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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풍병자의 네친구 (막 2:1~7 주일예배 20190818)

by 온누리선교 2019. 8. 14.

성경본문: 마가복음 2: 1~7


1.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5.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6.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7.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설교 : 중풍병자의 네 친구

 

전세계적으로 기독교인은 세계인구의 33%를 차지합니다. 70억 인구 중에 거의 21억명이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기독교인들이 다 한마음으로 믿을까요?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이 주일 귀한 시간을 내어 함께 예배 드리는 이 순간에도 다들 하나님 앞에 나오는 마음은 다를 것입니다.

찬송만 집중해서 부른다던지, 말씀만 열심히 읽는다던지, 몸은 이곳에 마음은 딴 곳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지금 이 순간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참으로 짧은 이야기지만 예수님 당시에도 이렇게 한마음으로 온전히 주님 앞에 나오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이란 동네의 한 집에 거하게 되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오셨다는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구름떼 같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찾아온 모든 사람들이 다 한결같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보려고 가버나움에 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에게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 주위의 무리들, 그리고 서기관들, 그리고 중풍병자의 네 친구들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우리는 과연 지금 어떤 모습을 주님을 섬기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1~2절의 말씀입니다.

1.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많은 사람이 모여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이 널리 퍼져 한번 구경이라도 하려고 모인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진짜로 알기 위해서가 아니고, 간절해서 온 것도 아닙니다. 그저 남이 가니까 같이 가서 구경이나 하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음식을 그냥 먹지 않습니다. 골라서 먹습니다. 곰탕을 먹고 싶으면 곰탕집으로 찾아갑니다. 그때 소문을 듣고 음식점으로 찾아갑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 할 때도 소문에 의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 교회는 설교를 잘 한다더라.”, “저 교회는 능력이 있다더라.” 이렇게 소문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이런 현상은 소문과 군중심리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이 많은 사람들을 따라다니는 군중심리에 의해서 움직이면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어디든지 찾아가시고, 역사하십니다.

또 이런 많은 사람들은 그저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왔기 때문에 예수님의 진짜 모습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구경꾼밖에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혹시나 하는 기대가 아닙니다. 믿음이란 확실하게 바라는 것입니다.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소망하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 정말 확실한 예가 있지 않습니까?

기적의 연못이라는 베데스다에 많은 병자들이 있었습니다. 이 병자들은 천사가 내려와 물을 동할 때 먼저 그 물에 들어가면 어떠한 병이라도 낫는다는 전설을 믿고 다들 그 근처에 있었습니다. 언제 천사가 내려올지도 모르는 그 이야기에 매달려 밤이 오나 낮이 오나 그 베데스다에 있었습니다. 거기에 38년된 중풍병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다가오시자, 자신을 천사가 와 물이 동할 때 데려가 줄 사람이 없다고 하소연하자, 예수님께서 일어나 걸어가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38년된 중풍병자는 병이 나아서 일어나 집으로 걸어갔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아무도 찾지 않고 도와주지도 않은 이 병자에게 오셔서 낫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부릴 수 있는 존재도 아니고, 멀리서 지켜보며 신기한 구경거리도 아니십니다. 실제하시고 능력이 있으시고 우리에게 직접 오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누구에게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말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보인 네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네 사람은 중풍병자 친구를 두고 있었습니다. 3~5절입니다.

3.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5.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의 가르침이 계속해서 있을 때, 네 사람이 침상 위에 누운 한 중풍병자를 침상 채로 메고 찾아왔습니다. 네 사람이 메고 온 것을 보면 이 환자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환자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문밖에까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환자를 주님께 데려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할 수 없이 계단을 통해서 평평한 지붕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지붕을 뚫어서 무리를 가르치시는 주님 앞으로 그 환자를 달아 내렸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한 것은 주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칠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마 그들에게 확신이 없었다면 이러한 비상식적인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이 하는 일을 보시고 그들에게 믿음이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믿음에 합당하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그 환자의 질병이 죄로 인해 생긴 것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서 먼저 그의 죄가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중풍병자를 향해서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5). 주님은 병을 치유하기 전에 먼저 죄의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당시에는 유대인의 율법상, 모든 질병은 죄 때문에 온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 죄용서함은 중풍병자 때문이 아니라 네 친구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죄용서와 함께 병을 낫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네 친구의 어떤 점이 과연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을까요?

 

첫째, 돌아서지 않는 결단입니다. 네 명의 친구는 중풍병으로 반신불수가 된 친구를 고치기 위해 침상채로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런데 그들의 바람이나 수고, 노력과는 달리 상황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너무 많은 사람으로 인해 문 앞에도 들어갈 수 없었던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망연자실 좌절하거나 돌아가야 하는 겁니다. 아니면 얼마가 될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이 다 떠나기까지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좌절하지도, 돌아가지도, 무작정 기다리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지붕을 뚫습니다.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자 지붕을 뚫어버립니다.

우리도 이러한 적극적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얌전하고 착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주님의 축복을 얻기 위해 당당히 나가고 싸우고 매달릴 줄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목적이 선하다면 좌절해서 돌아서기보다는 벽을 뚫어내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그런 믿음의 결단이 우리의 삶에 있을 때 놀라운 기적의 시작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둘째, 희생을 각오하는 섬김입니다. 네 사람은 집안에 가득한 사람들을 보자 병이 든 친구를 위해 지붕을 뚫습니다. 남의 집 지붕을 뚫은 네 친구에게는 어떤 문제가 생겼을까요? ,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집주인에게 법적인 보상을 해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 경우에 기본적인 배상을 두 배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 남의 집 지붕을 동의 없이 뚫은 네 친구는 지붕에 대한 2배의 손해배상을 해야 했던 겁니다. 그런데 이 배상은 그들이 나쁜 짓을 했기 때문인가요? 아닙니다. 중풍병을 앓고 있는 친구를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좋은 일을 하려고 했는데 그 대가는 좋은 보상이 아니라 집 주인에게 주어야 할 두 배의 손해배상비용이었습니다.

그럼 네 친구는 그 사실을 몰랐을까요? 알았습니다. 친구를 위해 지붕을 뚫으면 배상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두가 아는 이스라엘의 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남의 집 지붕을 뚫습니다. 반신불수의 친구를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고, 자신들의 재산을 희생했습니다.

 

셋째, 믿음의 확신입니다. 지붕에서부터 내려오던 침대는 마침내 예수님 앞에 놓입니다. 그리고 그 침대로 인해 예수님은 말씀을 멈췄고 사람들은 웅성거립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생긴 문제는 뭐였을까요? 그것은 침대를 본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그 침대는 설교에 집중하던 예수님으로 하여금 설교를 멈추게 만들었고, 예배 실처럼 조용한 방안을 한 순간에 도깨비시장이나 공사장처럼 만들어버렸던 겁니다.

지붕을 뜯어낸 네 친구는 침대를 아래로 내리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예수님이 좋아할 것이라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기분 나쁠 것이라 생각했을까요?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추측이 가능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생각을 했기에 그렇게 했던 것일까요? 그들은 예수님은 기분이 나쁠지 몰라도, 우리는 예수님께 야단을 맞을지 몰라도, 내 친구만은 반드시 고쳐주실 것이라고 믿었던 겁니다. ‘내 친구만은 반드시 고쳐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그들에게 있었던 겁니다.

 

우리는 믿음을 강조하지만 시실 확신은 잘 못합니다. ‘믿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확신에는 약합니다. 그러나 믿는다는 것은 확신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저 사람은 그렇지 않아’, 혹은 저 사람은 반드시 그렇게 해라는 확신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주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신하는 겁니다. ‘너는 복이 될지라는 그 말씀을 확신하는 겁니다. 어떤 경우에도 그분이 나를 회복하며 구원하실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기분 나쁘게 하는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네 사람이 가졌던 동일한 마음, 그것은 그래도 예수님은 내 친구를 낫게 할거야라는 믿음의 확신이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확신을 가진 네 친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랑하는 친구 중풍병자의 병을 낫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서기관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6~7절입니다.

6.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7.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문둥병자를 고친 일이 이스라엘 전역에 퍼지자 예수님은 가버나움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이 곳에서도 시간이 지나면서 주님을 찾아 온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시몬의 집은 문 앞에도 서 있을 자리가 없었습니다. 이때에 주님은 무리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도"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자리에는 갈릴리와 유대,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도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은 주님의 소문을 듣고 그의 가르치는 내용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사람들로 보입니다. 그들은 가버나움을 방문해서 주님의 가르침과 행동을 모두 세심하게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이 중풍병자를 낫게 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주님은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진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행동을 통해서 자신이 사죄의 권세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 참석해 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이 말을 들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전문적인 교사이며, 율법을 철저하게 준수하기로 유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네 죄가 용서를 받았다"고 하시는 말을 듣고 매우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는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신성을 가진 분이라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고 있다"고 정죄하였습니다. 그들은 감히 공개적으로 주님을 비난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으로는 주님을 메시아가 절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사건을 보고도 분석하고 비판하고, 그 축복의 자리에서도 큰 은혜를 받지 못하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전문적으로 섬기고 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가까이 행했다는 사람들이 말입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영으로 만나는 것이지 그 어떤 세상의 방법으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당시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 있었던 곳에 세 무리의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알게 되셨으리라 믿습니다. 바로 중풍병자의 네 친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지붕의 벽도 뚫어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희생을 각오하더라도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가라는 주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길 축원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중풍병자의 네친구들이 친구를 사랑하고 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보시고 놀라운 기적을 베푸신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나올 때 구경꾼들이나 서기관들과 같은 마음을 가졌던 적이 있더라면 용서하여 주시고, 오직 순수한 믿음으로 주님의 구원의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