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히브리서 11: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설교: 아브라함의 부활 신앙
미국에서 스탠퍼드 대학(Stanford University)은 세계적인 명문 대학입니다.
그런데 그 스탠퍼드 대학을 설립한 사람이 바로 '릴런트 스탠퍼드(Amasa Leland Stanford)'입니다.
그가 스탠퍼드 대학을 설립한 동기가 있습니다. 스탠퍼드는 부자였고 캘리포니아 출신 상원의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외아들이 죽었습니다. 그는 잘 생기고 수재였던 외아들이었다. 극도의 슬픔에 잠긴 아버지, 스펜퍼드는 장례식에서 말을 잃었습니다. 그는 슬픔 속에 잠을 자지 못하고 있는데 그날 밤 꿈에 아들이 생생한 모습으로 나타나 말했습니다.
'아버지 저는 부활하신 예수님 곁에 있습니다. 저 대신 청년들을 도와주셔요.'
스탠퍼드는 이 환상을 보고 인생관이 확 바뀌고 말았습니다.
'예수님도 살아 계시고 내 아들도 살아있다!'
스탠퍼드는 이런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들의 소원을 들어주기고 하고 청년 교육에 전력을 다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당시 거액인 2천만 달러 약 200억 원을 바쳐서 오늘의 명문인 스탠퍼드대학을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그는 어려운 학생들을 돕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을 때 이런 유서를 남겼다고 합니다.
'나의 재산은 10원짜리 동전 하나 남기지 말고 청년 교육에 사용하라’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그 어떤 인생의 바닥에서도 희망을 갖게 하고 죽음의 문턱에서도 생명으로 옮겨지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믿음이 인생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볼 것입니다. 함께 보시고,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를 아시는 귀한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쳤다는 얘기가 창세기 22장에 나옵니다. 저는 예수를 믿고 성경을 보면서 여러 가지 의문이 있었습니다만, 제가 품었던 대표적인 의문 가운데 하나가 아브라함입니다. 저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대목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100세에 얻은 독자를 바치라고 하신 하나님도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바치라고 한다고 -창세기 22장을 보시면 알겠지만- 바칩니다. 일말의 갈등없이 저항없이 의문 제기도 없이 묵묵히 하나님이 바치라는대로 모리아 산으로 가서 다 큰 아들을 묶어서 제단 위에 올려놓고 목을 베려고 목에 칼을 댑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경에 나오는 얘기니까 예사로 넘기셨습니까? 저는 이 사건을 아무리 봐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정신적으로 좀 문제가 있던 사람이었습니까? 이삭을 100세에 얻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독자입니다. 이삭의 어깨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이 지워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저 해변의 모래처럼 많은 자식을 주고, 별처럼 많은 후손을 주겠노라 약속하셨는데, 그 많은 자손들이 이 이삭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리라고 약속했는데, 그 이삭을 하나님이 번제로 바치라는 겁니다. 앞뒤가 전혀 맞지 않고 상식에 닿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해석해 볼 도리가 없는 말씀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이삭을 주실 때는 언제고, 또 잡아 바치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아비가 100세에 얻은 독자를 짐승 죽이듯이 잡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아비에게 이런 명령을 하실 수 있습니까? 할 말이 너무도 많을 것 같은데 아브라함은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집에서 모리아 산까지 사흘 길입니다. 처음에는 얼떨결에 나설 수 있지만 3일 동안 길을 가면서 다른 곳으로 달아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묵묵히 모리아 산까지 갑니다. 이러고도 어떻게 아브라함을 아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 의문이 오랜동안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성경에서 찾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9절 말씀입니다.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이 아들을 제물로 바칠 때 가졌던 믿음은 이 성경구절에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생각한지라’라는 말은 단순한 견해가 아니라 단호한 확신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그는 죽은 자와 다름없는 자신의 몸에서 이삭이 나게 하신 것처럼, 그가 죽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던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아들을 다시 살리신다”라는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는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독자까지도 아끼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가를 알고 싶으셨고, 또 아브라함을 사랑하듯이 아브라함의 아들도 사랑하셔서 이 아브라함이 다시 하나님께서 이삭을 살리실 것이라는 부활신앙이 있는지 알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험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믿음과 인생이 크게 성숙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험을 통과할 때 승리의 원동력이 된 것이 바로 부활신앙이었습니다. 이 부활신앙은 '내가 죽은 후에 예수님이 오시면 내가 다시 살아난다'는 미래적인 소망을 줄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의 삶에 있어서 용기 있는 결단과 능력을 갖추게 하는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절망의 선을 넘어선 사람은 아무 것도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어떻게 그처럼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할 수가 있었습니까?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기 위해서는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반드시 부활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이 부활신앙은 거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차원높은 믿음의 수준입니다. 이런 수준의 신앙을 가지고 있어야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늘 함께 이야기 하시고 우리를 위해 많은 일들을 계획하시고 행하시는 것입니다.
쉽게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온실 안의 꽃처럼 자라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들판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핀 야생화처럼 힘이 있고 건강한 꽃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감당할 만한 시험, 감당하기 어려우면 피할 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폭풍우과 같은 시련을 주시고 잘 견디어 극복하는 것을 보신다는 말씀입니다. 늘 연약하고 늘 돌보아주는 아이가 아니라 위험이 도사리는 세상이라는 영적인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도리어 전쟁의 승리를 얻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승리를 얻기 위해서는 “난 잃을 것도 없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 것이다. 죽으면 예수님께서 오시는 날 나는 다시 살아나 주님의 품안에 살게 될 것이다”라는 다짐을 날마다해야할 것입니다. 이러한 부활신앙없이는 세상의 것에 집착하고 얽매여 살다가 세상에게 먹히게 되고 말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죽음을 뛰어넘는 믿음으로,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려했고, 또 바치자 하나님께서는 커다란 손으로 이삭을 구하고 친히 번제물을 마련하시어 대대손손 아브라함의 믿음을 칭찬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두운 가운데 전등 하나만 켜 놓고 손으로 모양을 만들면 벽에 여러 모양의 그림자가 생깁니다. 이 때 여우나 독수리의 그림자가 생겼다고 해서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림자는 실체가 아니므로 사람을 해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신 후 “죽음”이란, 주님을 믿는 성도에게 그것은 실체가 아닌 허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여우나 독수리의 그림자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죽임이란 이제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육체와 영혼이 잠시 분리된다 하더라도 정해진 시간이 되면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짐승의 그림자가 사람을 물 수 없고 칼의 그림자가 사람을 찌를 수 없는 것처럼, 죽음은 더 이상 슬퍼할 일도, 두려워할 일도 아닌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이삭을 통하여 죽었던 자가 다시 생명을 얻는다는 부활신앙을 그림자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 말씀을 확실히 믿고 있었습니다. 그 믿음이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는 말씀의 의도를 알았고 부활신앙의 확실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믿음은 자녀인 이삭에게 신앙전수가 이루어지고 이삭은 아버지에게서 들은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에게 있었던 시험을 우리도 때로는 시험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 시험은 우리에게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험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이기 때문에 믿는 자녀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고 순종할 때, 큰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이 부활신앙으로 하나님의 시험을 이길 수 있었듯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내하며 기다리는 영적인 자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죽음에서 살리신다는 그 믿음을 우리에게도 주옵소서! 주님! 우리도 이런 믿음을 본받아 하나님의 기쁨되게 하시고 날마다 믿음으로 이 세상의 모든 악한 것들에 맞서 싸워이기는 주님의 용사들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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