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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강해 14) 온유와 두려움으로 (수요기도회 20231122)

온누리선교 2023. 11. 22. 06:54

 

본문: 베드로전서 3:13-16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설교: 온유와 두려움으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피타고라스의 제자 한 사람이 어느 날 가게에서 신발을 한 켤레 사고 난 후 주인에게 돈은 내일 주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이 제자가 돈을 들고 찾아가니 주인이 죽어 있었습니다. 그는 신발을 공짜로 갖게 되었다고 속으로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기쁨은 잠깐, 양심에 걸려 매일 매일 고통 속에 보내야 했습니다. 그렇게 좋아보이던 신발이 흉측한 가시같았습니다. 결국 그는 돈을 들고 다른 사람이 주인이 된 그 가게를 찾아가 말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가 죽었지만 제게는 살아 있었습니다.

또 프랑스의 철학자 루소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양심! 신성한 본능이여, 하늘의 소리요, 지성과 자유의 안내자, 선악에 대한 심판자, 인간 본능의 우수성과 도덕성의 근본, 그대가 존재하지 않으면 단지 규율 없는 모성과 원리없는 이성의 도움을 빌려서 잘못만을 저지르는 특권을 느낄 뿐이며 그 때는 누구나 짐승일 따름이다.

 

사람에게는 양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양심은 우리가 어떤 나쁜 행동을 했을 때 느끼게 되는 마음의 고통이며, 그것은 사람이 개발한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따라서 양심은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바르게 제시해 줍니다. 그러나 양심이 죄에 가리워지게 되면 양심은 그 기능을 상실해 버립니다. 양심은 해시계와 같다고 합니다. 해시계는 햇빛이 있어야 바른 시간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양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양심은 성경 말씀이라는 밝은 빛을 받음으로 비로소 올바르게 작동할 수 있습니다. 목적만 선하다면 수단이야 어떠하든 상관없다고 말하는 상황 윤리가 판을 치고 있는 요즘, 우리는 더욱 더 성경 말씀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할 강한 필요성을 느낍니다.

오늘 저는 본문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선을 위해 고난을 당할 때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를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기 바랍니다.

 

13~14절의 말씀 함께 보겠습니다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먼저, 의인에게 고난은 이미 예견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을 마치시고 겟세마네로 가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15:18). 의인에게 고난은 당연하고 자연스럽습니다(벧전 4:12).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때 이 세상의 주관자(사탄)로부터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불순종의 자녀들 속에서 역사하는 영입니다. 그들이 이 세상의 풍조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흐름과 방향은 하나님을 점점 대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세상으로부터 당하는 핍박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그러한 우리가 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할 때생각해야 할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선을 행한다고 무조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13). 선을 열심히 행할 때 아무도 너희를 해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적인 약속은 아닙니다. 항상 그렇게 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우리 속담 중에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가 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자동차 사고가 났을 때 친절하게 말한다고 늘 상대방도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가 선을 열심히 행할 때 아무도 해하지 않는다는 것은, 일반적인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앞에서 선을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왔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사회 제도, 법과 규율을 잘 지킵니다. 직장 상사에게도 주님께 하듯 충성스럽고 비방하지 않습니다. 가정에서는 아내를 귀하게 여깁니다. 교회에서는 겸손히 성도를 사랑하고 한 마음을 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그에게 선을 행합니다. 이런 사람이라면 누가 그에게 악으로 대할까요? 그리스도인들이 선을 열심히 행한다면 고난을 적게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우리가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들이 사실 상 우리가 악을 행해서 당하는 것들도 많다는 것입니다. 과속을 하면 벌금을 물게 됩니다. 게으르거나 불성실하면 상사의 질타를 당할 수 있고 직업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가정에서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지 못하면 갈등이 찾아옵니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을 때 그로 인해 관계가 깨지게 됩니다. 이러한 모든 문제는 우리가 선을 행했다면 겪지 않아도 되는 어려움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선을 행해야 할까요?

15~16절의 말씀입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어느 목사님이 독일에서 부흥회를 인도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 목사님을 안내하던 집사가 차를 몰면서 목사님, 바로 저 집 대문 있잖아요. 언젠가 오밤중에 차로 대문을 받아 부서졌는데 아무도 보지 않았기에 천만 다행이었지요. 운전이 서툴렀던 때인데....작은 농촌의 마을을 지나면서 하는 말입니다.

마을이 수백 년 되었기 때문에 길이 꼬불꼬불하여 운전하는 사람들에게는 힘든 길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 대문만 보면 늘 생각이 나지요. 주인이 어딜 갔는지 인적도 없고 해서 무사했죠. 참으로 할렐루야지요.목사님은 이 이야기를 듣고 꺼림직한 마음이 들어 집사님, 안 들킨 것이 어째서 할렐루야입니까?하고 잘못된 점을 지적해 주었다고 합니다. 남의 집 대문을 부수어 놓고 들키지 않은 것이 할렐루야라니 신앙양심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습니다. 또 목사 중에는 교통법규를 어겨 교통순경에게 딱지를 떼게 되었을 때 자기 신분이 목사라는 것을 밝히고 눈감아 달라고 불의한 부탁을 하는 한심한 사람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인들이 생활 속에서 잘못과 실수를 범하고도 윤리적 가책을 느끼지 않고 입버릇처럼 할렐루야은혜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나는 주변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더 거짓말을 잘하고 더욱 엉터리라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찬송가를 부르면서 가짜꿀을 만드는 부모 때문에 교회를 멀리했다는 어떤 분의 간증이 귀에 맴돕니다. 실로 믿는 자는 더욱 조심하여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24:16)

믿음과 착한 양심은 기차의 두 레일과 같고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믿음이라는 선로와 양심이라는 선로가 있어야 신앙의 기차는 잘 달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믿음은 있지만 양심은 버렸다고 합니다.

신앙의 양심이 그만 화인을 맞아 버렸습니다. 양심이 마비되면 조금도 가책이 생기지 않습니다. 양심이 마비되었기에 짐승과 같이 인간을 죽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비인간화라고 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양심을 마비시키는 것일까요?

첫째, 인간의 물욕이 양심을 마비시킵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습니다.(1:15) 황금만능주의가 사람의 눈을 어둡게 만들고 양심을 마비시킵니다. 양심을 파는 사람은 끝이 불행합니다. 말세에 사는 그리스도인은 물욕으로 인해 양심이 화인을 맞고 끝내 믿음을 잃게 될 수도 있으므로 스스로 조심해야 합니다.

둘째, 인간의 정욕이 양심을 마비시킵니다. 세상으로부터 오는 육신의 정욕과 이 세상의 자랑으로 양심이 마비됩니다.(요일2:15-16) 삼손은 정욕에 눈이 어두워 눈이 뽑히는 참극을 당했습니다. 마지막 때에 정욕으로 눈이 어두워지면 안됩니다. 특히 크리스천은 눈을 즐겁게 하는 데 몰두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 시간에 성경을 보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마지막 보루는 교회입니다. 공의와 사랑이 넘치는 사회를 만드는 책임은 교회에 있습니다. 세상이 다 썩어 부정부패가 판을 쳐도 교회만은 정의를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양심이 바로 서면 우리 사회도 변화될 것입니다. 양심을 정욕으로부터 지켜야 합니다.

셋째, 사탄의 역사가 인간 양심을 마비시킵니다.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는 사탄에게 내어준 바 되었다고 합니다.(딤전1:20) 사탄은 양심부터 마비시킵니다. 사람은 천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짐승도 아닌 중간자라고 합니다. 양심이 마비되면 짐승이 되기 때문입니다. 최후 발악을 하고 있는 사탄은 여러 가지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곳에서 흉악한 범죄가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사탄은 말씀과 기도로 물리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말씀과 기도와 성령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양심은 해시계와 같다고 합니다. 해시계는 햇빛이 있어야 바른 시간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양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양심은 성경 말씀이라는 밝은 빛을 받음으로 비로소 올바르게 작동을 할 수 있습니다. 목적만 선하다면 수단이야 어떠하든 상관없다고 말하는 상황 윤리가 판을 치고 있는 요즘, 우리는 더욱 더 성경 말씀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할 강한 필요성을 느낍니다.

우리가 선한 양심을 가질 때 어떤 일이 생겨날까요? 실추된 지도자의 권위가 회복됨으로써 모든 이웃으로부터 존경받고 사랑받게 됩니다.

한국에서 빛도없이 자신들의 자리에서 사할린 동포를 영구귀국시켜 편히 살 수 있도록 사랑의 집을 운영하는 교회도 있으며 백혈병환자의 치료를 위한 골수기증운동의 일환으로골수은행을 운영하는 교회도 있고, 북한에서 탈북한 분들을 돌보는 새터민 교회 그리고 다문화 가정을 돌보는 교회도 있습니다. 이런 선한 양심들이 모여서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온유와 두려움으로 선한 양심을 지키며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임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정직한 자를 기뻐하시는 주님,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마음을 갖게 하소서. 제 이익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저를 포기할 수 있는 믿음으로 성장하게 하소서. 배신과 음모로 가득한 세상에서도 예수님의 제자답게 정직하고 양심적으로 당당한 삶을 살게 하소서. 또한 내게 주신 소명을 기억하며 좁은 길을 기쁨으로 걷는 믿음을 허락해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