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강해 6)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수요기도회 20250618)
성경말씀: 요한계시록 2:12-17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설교: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타협과 양보는 이 시대의 핵심가치입니다. 무엇이든 대화를 통해 서로 이해하고 양보해서 타협하는 것, 민주사회에서 더불어 사는 삶의 중요한 소양이자 성숙함의 상징입니다.
그러다보니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선언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오직 믿음, 절대 진리’를 주장하는 우리 기독교와 기독교 신앙이 이와 같은 세상에선 불편한 종교, 불편한 진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가치충돌 때문에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갈팡질팡하고, 또한 세상으로부터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태(世態)에서 타협하지 않고 ‘오직 믿음, 절대 진리’에 기초한 우리의 신앙을 지키는 것은 실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설득에 빨리 항복하면 복이지만 끝까지 거부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은 항복하면서도 큰 화를 당하게 됩니다. 바로에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도록 이스라엘을 보내라’고 바로를 수차례 설득하셨습니다. 하지만 바로는 계속 거절했고 결국 하나님은 건국이후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열 가지 재앙으로 이집트를 심판하셨고, 결국 바로는 이 재앙들을 다 겪은 후에야 비로소 항복하고 이스라엘을 내보냈습니다. 물론 그와 그의 나라는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협해서는 안됩니다. 오늘 버가모 교회를 통해 오직 예수의 삶을 사는 그 가치를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2-13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12.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13.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주님께서 버가모 교회에 심판하시는 주님의 모습으로, 싸우시는 주님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일까요? 이것은 버가모 교회를 통해 우리가 받을 교훈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안디바’는 당시, 버가모교회의 유명한 감독으로 황제숭배를 거절하고 순교당한 교부로 알려져 오고 있습니다. ‘안디바’를 체포한 로마정부는 그를 큰 무쇠 솥에 집어넣고 예수를 부인하라고 강요했습니다. 한번이라도 모른다고 하면 살려주겠다고 했습니다. ‘안디바’가 끝까지 버티자 무쇠 솥에 불을 지펴 삶아 죽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주의 이름을 굳게 잡았다”는 말씀은 이 같은 잔인한 박해 가운데에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안디바와 함께 믿음을 굳게 지켰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모든 박해를 이겨낸 믿음의 교회, 버가모에 사탄은 새로운 무기를 들고 나타납니다. 바로 유혹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만 이 유혹에 빠지고 맙니다. 그 잔인한 박해와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켜온 버가모교인들이 달콤한 유혹에 맥없이 무너져버린 것입니다.
사탄이 교회를 공격할 때 사용하는 무기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무기는 박해와 고난이고, 다른 하나는 유혹입니다. 사탄은 초대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 무자비하게 박해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박해하면 박해할수록 더 단단히 뭉쳤습니다. 박해로는 교회를 무너뜨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그 방법을 바꾸어서 물질과 쾌락으로, 유혹과 회유의 방법을 사용하게 되는데 그것이 적중하게 됩니다.
여러분, 누구든지,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목회자라할지라도, 이 세상 유혹의 함정에 한번 빠지게 되면 영적인 감각이 무뎌지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점점 더 깊이 쾌락과 음란, 또 어떤 사람은 인생무상, 허무, 절망의 깊은 늪에 빠져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구리를 삶을 때 끓는 물에 개구리를 넣으면 어떻게 됩니까? 개구리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난리가 날 것입니다. 그래서 개구리를 삶을 때 어떻게 하는가 하면, 찬물에 개구리를 담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불을 지핍니다. 그러면 개구리는 그대로 삶겨집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이 되는 것처럼 처음 작은 죄를 짓는 것이 어렵지, 한번 용납하게 되면 점점 더, 죄에 대한 감각이 둔해져서 결국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버가모교회의 형편이 그랬습니다. 처음 그들은 박해와 고난 앞에서 생명을 버리는 순교적인 정신으로 잘 싸웠습니다. 그러나 그 싸움이 길어지자 주위 사람들이 충고를 합니다. “너무 강하면 부러집니다. 좋은 게 좋은 겁니다, 왜 당신만 별나게 믿습니까” 마치 위하는 것처럼 위로하며 회유하기 시작합니다. 그 유혹과 설득이 끈질기게 계속되자 그들은 그만 세속적인 유혹에 그만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단들이 버가모교회에 슬그머니 들어와 그들로 인해 교회가 서서히 부패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러한 부패하고 상한 버가모교회에게 회개하라 권면하시되, 만일 듣지 않을 시엔 심판받게 될 것임을 경고하시기 위해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로 나타신 것입니다.
버가모교회를 향해 예수님께서 첫 말문을 여신 것은 “네가 어디에 사는 지를 내가 아노니”입니다. 예수님은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네 행위를 안다’고 말씀하셨고, 서머나교회를 향하여 ‘네 환난을 안다’고 말씀하셨고, 오늘 버가모교회를 향하여 ‘네가 어디서 사는지 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은 아예 우리의 머리털까지 다 세고 계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을 모든 사람들이 다 좋아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이 너무나도 좋겠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사람은 그 하나님이 무섭고 두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어떤 이들에게는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이 기쁨과 위로가 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무서운 심판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우리의 것을 아시는 주님이 위로가 됩니까? 아니면 두려움이 됩니까? 위로와 기쁨이 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14~16절의 말씀 이어서 보겠습니다.
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예수님께서 안디바의 믿음에 대해서 칭찬하셨습니다. 그런데 남아 있는 버가모 교인들에 대해서 책망을 하십니다.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민수기에 발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가까이 갈 때에, 모압 땅을 지나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접근하는 모습을 보고 모압의 왕 발락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용한 주술가, 선지자라고 일컬어지는 발람을 고용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막으셨습니다. 발락왕이 제단을 쌓고, 발람에게 그 제단에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발람이 저주를 하지 못하게 하시고, 도리어 이스라엘을 축복하게 하셨습니다. 3번씩이나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니 발락왕이 화가 나서 더 이상 발람이 저주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입니다. 발람도 사실 이스라엘을 저주하고 싶었습니다.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할 수만 있다면 발람왕이 그 대가로 재물과 명예를 준다고 했으니,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아쉬웠겠습니까?
그런데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발락왕에게 이스라엘을 공격할 방법을 알려 줍니다.
“왕이여,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않고도 그들에게 타격을 입힐 방도가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죄를 짓도록 해서 스스로 해함을 받게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발람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행음하고, 우상에게 절하게 만들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줍니다.
발람의 말을 듣고 발락왕이 우상의 신전에서 일하는 모압의 창기들을 동원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이스라엘 진영으로 보내서 남자들을 유혹합니다. 그랬더니 남자들이 모압 여인들의 유혹에 넘어왔습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이 이방여인과 행음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남자들이, 모압의 여인들이 우상을 섬길 때에 함께 가서 우상에게 절을 하고, 음식도 먹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보시고 그냥 계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그날에 염병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심판하셨는데 죽은 사람이 이만 사천명이나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일로 영적으로 커다란 타격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발람과 같은 가르침이 니골라 당의 교훈입니다. 그 당시 영지주의 사상이 세상에 유행했었는데 이것이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영지주의는 영과 육을 구분해서 영은 선한 것이고, 육은 악한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을 때에 영은 구원을 받지만 육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한 가르침이 교회안에 들어오니까 사람들이 자신들의 육신을 어떻게 해야할지를 혼란스러워했습니다. 어떤 부류의 사람은 육신은 악하기 때문에 육신에 고통을 주어야 한다는 부류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이 금욕주의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어차피 육신은 악하고 썩어질 존재이니, 육신이 원하는 대로 마음껏 즐기며 살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쾌락주의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느 것을 더욱 좋아하겠습니까? 쾌락주의입니다. 그래서 버가모 교인중에 이러한 사상에 빠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행음을 하고, 우상에게 절하는 일들도 합니다. 세상 밖에서 일어나는 죄악된 일들이 교회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에 대한 심각함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우상을 섬기고 행음을 하고 있으니, 교회안에서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는 것이 교회인데, 버가모 교회는 세상으로 인해서 그 믿음이 변질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7절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우리가 이 말씀을 귀히 여기고 우리 삶 속에서 타협하지 않는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반드시 기억하시며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희 하나님 아버지
버가모 교회의 교훈을 돌아볼 때, 우리에게 있어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니골라당은 무엇입니까? 주님, 귀 있는 자들에게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을 잘 듣게 하셔서, 이기는 자가 되어 예수님이 구원하심과 영원한 천국소망을 소유하는 우리 성도님들이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