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강해 13) 행함이 없는 믿음 (수요기도회 20230405)
성경본문: 야고보서 2:14-19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설교: 행함이 없는 믿음
베스트셀러 ‘마시멜로 이야기’의 앞부분에 소개된 글입니다.
햇살 뜨거운 어느 여름날 오후, 개구리 세 마리가 나뭇잎에 올라탄 채 유유히 강물에 떠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나뭇잎이 강 중간쯤 이르렀을 때 그 중 한 마리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결심했다는 듯 단호하게 외쳤습니다.
“너무 더워, 난 물속으로 뛰어들 거야!”
다른 개구리들은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자, 이제 나뭇잎에는 몇 마리의 개구리가 남았을까요?
“두 마리요!”
질문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 있는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틀렸습니다. 나뭇잎 위에는 여전히 개구리 세 마리가 남아 있었습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뛰어 들겠다는 결심과 정말 결단하며 뛰어드는 실천은 전혀 다른 차원이기 때문입니다.
녀석이 정말 물속으로 뛰어들지, 또는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 다시 앉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늘 그렇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뛰어들겠노라 큰소리만 치는 개구리에 불과한지도 모릅니다.
믿음에도 마찬가지 원리가 적용됩니다. 말씀을 통해 주신 약속을 붙잡고 믿음의 발자국을 내디딜 때에야 비로소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가 무너지는 사건은 모세가 지팡이를 들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마지막 일곱 바퀴를 다 돌고 났을 때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오늘 야고보 사도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거이라” (약 2:17)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진정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14절의 말씀입니다.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신앙생활에 있어 중요하고도 어려운 것은 균형과 조화입니다. 오늘 본문은 행함과 믿음에 대해 이야기 하는데 여기서 ‘믿음’만 강조하면 무율법주의자 같이 되고, ‘행함’만을 강조하면 율법주의자 같이 치우치게 됩니다. 야고보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하며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야고보가 가르치는 신앙은 추상적이지 않고, 매우 구체적이며 확고합니다. 야고보는 믿음 있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다면 그것은 ‘유익’이 없다고 합니다. 야고보가 던지는 질문은 ‘행함이 없는 믿음이 어떤 유익이 있는가?’ 입니다.
야고보는 믿음 자체를 문제 삼고 있지 않습니다. 믿음이 있다면 그것을 통해 자신에게 혹은 타인에게 어떤 유익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로서 믿음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 그리고 구원 받은 성도들은 믿음을 가지고 매일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성도의 삶에서는 믿음이 드러나야 합니다. 만일 주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 주변의 사람들은 그가 성도인 줄 모를 정도로 동화되어 살아간다면 그것은 진정한 성도인지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기에 실질적인 행동이 수반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씨앗을 심었으면 싹이 나아 하고, 열매를 맺어야 유익이 있습니다. 여기서 야고보는 믿음과 행함 그리고 유익에 대해 구체적인 예시를 소개합니다.
15-16절의 말씀입니다.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야고보는 남녀를 다 포함하는 ‘형제’라는 단어만 사용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형제와 자매를 모두 포함시킵니다. 이것은 그의 사회적 관심을 보여주며, 당시 사회에서 여성들은 종종 차별을 당하고, 보호가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특히 여성의 경우 아버지나 남편의 공급과 보호가 없다면 매우 궁핍한 삶을 살았습니다. 본문의 ‘헐벗다’라는 단어는 옷을 아무것도 입지 않았거나, 제대로 입을 형편이 되지 않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일용할 양식’이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의 흔적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사람들은 먹을 것과 입을 것에 대해 궁핍한 상황이었습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궁핍한 사람을 돌보는 것, 차별하여 대하지 않는 것, 겸손한 것, 말하기를 더디하는 것 등과 같은 사랑의 행함을 의미합니다. 본질적으로 행함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변화된 삶입니다.
어느 교회 장로님이 한 분 있었습니다. 돈 많은 장로님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교회 일에는 그다지 충성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에 그에게 심장병이 찾아왔습니다. 심장이 마구 조여오는 듯한 고통이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그 소식을 듣고서 심방을 갔습니다. 목사님은 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장로님, 병세는 좀 어떠하십니까?"
그러자 그는 풀이 죽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조금 있다 원장선생님이 와보셔야 알겠습니다."
바로 그때 원장선생님이 간호사 한 사람을 데리고 병실로 들어왔습니다. 원장선생님은 장로님을 이리저리 진찰을 했습니다. 눈꺼풀을 한 번 뒤집어보고, 가슴에 청진기도 대보았습니다. 또 손으로 배도 꾹꾹 눌러보았습니다. 그러더니 원장선생님은 갑자기 간호사를 향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간호사, 빨리 가서 장의사를 불러 와!"
그는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직감적으로 이제 자기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원장선생님이 자기를 진찰한 뒤 갑자기 장의사를 불러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급하게 목사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는 목사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종이와 연필 좀 갖다주세요! 제가 하나님께 헌금을 바쳐야겠습니다."
평소에 하나님께 제대로 헌금을 드리지 못했던 것이 그의 마음에 걸렸던 것입니다. 이제 죽음이 바로 코앞에 닥치니까 겁이 덜컥 난 것입니다. 그는 목사님이 전해주는 종이와 연필을 받아 쥐고서 아라비아 숫자로 1자를 적고 동그라미를 그려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만원, 십만원, 백만원, 천만원, 일억, 그는 다시 한 번 숫자를 확인하고 난 뒤에 그 밑에 자기 이름을 적고서 사인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목사님에게 건네주면서 자기가 그 금액을 헌금으로 바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목사님은 그의 돌발적인 행동에 다소 놀라긴 했지만, 그래도 그의 뜻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감사의 인사를 한 뒤 그것을 받아 쥐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뒤에 문이 다시금 열리면서 밖에 나갔던 간호사가 젊은 의사 한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원장선생님은 젊은 의사를 보더니 야단쳤습니다.
"이봐, 장의사! 아니 진찰을 했으면 차트에 기록을 남겨야지. 이렇게 비워놓으면 어떻게 하나? 이 정도 같으면 퇴원을 시켜도 되잖아? 왜 환자를 이렇게 붙들어 놓고 고생을 시키나?"
알고 보니까 젊은 의사의 성이 장씨였습니다. 성이 장씨인 장 의사(醫師)를 불렀는데 죽고 난 뒤에 장례를 치르는 장의사(葬儀社)를 부른 줄 알고 지레 겁을 집어먹은 것입니다. 장로님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목사님을 찾아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죄송하지만 제가 조금 전에 써 드린 숫자에서 동그라미 하나만 좀 지워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헌금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드려야지 저 혼자 독차지해서야 되겠습니까? 제가 조금 양보하지요."
물론 우스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내게도 유익이 없고 다름 사람에게도 유익을 주지 못하는 무익한 믿음일 뿐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사도 야고보가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른 예시를 더하며 믿음과 행함에 대해 설명합니다. 18절의 말씀입니다.
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행함과 믿음에 대해 마치 토론을 하는 것처럼 어떤 사람의 대화를 이어갑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나타나지 않지만 야고보의 견해와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어떤 사람이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다”고 하면서 행함과 믿음이 분리된 것처럼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믿음과 행함은 별개로 드러날 수 없습니다. 야고보 역시 믿음과 행함을 분리하기 위해 논리를 펼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겠다”라고 말합니다. 야고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믿음은 우리 안에 있고, 그 믿음이 만들어내는 실질적인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성도로 살아가며 이제는 말뿐인 신앙에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며 우리의 믿음을 키워나가고 있다면 그것을 삶을 통해 드러내야 합니다. 쉬운 예로 화창한 날에 비가 오기를 간절히 기도했다면 그 사람의 행동은 무엇이어야 하겠습니까? 기도를 드렸으니 믿음으로만 밖으로 나가면 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비가 오기를 간절히 믿고 기도했다면 적어도 우산을 들고 나가는 행동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믿음을 각자의 삶에서 온전히 드러내야 합니다. 말뿐인 성도가 아닌 말씀대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야 합니다. 언행일치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었을 때 주님께 그리고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 모습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19절에서 다음과 같이 마무리합니다.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은 신명기 6장 4절에서도 나오는 유대교의 기본 가르침입니다. 야고보는 구약의 쉐마에서 나오는 정통 교리를 기계적으로, 지식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에게 “잘하는도다”라고 풍자하듯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것은 귀신들도 믿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귀신들이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을 믿고 하는 행동이 있습니다. 귀신들은 한 분이신 하나님을 대면할 때 떨게 됩니다. ‘떨다’라는 단어는 몸서리 치는 것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을 믿고, 믿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떠는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성도가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을 믿는다면 그것을 지식적으로 혹은 기계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귀신이 하나님 앞에 떨었던 행동을 한 것처럼 우리에게도 믿음에 이은 행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믿음에 대한 행함이 필요합니다. 한 분이신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물과 피를 쏟으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을 믿는 우리는 믿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의 믿음을 행함으로 하나님께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야 합니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실 때 기도와 말씀 묵상으로 끝내지 마시고, 삶에서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 말뿐인 신앙으로 살아 갔다면 이제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이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을 믿는 믿음을 삶 속에서 보이도록 연약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고, 주변에 섬겨야 하는 사람들을 몸과 마음을 다해 섬기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