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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강해 3) 복음에 합당한 증인( 수요기도회 20210721)

by 온누리선교 2021. 7. 20.

성경말씀: 데살로니가전서 2:1~5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시느니라

설교:복음의 합당한 증인

어떤 마을에 구걸을 해서 먹고 사는 불쌍한 고아 소년이 있었습니다. 매일같이 마을 장터에서 구걸을 하던 소년에게 하루는 어떤 사람이 큰돈을 쥐어주며 말했습니다.

세상엔 너와 같이 불쌍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분명 너같이 불쌍한 아이들을 이렇게 그냥 내버려두지는 않으실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구나.”

그러자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아저씨, 분명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저 같은 불쌍한 사람들을 내버려두지 말라고 지금도 말씀하고 계실 거예요. 하나님이 가만히 계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말을 듣지 않는 거예요.”

마음속에 성령의 감동이 떠오르면 우리는 그것에 순종하기 보다는 감추려고 합니다. 현실적인 이유들을 갖다 대며 나보다 더 적합한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핑계를 댑니다. 그리고는 불합리한 세상에 대해서 불평을 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우리 가슴속에 살아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따를 때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가 복음에 합당한 증인이 되기 위해서 이 하나님의 음성에 어떻게 민감하게 반응하고 또 순종해야할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받고 은혜의 길로 나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2절의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에서부터 고린도에 이르기까지 선교의 현장에서 전도된 질서가 진리가 되어버린 두 가지 사회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는 이방인들의 사회였고, 하나는 유대인들의 사회였습니다. 이방인들은 애초에 세상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부인하고, 그 위치에 피조물에 불과한 우상들을 그 자리에 앉히는 것에서부터 질서를 전도시켰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기쁘기 위한 목적과 내용이라면 그 수단과 형식이 무엇이든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기쁘게 하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과는 반대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곧 목적이 되고 율법은 수단이 되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점차 율법이 목적이 되어버렸습니다. 객의 위치에 있던 율법이 주가 되버린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 지적했던 내용이 바로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하셨던 말씀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인자를 인정하지 않고, 아직도 안식일 곧 율법을 자신의 주인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불어 그들은 율법의 원래 목적이자 내용이었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잃어버리고, 수단과 형식에 불과했던 율법을 그저 문자적으로 숭배하는 자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도리어 율법을 선물로 주셨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잘 지킨다고 생각하는 자신들이 그 영광을 가로챘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교회를 세우는 과정에서 이런 두 가지 사회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올바른 질서 가운데 교회를 세우려고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전도된 질서가 올바른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이렇게 올바른 질서 가운데 세워진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가운데 세워진 교회 중 하나가 바로 데살로니가 교회였죠. 데살로니가에 이르기 전 바울 사도는 빌립보라는 이방인 사회로부터 큰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에 도착해서는 유대인 사회로부터 큰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유대인들의 핍박이 심해지자, 바울 사도는 베뢰아로 선교지를 옮겼으나,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은 베뢰아까지 쫓아와 바울 사도를 핍박했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아테네로 피신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테네에서 또 바울 사도는 주객이 전도된 이방인들의 사회를 또 한 번 경험하게 되었고, 그들의 질서를 바로 잡아주려 했으나 도리어 비웃음을 당하고 선교에 실패한 채로 고린도로 선교지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바울 사도는 다소 낙심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에게 올바른 질서를 선포하는 일에 잠시 주춤하고 있었죠. 그러던 중 데살로니가 교회를 방문하고 고린도로 돌아온 디모데로부터 데살로니가 교회가 자신이 그들에게 전했던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세워진 올바른 질서를 따라 자신들의 신앙을 잘 지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주 큰 도전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그 올바른 질서를 이방인과 유대인 사회 가운데 힘써 전파하기를 다시 시작하여 결국 고린도에서 큰 부흥을 일으키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올바른 질서가 세워진 교회를 또 하나 더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썼고, 바울 사도가 그들의 신앙을 아주 크게 칭찬하는 것을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2장에서 바울 사도는 그가 데살로니가에서 전했던 바가 진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진리였다고 선언하며, 이방인들의 사회와 유대인들의 사회로부터 어떠한 고난을 당하더라도 이 진리에 꼭 붙잡혀 살아갈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이러한 바울 사도의 권면을 자세히 살펴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곧 신앙의 주객이 전도되지 않는 삶을 회복하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1절에서 먼저 하나님께서는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시며, 신앙의 과정이 어떠한지을 보고 기뻐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데살로기나 교회 성도들이 맺은 신앙의 결과가 좋았기 때문에 자신의 사역의 과정이 헛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바울 사도는 곧바로 2절에서 그렇지만 그 좋은 결과가 맺어지기 까지는 분명히 고난이 있었고, 그 고난을 담대하게 이겼다고 전합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자신들이 그만큼 고생했다고 생색내려고 이런 말은 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맺은 좋은 열매를 칭찬함과 동시에 그 열매와 결과에 안주하여 과정을 가볍게 여기는 실수를 범하지 않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바울 사도는 전합니다. 왜냐하면 결과만을 바라보는 신앙인들은 실패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아마 초신자들이 가장 많이 넘어지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어서 복음 전도 사역을 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에 대해 말합니다. 3~5절입니다.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시느니라

 

바울은 그의 서신 곳곳마다 하나님 아버지와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이라고 강조하는 것도 복음의 권위를 위해서였습니다. 만약 바울의 사도권이 부정된다면 그가 전한 복음까지도 위협을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바울의 권위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3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여기 간사함은 헬라어 플라네스로 미혹시키다는 뜻입니다. 잘못된 가르침이나 철학이나 미신 등을 말하기도 합니다. 부정의 원어적 의미는 물질을 탈취함이나 이성문제 등 그런 윤리적 부정을 뜻합니다. 그리고 속임수는 궤계 간사함 궤변 눈속임 등을 뜻하는 단어로 마술사들이 했던 것과 같은 행동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말은 우리의 권면은 이런 데서 비롯되지 않았다. 진실하다. 혹은 진리만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권위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전하는 성경이 우리를 권위 있게 해줍니다. 권위란 수염을 기르거나 목에 힘을 주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진실에서 나옵니다. 성경의 진리를 잘 전하는 일 거기에서 진정한 권위가 나타납니다. 성경은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보면, 그 사도권에 대한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절에서 옳게 여기다입증하다. 구별하다.’라는 뜻으로 마치 금의 순도를 높이기 위해 제련할 때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금일지라도 순도가 떨어지지 않고 높을 때 가치 있듯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순도 높은 인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사역을 위해 연단 받고 준비되고 준비되어 하나님의 인정과 승인을 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바울이 하나님께 인정받기 힘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사욕을 버릴 때 사도권에 대한 바울의 권위가 나타남을 알 수 있습니다. 5절에서 아첨이란 신약에서 단 한 번 쓰이고 있는데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진실을 말하기 보다는 타인의 기분을 맞추어 말하는 음흉한 행위를 말합니다. 그리고 탐심의 탈이란 사물의 진상을 은폐하는 가면으로 특히 탐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겉으로 치장하는 가식적인 태도를 지적하는 말입니다. 이런 아첨이나 탐심은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바울과 같은 전도자에게는 어울릴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가 그저 이론적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데살로니가에서 고린도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신앙이 무너지는 것 과정 가운데 그것을 철저히 체험했습니다. 자신이 데살로니가에서 가졌던 그 사랑과 긍휼과 자비의 마음은 온데 간데 없어지고,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인해, 또 아덴의 수많은 우상들로 인해 마음에 일어났던 격분밖에 남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보게 된 것이었습니다. 저희도 그렇게 이제껏 살아왔지 않습니까? 저희 안에 사랑과 기쁨이 충만했던 때와 그렇지 못 했던 때를 비교하며 돌이켜 보시길 소망하며, 바울이 회복했던 그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또 이웃을 향한 사랑을 회복하는 저도 되고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 이 외침이 우리의 영혼판 가운데에 깊이 새겨지고, 우리 안에서 전도되었던 모든 질서들이 뒤엎어져서, 오직 그리스도만을 우리 삶의 내용과 의도와 방법으로 삼고 복음과 함께 고난의 삶을 살아가는 저도 되고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가 주님의 복음에 합당한 증인이 되기 위해 흔들림없이 믿음의 반석 위에 서게 하옵소서!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처럼 주 안에서 칭찬받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