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도서 강해 1)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수요기도회 20220921)
성경말씀: 디도서 1:1-9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이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같은 믿음을 따라 나의 참 아들 된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 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아니하며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행을 좋아하며 신중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설교: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본서는 로마1차 투옥에서 풀려난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을 여행하던 중에 그레데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던 믿음의 아들이자 사랑하는 동역자인 디도에게 교회 조직과 질서를 확고히 하기 위한 목회 지침을 주고자 써 보낸 편지입니다.
바울은 A.D.63년경 로마 1차 투옥에서 풀려난 뒤 곧바로 서바나를 방문하고 거기서 에베소, 빌립보, 고린도 등을 방문하기 위해 여행하던 중 그레데에 들렀다가 그레데 교회의 심각한 문제점들을 인지하고 디도를 그곳에 남겨두어 그 같은 문제점들을 바로잡도록 하였습니다. 그런 뒤 바울은 마게도냐 지역으로 돌아온 후 디도에게 본서를 써 보낸 것입니다.
당시 바울이 디도를 교회의 목회자로 머물게 한 곳인 그레데는 지중해상에서 네 번째로 큰 섬으로 소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요충지였습니다. 그리고 그레데는 로마에 정복당하기 전에는 자치 정부를 가진 독립 국가였습니다. 때문에 그레데인들은 로마인들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로마의 지배에 대항하여 자주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또한 이곳에는 초대 교회 당시의 양대 이단인 유대주의적 이단과 영지주의 중 특별히 유대주의의 영향을 받아 할례 실시와 같은 형식적인 구약 율법 준수를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내세우는 유대주의적 이단 곧 율법주의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가 상당히 왜곡되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극도로 타락한 헬라 문화의 영향으로 불신자인 그레데인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그레데 교회 성도들 중에도 나태와 방종에 빠진 자들이 상당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신앙과 행위는 전혀 무관한 것이라는 그릇된 신앙관을 가진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당시 그레데 교회는 신앙적으로 뿐만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선한 행위로 불신자들 앞에서 본이 될 만한 모습을 보여 줄 수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이러한 열악한 환경에서 목회하는 디도를 격려하며 거짓 교사들을 척결하고 교회 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한 목회 지침을 주고자 본서를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목회 지침뿐만 아니라 성도들에게 바른 교회 생활 지침을 제시해야 하는 교회 지도자의 책임과 역할을 고취토록 하기 위한 목적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이런 힘든 상황 가운데에서 목회를 하는 디도에게 격려를 하고 목회적 지침을 주기 위해 편지를 썼던 것입니다. 바울은 1장 1절에서 4절은 디도에게 인사를 하고 5절에서 9절에 이르러 본론을 이야기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사도 바울의 입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도 엄청난 우상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흔들리고 퇴색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로 주님의 축복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1-3절의 말씀입니다.
1.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이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2.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3.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바울은 여기서 자신을 '하나님의 종'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표현합니다. 이들 호칭을 통해 자신의 사도직을 강조합니다. 또한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일을 하는지에 대한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정체성을 분명히 한다는 것은, 내 역할이 무엇인지 분명히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또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정확히 인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의사면 의사답게 의술을 행해야 하고, 판사는 판사답게 공의롭게 법을 집행해야 합니다. 만약 이들이 자신의 역할을 인지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이와 같이 신앙인은 신앙인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신앙인답게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첫 번째로 말씀으로 변화 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즉 내 삶에 성숙의 진보와 변화가 없다면 곰곰이 내 자신을 뒤돌아봐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을 제한하는 생각과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면서도, 현실의 상황 앞에서, 하나님을 내 이성과 내 경험으로 제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신앙생활을 하는 신앙인이 아니라, 신앙생활만 하는 종교인으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당시 부정적인 이미지였던 ‘종’이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종은 주인의 목적을 좇아 살아갑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종인 바울은 하나님의 목적을 좇아 사는 존재임을 강조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종>입니다. 세상의 목적이 아닌, 하나님의 목적을 좇아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당시 종은 한 명의 주인만을 섬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 되는 순간, 우리는 세상의 종에서 풀려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정체성이 담긴 인사를 통해, 수신자인 디도 스스로가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할 수 있게 만듭니다. 그리고 바울은 3절에 자신이 사도가 된 목적을 구체적으로 소개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고 합니다.
첫 번째로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로또 사서 당첨되거나 주식이 오를 것 같은 확률이나 기대’가 아닙니다. 믿음은 약속의 말씀이 내 삶을 이끌어 간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문제를 가져오는 것보다, 문제 앞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은혜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이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지식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모르는 것은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 세상의 지식에 뒤지는 것은 부끄러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알아가는 것은 평생에 걸친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아갈 때, 세상의 일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생깁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아갈 때,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아갈 때, 우리는 환경을 변화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영생의 소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셨다”고 합니다. 영생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계획하셨기에, 영생은 우리 손과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영생은 소망이 있습니다. 영생이 소망이 있는 이유는, 세상의 것들처럼 지나가거나 없어지지 않고,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영생의 가치를 전도를 통해서 많은 이들에게 전하게 하셨고, 하나님의 명령으로, 바울 자신도 이 귀한 영생의 말씀을 전파하는 직분을 맡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 절에서 바울은 이런 영생의 소망의 동일한 믿음을 따르는, 참 아들인 디도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강을 빕니다.
그리고 4~5절에서 바울이 디도를 그레데에 남겨둔 이유를 두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두 번째는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남은 일을 정리하고”는 원어적으로 ‘부족한 일을 바로 잡다’라는 의미인데, 당시 그레데 교회 안에 거짓 사상으로 인한 혼란(1:10,11)과 선한 일이 없는 신앙상태(1:16) 등으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도를 통해 이를 처리하길 원했고, 그레데섬의 각 성(지역)에 교회들이 존재했는데, 이들 교회들이 온전하게 바로 설 수 있도록, 디도에게 장로와 감독을 세우라고 합니다.
그래서 6~9절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6.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7.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아니하며
8.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행을 좋아하며 신중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9.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바울은, 장로와 감독을 다르게 보지 않고, 동일한 직분으로 봅니다.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감독’이라고 불렀던 경우도 있습니다(행20:28). 명칭에 대한 차이점이 있다면 장로가 나이 혹은 지위에 강조점을 두고, 감독은 그 직분의 기능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점입니다.
장로와 감독의 기준을 두 단어로 요약하면 “책임과 절제”입니다. 그런데 이 기준을 반대로 얘기하면, 그레데 사람들의 타락된 삶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책임감과 절제함 없이 살아왔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레데 사람과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신앙인이라고는 하지만, 세상에서 책임감과 절제 없이, 내 욕심대로, 내 죄악대로 말하고, 행동하며, 방탕하게 살아왔던 타락의 삶일 수 있는 것입니다. 한편으론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의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인 말씀으로 내 자신을 언제나 직면해야 합니다. 여러 중독에 빠진 사람들이 회복으로 가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내가 중독에 빠진 것을 자각할 때입니다. 내가 중독자인 것을 깨닫고 문제라고 인지하면, 그때부터 치료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중독인 것을 모르면, 계속 중독에 빠져 살아가는 것입니다.
디도가 사역하는 그레데는 좋은 상황이 아닙니다. 그래서 환경에 대한 절망과 낙심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디도는 그곳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머리털을 지켜주시고, 우리의 호흡을, 이 땅에서는 물론, 죽음 이후에도 책임져주실 하나님이, 우리를 각자의 가정과 일터와, 교회에 남겨두신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를 남겨두신 “가정, 일터, 교회”는, 전혀 낭만적이지 않는 그레데일 수 있습니다. 거짓과 문제 등이 넘치는 힘겨운 곳이기도 하며, 신뢰 할 수 없는 그레인 같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곳에 남겨두신 이유를 알기 위해 기도를 해야 합니다. 디도처럼 사람을 세우는 일일 수도 있고,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 잘못된 것을 바로 잡기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잘나고, 괜찮아서, 그곳에 남겨두신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은 부족한 사람을 통하여, 부족함을 채우시는 은혜를 주시기 위해, 남겨두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레데에 남겨두신 주님이 이 시간 말씀하십니다. “네가 있는 곳이 그레데냐? 걱정하지마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우리가 디도에게 말씀하신 것을 잊지말고 힘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종,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언제나 자신의 정체성을 인지하고 살아갔던 바울의 모습을 기억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신앙인다운 말과 행동이 담긴 모습으로 살아가게 하시며, 현재 우리가 속해 있는 환경이, 문제가 있는 그레데라 할지라도 낙심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게 하시옵소서. 우리가 그 안에서 부족한 것을 채우고, 사람을 세우며, 잘못 된 것을 바로 잡는 귀한 일에 동참하게 하시옵소서. 부족한 사람을 통하여, 부족함을 채우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새 힘과 은혜를 구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