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삼서강해 4)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수요기도회 20250226)
성경본문: 요한 3서 1:11-15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데메드리오는 뭇 사람에게도, 진리에게서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언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언이 참된 줄을 아느니라
내가 네게 쓸 것이 많으나 먹과 붓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속히 보기를 바라노니 또한 우리가 대면하여 말하리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여러 친구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너는 친구들의 이름을 들어 문안하라
설교: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빌 하이벨스의 ‘인생경영’ 중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착한 일을 하면 왜 기분이 좋아질까?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본질상 선(善)이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처럼 우리에게도 선행을 할 수 있는 커다란 역량-높은 선의 잠재력-이 있기에, 우리는 자연히 선행에 기쁨을 느낀다. 우리가 그 선의 잠재력을 실행에 옮길 때마다 하나님은 웃으시며 말씀하신다.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네 모습이다.” 그 웃음과 말씀이 우리에게는 자신의 존재 및 행위에 대한 내면의 인정으로 느껴진다.
빛이라 칭함을 받은 우리 안에는 착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도움을 청하는 손길을 만날 때 우리 안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외면치 마십시오. 당신을 통해 어둠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빛이 임할 것입니다.
오늘 마지막으로 요한 삼서의 강해를 마치면서 두 명의 사도 요한이 이름을 거론한 인물들에 대해 봤습니다. “가이오와 디오드레베” 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서로 상반되는 행실로 평가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마지막으로 ‘데메드리오’의 행실을 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1-12절의 말씀입니다.
11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12 데메드리오는 뭇 사람에게도, 진리에게서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언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언이 참된 줄을 아느니라
세상에는 선한 것과 악한 것이 공존합니다. 물론 악한 것이 없으면 좋겠지만, 인류 역사에 악한 것이 없었을 때는 없었습니다. 인간에게 죄성이 있는 한, 그리고 죄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을 유혹하는 사탄이 있는 한 악한 것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가이오가 속한 교회는 으뜸이 되려고 하는 ‘디오드레베’로 인해 교회가 교회답지 못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교회 내 악한 것이 확산되지 않도록 악의 진원지인 ‘디오드레베’를 적절하게 조치하기를 원했습니다. 가이오가 속한 교회는 ‘디오드레베’로 인해 악한 것이 퍼져나갈 위험에 놓여있었기에 사도 요한은 ‘악한 것을 본받지 말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악한 것을 본받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말합니다.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이 문장 구조는 요한 서신에서 반복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자가 누구인지를 언급할 때 사용했던 것과 유사한 구조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이듯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속하여 선을 행하는 사람은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사람입니다. 역으로 선을 행하지 못하는 사람,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데메드리오’에 대해 말합니다. 언급한 이유는 둘째 인물 ‘디오드레베’와 대조적인 인물이기 때문이었겠지만, 가이오가 속한 교회에 선한 일을 한 사람이 ‘데메드리오’ 밖에 없었겠습니까? ‘가이오’도 있었고 다른 성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데메드리오’를 언급한 이유는 10절의 ‘형제들을 맞아들이고자 한 자’로서, 디오드레베에 의해 교회에서 쫓겨난 인물이었기 때문으로 추론할 수 있습니다.
‘데메드리오’는 사도 요한을 포함해 가이오 그리고 성도들을 뜻하는 모든 사람들뿐만 아니라 진리 되신 주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데메드리오’를 인정해 주지 않았던 사람은 누구입니까? 으뜸이 되려고 한 ‘디오드레베’이고, 그의 추종자들일 것입니다. 이들의 행태를 보면, 불의한 자란 진리 되신 주님과 성도들이 인정해 주는 사람을 괴롭히는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위해 핍박받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상급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 웨슬레 목사를 아십니까? 그와 그의 동생 찰스와 조지 휫필드는 영국에서의 피비린내 나는 혁명을 막은 사람들로 현대 역사학자들에 의해 평가되고 있습니다.
웨슬레의 설교는 영국의 거리와 뒷골목의 압제를 받으며 살고 있던 사람에게 사람들에게 소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당시의 성직자들은 그를 이단이라 불렀고 때로는 교회 밖으로 내쫓기도 했습니다. 그에 대한 온갖 소문이 나도는가 하면 그는 온갖 죄목이 붙여진 고소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는 수십 번이나 그를 반대해서 일어난 폭도들에 의해서 죽을 뻔하였습니다. 웨슬레는 이와 같은 것을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즉 자신이 그 사역 안에서 하나님을 순종하고 있는 것의 증거로 받아들였습니다. 하루는 웨슬레가 말을 타고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즈음의 지난3일 동안, 어느 한 사람도 벽돌이나 계란을 자신에게 던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때 그는 그의 말을 멈추고 내려와 무릎을 꿇고 엎드려 '내가 죄를 짓고 타락한 것은 아닌가'하고 부르짖으며 하나님께 혹시 그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보여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반대쪽 울타리 한쪽 끝에서 그의 기도를 듣고 있던 한 사나이가 그가 바로 웨슬레임을 알아보고는 "잘됐다. 저 감리교 목사를 내가 이번에는 손 좀 봐야겠군" 하고는 벽돌 하나를 집어 그에게 던졌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살짝 빗나갔습니다. 그때 웨슬레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 괜찮았군요. 제가 아직도 당신의 임재하심 가운데 있었군요"라며 펄쩍 뛰며 좋아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 님을 믿고 전한다고 당신에게 욕하고 핍박을 당한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만일 모든 사람이 당신을 좋아한다고 해서 당신이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따르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는 순교자의 피와 고난의 박해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흰 옷을 입은 큰 무리를 설명할 때 "이는 큰 환란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7:14)하였고, 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0-12)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핍박을 당하지 아니하면 그것이 오히려 기이한 것입니다. 고난과 역경을 거쳐야 하늘의 시민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그의 서신을 맺습니다. 13-15절의 말씀입니다.
13 내가 네게 쓸 것이 많으나 먹과 붓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14 속히 보기를 바라노니 또한 우리가 대면하여 말하리라
14 속히 보기를 바라노니 또한 우리가 대면하여 말하리라
15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여러 친구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너는 친구들의 이름을 들어 문안하라
붓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털이 달린 것이 아니라 갈대 종류 중 잘 꺾이지 않는 갈대종의 끝을 뾰족하게 만든 필기도구를 가리킵니다. 먹과 붓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한다는 말은 편지로 마음을 전하기보다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말입니다.
속히 보기를 바란다는 것은 상대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상대에 대한 신뢰를 표현한 말이기도 합니다. 신뢰 관계가 없는 사람을 속히 보기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특히 사도 요한이 나이가 80대 또는 90대로서 거동이 쉽지 않았음을 고려해 본다면, 가이오에 대한 신뢰가 컸음을 알 수 있고, 가이오가 속한 교회의 문제를 빨리 해결하고자 하는 노사도의 열정을 알 수 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 대유행으로 인해 대면 모임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서로 속히 보기를 바라고 있지 않습니까? 특히 사도 요한처럼 연세가 많으신 성도님들이, 거동이 쉽지 않으심에도 불구하고 성도의 교제를 바라는 열정을 가지고 있으십니다. 모든 성도님들에게 성도의 교제를 바라는 열정이 식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편지 끝에 사도 요한은 자신과 함께 있는 동역자들이 가이오에게 문안함을 알리고 있습니다. 또한 가이오에게도 문안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바울 서신처럼 요한 서신에서도 성도들 간 문안의 중요성을 배우게 됩니다. 주님 안에서 성도들 간의 문안은 주님과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교회의 지체로서 해야 할 의무이자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은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교우님들께서는 구역에서 구역원을 자주 문안하시고 봉사부서에서 봉사자를 자주 문안하심으로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사도 요한은 짧은 축도로 편지를 마무리합니다.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평강은 헬라어 ‘에이레네’를 번역한 단어인데 히브리어로는 ‘샬롬’에 해당합니다. 주님께서 공생애 기간 평강을 강조하셨습니다. 주님을 직접 목격하고 주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사도 요한이 평강으로 편지 인사를 마무리했습니다. 우리는 힘든 시기일수록 성도들 간 평강을 축복하십니다. 축복하는 그 사람에게도 그 평강이 임할 것입니다. 성도와 가정에 평강이 있고, 교회에 평강이 있고, 사회와 국가에 평강이 임하길 원합니다.
평강을 누리기 위하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시길’ 원합니다. 사도 요한의 이 권면은 정의와 공의를 행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선한 것을 본받음으로 정의와 공의를 행할 때 우리의 삶의 영역에 악한 것은 사라질 것이고 선한 것이 자리를 잡을 수 있습니다. 선한 것을 행하는 곳에 평강이 있습니다. 오늘 하루 주님께서 주시는 평강을 누리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저희에게 본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따라 선을 행할 수 있게 해 주시고 하나님께 속할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섬김을 받으러 오시지 않고 섬기러 오셨는데, 교회에서 디오드레베처럼 으뜸이 되려고 하는 사람으로 인해 악한 것이 퍼져나가지 않도록 막아 주시옵소서. 선함으로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가이오와 데메드리오처럼 모든 사람과 주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되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성도들에게 평강을 축복하고 문안하는 일을 기쁨으로 삼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