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3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설교: 영광의 관
이 세상에 영광을 싫어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영광이 고난의 언덕 너머에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에 영광은 모든 사람의 것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절망의 자유와 희망의 자유, 이 두 가지 자유는 사람이면 누구나 향유하는 자유입니다. 긍정할 자유와 부정할 자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두 가지 자유와 그 선택 다음에 오는 결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절망과 부정의 자유는 전락이며, 희망과 긍정의 자유는 발전으로 통합니다. 그것은 신앙과 불신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구원과 죽음에로 통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는 밝은 곳도 있고, 어두운 곳도 있습니다. 어느 곳을 향하여, 어느 곳을 바라보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인생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바람이 몹시 부는 어느 날 바다에 거센 풍랑이 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날도 해녀는 바다에 뛰어들어 해물을 캐어내고 있었습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사람이 물어 보았습니다. “이렇게 바람이 거센 날도 바다에 들어갑니까?” 해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풍랑이 바다에 있지, 바다 속에도 있나요?” 이렇듯 신앙의 깊은 세계에 들어가면 삶의 껍질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나 문제들이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고난의 언덕 너머에 있을 영광을 믿고 바라는 사람들은 오늘의 풍랑과 시련을 견디어낼 수 있습니다. 절망만 보면 절망합니다.
그러므로 장로들에게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많은 고난 가운데에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양들을 어떠한 자세로 보호하고 양육해야 할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도 이 말씀이 들려질 때 장로들 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 유익을 줄 것이라 믿습니다.
1절의 말씀입니다.
1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왜 갑자기 장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까요? 본문이 “그러므로”로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앞의 내용과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은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많은 고난이 있으나 살아있는 소망을 가지고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해서 장차 믿지 않는 자들에게 미친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되었습니다(겔 6).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마땅히 자신을 거룩하게 해야 하는데 그들 중 장로들에 대해 먼저 언급한 것입니다. 고난의 삶 가운데 장로들이 어떻게 사는 것이 합당한지, 어떻게 자신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소아시아 지역에는 여러 교회가 있었고 각 교회들마다 복수의 장로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이라는 구절로 보아 이들은 교회의 지체 중에 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절에서는 “장로”라고 되어 있고 2절에서는 “양 무리를 치는 자”라고 말하는데 이는 ‘감독’을 말하는 것입니다. 장로이든 감독이든 같은 대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교회마다 호칭에 대해 이견들이 있는데 서신서들을 보면 장로, 감독, 목사가 모두 동일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나는 하나님의 사도이고, 그 중에서도 특별한 수제자였으니 내 말을 들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는 함께 장로된 자요”라고 말합니다. 자신 역시 동일한 사람이니 그 어려움을 알고 겪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참으로 겸손한 표현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그는 장로에 대해 권고하면서 자신에 대해 다시 소개합니다. 당시 장로들에게는 고난 중에서 살아있는 소망이 필요했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나도 예수 그리스도가 당한 고난을 지켜봤다, 그분이 잃어버린 양을 돌보시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의 권세로 말씀을 전파했지만 많은 이들이 굳은 마음으로 거절했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으셨고 배고프셨고 피곤한 중에 양을 이끄셨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께 등을 돌리고 결국 그분을 죽였다, 나는 그 모든 것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영광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는 변화산에서 변화하신 그리스도의 영광,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 승천하시고 돌아오시리라는 약속을 보았습니다. 그 영광에 다시 참여할 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 ‘나도 당신들과 동일한 장로입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당한 모든 고난을 목격했고 그분이 입으신 영광을 목격한 사람입니다. 그분의 모든 일을 따라가는데 있어서 이 권고의 말을 잘 들이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권고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2~3절의 말씀입니다.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3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사도 베드로는 교회 지도자들이 교회를 섬길 때 가져야 하는 기본적인 마음자세에 대하여 권면합니다.
먼저 2절에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에서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명을 맡기실 때 주신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교회를 맡기실 때 “내 양을 치라”고 거듭 강조하여 말씀하셨습니다(요 21장).
그때 베드로는 자기에게 맡겨진 성도들은 자기의 양이 아니라 예수님의 양이며, 자신에게는 오직 그 양들을 돌보는 책임만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양떼를 돌보는 임무를 교회 지도자에게 맡기셨지만 그러나 그 양에 대한 소유권까지 교회 지도자에게 이전해 주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교회 지도자는 예수께서 맡기신 양을 치는 ‘청지기 목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목자들로서 역할을 하는 장로들이 해야할 것은 무엇입니까?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3절)
이 말씀은 초등학생들도 이해할 만한 그러한 권면입니다.
그런데도 사도 베드로가 이러한 권면을 하고 있는 것은 이것이 잘 지켜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교회를 섬길 때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하는 마음을 일관성 있게 유지하는 것은 정말 마땅한 일이지만, 그러나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서로 의견이 대립될 때, 자신의 이익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상대의 말을 경청하고 섬기는 자세를 유지하는 것도 웬만한 결단으로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면 사도 베드로의 이 권면에 ‘아멘!’하며 기쁨으로 성도들을 섬길 수 있게 될까요?
이것은 교회지도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도 주어진 가장 큰 과제일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베드로와의 대화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양떼를 맡기실 때 무엇을 물어보셨습니까? 세 번이나 물어보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할 때 마다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라, 먹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참다운 교회 지도자가 되는 가장 기본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 양 무리를 치되 자원함으로 하게 되고, 기꺼이 하게 되고, 양 무리의 본이 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는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예수님께서 맡기신 일을 억지로 하거나, 더러운 이익과 권력욕 등을 채우려는 악한 마음을 품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볼 때, 양 무리를 억지로 치고, 더러운 이득을 위해 일하고, 주장하는 자세를 갖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기 보다는 다른 불순한 것들이 동기와 목적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교회에 들어와 교회 지도자가 되게 되면 복음의 순수성은 훼손되고, 교회는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직분을 받고 교회를 섬김에 있어서 지금 맡고 있는 일의 동기와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늘 스스로에게 정직하게 묻고 살펴야 합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여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교회와 이웃을 위해 기쁨으로 헌신하는 청지기의 삶을 살고 있는지 항상 살피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이런 삶을 살게 되는 것에서 어떠한 축복이 오는지 4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장로들이 성실하게 일할 때, 하나님의 양들을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본이 되는 삶으로 가르칠 때, 목자장이 되신 분께서 영광의 주님으로 다시 오실 때 시들지 않는 관을 얻으리라고 말씀합니다. 당시에는 풀이나 꽃으로 만들어진 면류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들어버립니다. 당시 전투에서 싸워 공을 세운 사람에게 황금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금도 없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꽃도 풀도 황금도,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세월이 흘러 가면서 시들고 쇠하고 썩어집니다. 그러나 장로들이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섬길 때 전혀 사라지지 않는 관을 얻으리라고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4장에는 어린양 앞에 장로들이 영광의 관을 쓰고 예수님께 예배 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순전한 마음을 가지고 일했던 사람들에게 이러한 보상이 있을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높은 신분으로 삼으실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든 영광과 축복을 이어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지금 당장 상급이 주어지지 않는다 하여 낙심하거나 불평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또한 불순한 동기와 방법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하는 어리석음도 버려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사랑으로 열매가 있든지 없든지, 받은 사명에 따라 최선을 다함으로써 의로운 재판장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영원히 썩지 않을 생명의 기업과 영광의 관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참 성도가 되고 온전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어떤 훈련이나 신앙적인 결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면 되는 줄 오늘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면 성령께서 베드로 사도의 삶을 인도하여 주셨듯이 우리의 삶도 친히 인도해 주심을 믿습니다. 오늘 예수님과의 관계를 다시 한 번 깊이 돌아보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