 이런 현수막을 본 적이 있습니다. “기름만 팔고 양심은 팔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서 양심을 팝니다. 더 많은 돈을 얻기 위해 더 많은 쾌락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양심을 쉽게 내어버립니다. 일시적인 기쁨을 위해 싸구려 만족을 위해서 양심의 소리에 귀를 닫아버리고 하나님을 무시하려고 눈을 감아버립니다.
하지만 선한 싸움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의식하며 그 임재하심 가운데 세상과 다르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한 싸움을 싸우기 위해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의 양심을 통해 말씀하실 때 믿음으로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선한 싸움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사도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이렇게 말합니다. “선한 싸움” 싸움이라고 해도 다 같은 싸움이 아닙니다. 싸움 중에는 선한 싸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싸워야 하는 싸움은, 성경이 명령하고 있는 싸움은 선한 싸움입니다. 선한 싸움이 아닌 싸움은 피해야 합니다. 싸우지 말아야 합니다. 선한 싸움은 싸우면 싸울수록 우리에게 축복이 되지만 선한 싸움이 아닌 싸움은 싸우면 싸울수록 문제가 됩니다.
그럼 여기서 우리에게 생기는 질문이 있습니다. ‘선한 싸움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선한 싸움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 때 선한 싸움에 대한 명령을 제대로 따를 수 있고 선한 싸움을 명령한 이유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선한 싸움이 주는 유익과 만족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명령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며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싸워야 할 선한 싸움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주님의 군사로서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우리가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
18~19절의 말씀입니다.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바울은 본문 18절에서 디모데에게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일생 동안 선한 싸움을 싸워왔다고 확신했습니다. 이제 자신을 본받아 디모데 역시 선한 싸움을 싸울 것을 독려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선한 싸움'은 어떤 것일까요? 어떻게 해야지만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일까요? 사실, 싸움하면 다 악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싸움은 상대방을 제압해서 이기는 데 목적을 두기 때문에 대개 나쁜 이미지부터 먼저 떠오르는 것이 사실 아닙니까? 오직 싸움을 그치고 평화를 맺는 것만이 선하게 생각됩니다. 그런데 '선한 싸움'을 싸우라니요? '선한 싸움'은 도대체 어떤 싸움일까요?
본문 말씀을 깊이 묵상해보면 선한 싸움은 두 가지 사실에서 결정됩니다. 첫째, 싸움의 동기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이며, 둘째, 어떤 도구를 사용해서 싸우냐 하는 것입니다.
18절에 보면,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여기서 중요한 말이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에 따라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전에 디모데에게 내린 예언을 따라 그 예언대로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 예언이란 어떤 것일까요?
행 13: 1-4에 보면 바나바와 바울이 보냄을 받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안디옥 교회 안에 있던 예언자들과 교사들이 주님께 예배하며 금식하는 가운데 성령께서 분부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워 선교 사명을 주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예언자들과 교사들은 성령의 말씀에 순종해서 금식하고 기도한 뒤 바나바와 바울에게 안수해서 선교사로 세웠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언입니다.
누군가 거룩한 직분을 맡을 때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장차 해야 할 사명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예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라고 말씀했을 때의 예언은 디모데가 사역자로 부름을 받아 거룩한 사명을 부여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즉, 디모데에게 선한 싸움은 하나님의 진리와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었습니다.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자들로부터 교회를 보호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그 뜻에 따라 교회를 돌보는 일이 선한 싸움입니다.
디모데가 하나님을 위해 선한 싸움을 싸웠던 것처럼 우리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그 선하신 계획 가운데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에게 영적인 재능을 주셨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교회를 섬길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일할 수 있고 하나님을 위해 선한 싸움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를 따라 세상과 구별되어 살아갑니다. 서로가 서로를 말씀으로 세워주고 세상의 거짓들에 대해서 대항합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군사로서 악한 영들과 싸우며 세상 풍조와 죄에 맞서 계속해서 선한 싸움을 싸웁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싸울 수 있는 선한 싸움이 가능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자를 택하셔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며 하나님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은혜입니다. 이 은혜는 우리가 어떤 자세로 선한 싸움을 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합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은혜로 선한 싸움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가 은혜를 잊어버리고 악한 싸움을 할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를 한 번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선한 싸움인지 악한 싸움인지, 나는 지금 어떤 싸움을 하고 있는지 세 가지로 점검할 수 있습니다. 싸움의 대상, 싸움의 방법, 싸움의 목적입니다.
19절에는 바울은 디모데에게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명령합니다. 여기 “가지라”는 말은 ‘붙잡으라, 지키라’는 의미입니다. 나에게 없는 것을 노력해서 얻으라는 말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것을 계속 유지하고 잃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은 주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같은 상태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릅니다. 사람에 따라 다를 뿐만 아니라 나 혼자를 두고 비교한다 하더라도 시간에 따라 세월에 따라 믿음과 착한 양심이 차이가 있습니다. 믿음이 더 깊어지고 양심이 더 민감하게 될 때도 있지만, 반대로 믿음이 얕아지고 흔들리고 양심이 무뎌질 때도 있습니다.
믿음과 양심은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둘은 서로 연관 되어 있고 서로에게 영향을 줍니다. 주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으로 견고하게 서있다면 양심의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깨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흔들리고 무너진다면 양심도 무너지게 됩니다.
우리가 믿음과 양심을 따로 생각해보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믿음이 있으면 그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만드신 피조물을 통해서 성경을 통해서 믿음으로 하나님을 봅니다. 그리고 양심은 하나님을 의식하는 마음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도 양심은 가지고 있습니다. 양심이 깨어있는 사람은 나름의 기준으로 선을 행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양심은 하나님에 대한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보기 때문에 더 크게 양심의 일깨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착한 양심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느끼고 그 하나님에 대해서 합당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더라도 착한 양심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심을 알기에 행동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이 있든지 없든지 관계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양심이 깨어있지 않다면, 무뎌져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아닌 나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믿음이 좋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선한 싸움을 싸우기 위해서는 믿음과 착한 양심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선한 싸움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선한 싸움 가운데에 악한 싸움의 편으로 간 자들이 있음을 사도 바울은 이야기 합니다. 20절입니다.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는 믿음에 파선 당한 자들이라고 사도 바울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후메내오는 망령되고 허탄한 말을 함부로 하던 자였습니다. 그는 부활이 이미 지나갔고 실제적인 부활을 부인하는 자였습니다. 또한 알렉산더는 구리장색으로 돈이 많아서 복음의 전파를 방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이 이전에 복음에는 함께 하였는지는 모르지만 끝까지 연합하고 협력하는 사람들이 아닐 때 그들은 파선하는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사탄에게 내준 바 되었고 그들이 당한 어려움 속에서 더이상 그리스도의 신성을 모독하지 않게 하는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에서도 이러한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도록 주님을 바라보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모독하는 자가 되지 말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과 선한 양심에 있어서 파선하는 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운동경기를 할 때에는 그 운동경기마다의 규칙이 있습니다. 그 규칙을 지키면서 운동을 해야 합니다. 만약 그 규칙을 어기면 반칙이고 그러한 반칙이 반복되면 퇴장을 당하고 더 이상 운동경기를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규칙을 잘 지키면서 경기를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또한 자신이 해야 할 책임을 잘 감당하면서 경기를 해야 합니다. 그 역할을 잘 해낼 때 그렇게 한 선수에게 칭찬이 주어집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운다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의미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으면서 해야 할 것을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배운 대로의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서 그 일에 자신의 책임을 감당한다는 의미에서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 칭찬을 받는 자가 되며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나를 위해 친히 싸우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합니다.
죄와 이 세상의 악한 풍조에 대해 단호하게 싸우며 최후 승리 얻을 때까지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며 승리의 깃발을 높이 들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