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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강해 10)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수요기도회 20230315)

온누리선교 2023. 3. 15. 08:05

 

성경본문: 야고보서 2:1-9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설교: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오승재씨가 쓴 "소설 우리 예수님"이라는 소설책이 있습니다. 그 중에 "제일 교회"라는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교양 있는 사람들이 다니는 교회입니다. 엘리트 신앙인들이라고 생각하는 제일 교회 교인입니다. 아주 잘 지어졌습니다. 문화시설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일에 헌 누더기를 걸치고 왼팔이 없는 누더기 옷을 입은 거지가 봇짐을 걸머진 채 교회에 들어옵니다. 안내를 보던 남 집사가 떠밀어냅니다. "나 예배 보러 왔소" "이런 꼴로 예배 보면 안 된다."며 송 집사는 백 원 짜리 하나 쥐어 주고 보내려고 합니다. 이 때 부목사가 "어디서 왔소." 물어봅니다. "예배 보는데 어디서 온 게 무슨 상관이요, 나 집이 없는 줄 뻔히 알지 않소." "누구 소개로 왔소" "거리에서 예수 믿으라는 말 듣고 왔소." 부목사는 들여보냈습니다. 송집사는 헌금 훔치러 왔으니 보내자고 합니다. 그 주변에는 아무도 앉지 않습니다. 부목사가 나가면서 인사합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이요. 그럼 다음 일요일에 많은 친구들을 데려 오겠소." 거지들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다음 주 헌금 시간에 헌금바구니를 그 앞에 돌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헌금할 수 없소." 당회에서 구제비 주고 못 오게 하였습니다. 어느 날 한 거지아이가 "우리 아저씨가 목사님 데리고 오라고 했어요"라고 급히 말합니다. 부목사가 가보니 다리 밑에서 가마니로 가리고 사는 천막에 희끄무레 죽은 시체 같은 몸이 누워있었습니다. 그는 죽은 듯 소리 없이 한 쪽 손을 들려고 하였습니다. 손에는 꼬기 꼬기 꾸겨진 100원 지폐가 있었습니다. 그는 무엇인가를 말하려다가 끝내 말을 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오늘날도 교회 내에서도 학력, 미모, 재력, 지위, 건강, 인종, 성별 등으로 차별대우를 할 수 있습니다. 한국 사회학회 기관지인 [한국 사회학]에 발표한 서석재씨의 [중산층 대형교회론]이라는 논문이 있습니다. 그 논문에 의하면 요즈음 기독교 신자들이 새로 교회를 선택할 때 교회의 유명도나 신도들의 사회 경제적 수준 등을 기준으로 삼는 경향이 확산되고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목사의 설교 내용이나 교단의 교리, 집과의 거리 등을 주로 감안해 교회를 선택했던 과거와는 달리 대형교회 신자들 중 상당수는 소속한 교회가 [수준 높은 식자층과 중산층들이 다니는 교회]로 사회에 알려져 있어 교회에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교회 신자가 됨으로써 자신도 중산층으로 동일시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지 않고 비교적 편하게 다니고 이런 교회 정도는 다녀야 사회적 체면이 선다는 식의 [지위상승 욕구][나도 중산층]이라는 소속감을 가지려는 신자들의 성향이 이런 교회를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출석교회를 통해 교인들의 지위가 달라지는 [교회의 사회적 지위분리]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만 그 차별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초대 교회 안에서도 있었고, 이는 주님의 뜻에 절대 맞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주님꼐서는 사도 야고보를 통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의 놀라운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임하고 이루어져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사는 축복을 지키고 더 확장시키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절의 말씀입니다.

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야고보는 분명하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그러면 차별이 무엇입니까? 차별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장점과 관계없이 사회적 지위나 물질, 인종과 같은 외적인 것에 기초한 올바르지 않은 판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차별이라는 단어는, ‘외모를 취하다라는 뜻을 가진 복합어입니다. , 사람의 외적인 것으로 다르게 대우하는 거나 판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야고보는 차별 하지 말라고,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이러한 명령을 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들이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을 가진 자들은 마땅히 차별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분명하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사람을 향한 차별은 동시에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차별은 가지고 있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그분은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남자든, 여자든, 과부든, 병든 자든, 어린 아이든, 종교인이든, 죄인이든 관계없이 자신에게 나아오는 사람을 받아주셨습니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모두에게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가진 우리는 사람을 차별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차별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차별에 대해서 두 가지로 살펴보고 차별하면 안 되는 이유를 함께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차별은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2-3절의 말씀입니다.

2.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야고보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훌륭한 예를 들어서 이 진리를 설명합니다. 여기 너무도 대조적인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이 두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그 태도를 보여주면서 사람을 차별하는 그들의 모습을 돌아보게 합니다.

먼저 그들이 예배드리는 곳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옵니다. 이 사람은 틀림없는 부자입니다. 당시 금반지를 끼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는 아름다운 옷을 입었습니다. 이것은 빛나는 옷이라는 의미인데, 이 단어가 사도행전과 계시록에는 천사가 입은 옷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이 당시는 요즘처럼 세탁기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이타이나 옥시크린 같은 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빛나는 옷을 입은 것은 이 사람의 사회적 지위나 부를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과는 너무도 차이나는 또 한 사람이 들어옵니다. 누더기 같은 옷을 입었습니다. 낡고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이제 이 두 방문자를 대하는 성도의 태도를 묘사합니다. 이 두 사람을 안내함에 있어서 차별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줍니다. 부자가 왔을 때 호의를 가지고 바라보며 VIP자리로 안내합니다. 하지만 가난한 자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무시하며 경멸을 표하며 앉든지 말든지 네 마음대로 하라는 겁니다. 나는 너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교회는 절대로 사람을 차별하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차별에 대한 결론은 이것입니다. 4절의 말씀입니다.

4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여기서 우리는 차별이 무엇인지에 분명히 알게 됩니다. 차별은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차별한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판단하는 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4절에 차별로 번역된 단어는 1절에서의 차별과는 다른 단어입니다. 4절의 차별1절과 다른 단어가 사용되었고 기본적으로 구분한다. 나눈다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가 16절에서는 마음이 나뉘는 것, 의심하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차별의 의미를 생각할 때, 판단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결국 교회를 구분하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를 둘로 나누는 것이 차별입니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교회를 분리하는 것이 차별입니다. 예수님께서 피 흘려 사신 교회를 찢어 놓는 것이 바로 차별입니다. 내가 행한 차별로 인해 교회가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차별하며 판단하는 자가 된다면 교회는 바로 설수 없습니다. 내 차별로 인해 교회가 부자와 가난한 자로 나뉘게 되고, 내 차별로 인해 교회가 잘난 자와 못난 자로 나뉘게 되고, 내 차별로 인해 교회가 성공한 자와 성공하지 못한 자로 나뉘게 됩니다. 이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신 일과 반대되는 일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판단할 권한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오직 공정한 재판관이신, 하나님만이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올바르게 재판하실 수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시고,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무엘을 보내셔서 이새의 아들 중에 새로운 왕을 찾으십니다. 잘생기고 정말 멋있는 아들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선택하지 않으시고, 마지막에 다윗을 찾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 16:7) 우리는 하나님과 달리 사람을 볼 때 사람보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볼 때가 많습니다. 사람의 외적인 모습, 겉으로 드러나는 조건을 보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것이 그 사람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외적인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가장 중요한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도 우리 주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사람의 중심을 보며 차별 없이 대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처럼 우리도 사람들을 대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차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느 흑인이 예배당 밖에 주저앉아서 울며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만나기 위해 이 예배당에 들어가고 싶지만, 제 피부색 때문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왜 저를 이렇게 낳으셨나요?” 이 때 예수님께서 조용히 다가와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울지 말거라. 걱정하지 말거라. 나는 너와 함께 있단다. 나도 너처럼 이 예배당에는 들어갈 수 없단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 교회에 오신다면 어떨까요? 우리는 예수님을 어떠한 태도로 맞이할까요? 정말 정성을 다해서 진심으로 환영하여 봉사하지 않겠습니까? 주님께 제일 좋은 자리로 안내하며, 식사할 때도 제일 좋은 것을 드리며, 혹시 불편하지 않을까 유심히 살피며 최고의 예우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 교회에 직접 오시지 않습니다. 대신 다른 모습으로 오십니다.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 대해서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형제, 자매를 대하는 것이 바로 주님을 대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차별하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형제를, 그리고 자매를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도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차별하지 않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당신의 모든 말씀과 뜻을 오늘 우리가 듣고 행하며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사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우리 스스로를 갈고 닦고 또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겠습니다. 믿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이 험난한 세상에서 승리하시게 하실 주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이 모든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