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온누리선교교회 Onnuri Mission Church Миссионерская церковь Оннури
온누리선교교회/한국어예배

데살로니가 전서 강해 5) 끊임없는 감사 (수요기도회 20210818)

by 온누리선교 2021. 8. 18.

 

성경말씀: 데살로니가전서 2:13~20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받게 함을 그들이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그들에게 임하였느니라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설교: 끊임없는 감사

 

노르웨이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사탄이 세상에 내려와 노르웨이에 여러 창고를 지었는데 이 창고에는 미움, 시기, 질투, 절망, 아픔과 같은 안 좋은 감정들의 씨앗이 들어 있 었습니다. 사탄들은 매일 부지런히 다니며 이 씨앗들을 사람들의 마음 에 심었습니다.

씨앗들은 뿌려지기만 하면 사람들의 마음에서 쑥쑥 자라 사탄은 매우 만족했는데, 어느 날 유독 한 마을에서만 이 씨앗들이 효과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악한 영들이 다 몰려들어 아무리 씨앗을 뿌려도 소용이 없었습 니다. 화가 난 사탄이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았는데 거기에는 이미 어떤 씨앗이 심겨져 있었습니다.

사탄의 노력도 소용이 없는 마을의 이름은 기쁨이었는데, 거기에 사 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감사라는 씨앗이 심겨져 있었습니다.

감사는 반응이 아닌 태도입니다. 정말로 주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늘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우리 안에 있으면 반드시 기쁨이 넘치고 악을 이길 힘을 얻게 됩니다. 어떤 일에도 감사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기쁨을 누리십시오. 반드시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합니다.

 

오늘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감사로 믿음 생활을 했을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사도 바울은 잘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도 주님의 말씀을 감사함으로 받고 기쁨 중에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포기하지 말고 나갈 때 하나님께서는 불행을 행복으로 고난을 기쁨으로 바꾸시는 기적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이를 기억하시고 함게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3~14절의 말씀입니다.

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14.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

 

오늘 말씀을 보니, 바울의 대적들은 바울의 말을 인간적인 말이라고 해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영성주의자와 무속적인 종교인들처럼 신비한 말은 하지 않고 복음과 함께 구원받은 사람들의 윤리성과 도덕성을 도전하는 말씀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의 말을 인간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그것은 바울에게도 힘이 되었지만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는 더욱 힘이 되었습니다.

 

유대 지역 교회들이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은 것처럼 데살로니가 교회도 동족들로부터 동일한 고난을 받았습니다. 고난은 진실한 성도에게 있는 징표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때문에 받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더 나아가 고난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기쁘게 받으십시오. 비전을 향해 나갈 때 사람들과 환경이 잘 뒷받침해주지 못할 때도 있지만 비전에는 그런 고난은 당연하게 뒤따른다고 생각하고 용기를 내십시오.

 

모세가 애굽 왕자로 있다가 40세에 동족 해방의 꿈을 가지고 일어나 애굽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때 동족들이 열렬히 박수를 쳐줄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일로 인해서 동족의 배신을 당하고 충격 가운데 광야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탄식했을 것입니다. “이럴 수가! 내 꿈이 재앙으로 변했구나.” 그 꿈과 비전을 회복하는데 장장 40년이 걸렸습니다. 그처럼 비전을 고난을 수반하지만 그때 비전을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예비하신 축복의 때가 반드시 옵니다.

 

그런 축복의 때를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15~16절의 말씀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15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16.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받게 함을 그들이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그들에게 임하였느니라

 

편협한 마음을 가지면 안됩니다.

유대인들은 종교적인 편협성과 민족적인 편협성으로 복음을 배척했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을 구원의 장에서 오히려 밀어냈습니다(15-16). 주후 1세기경의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는 유대인들은 모든 이방인들을 증오하고 적대시 했다.”고 했습니다. 그처럼 유대인들은 병적인 민족적 우월감에 빠져서 더 심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런 유대인의 모습을 반면교사로 삼고 편협한 믿음을 버려야 함을 절실하게 깨닫습니다.

때로 타 종교인으로부터 기적이 나타나면 그것도 선한 일로 인정해주십시오. 다만 그런 현상을 보면서 기독교는 기적 중심적인 종교가 아닌 주님 중심적인 종교여야 함을 절실히 깨닫는 분별력을 가지면 됩니다. 그런 분별력을 가지고 삶의 방식과 스타일이 다른 사람을 무조건 배타하지 마십시오. ‘다른 것틀린 것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선교마인드를 가진 사람이 결국 좋은 성도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7~20절의 말씀입니다.

17.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18.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

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20.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캘리포니아의 스퀘어 나무는 300 피트 정도의 높이까지 무성하게 잘 자랍니다. 특이한 것은, 이 거목의 뿌리가 얕고 사방으로 길게 뻗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더구나 군집을 이룬 이 나무들의 뿌리가 서로 뒤엉켜 거센 비바람에도 잘 쓰러지지 않도록 서로를 지지해 주기 때문에 거대한 나무로 잘 성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혼자 힘으로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스퀘어 나무들처럼 성도들과의 교제를 통해 아픔을 나누고 중보기도로 도우며 상부상조할 때 능히 견디고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근세의 유명한 철학자인 마르틴 부버라는 사람이 나와 너라는 책을 썼습니다. 거기서 말하는 세 가지의 인간관계가 있습니다. 첫째 그것과 그것의 관계입니다. 인간관계를 마치 물건처럼 서로를 이용하다가 가치가 없으면 버린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없는 무인격 관계입니다. 둘째로는 나와 그것의 관계입니다. 이 말은 상대방은 나를 물건처럼 이용해도 나는 상대방을 끝까지 인격적으로 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관계는 나와 너의 관계로 발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부버는 내가 당신을 인격으로 믿어주고 당신이 나를 인격으로 대해 준다고 하여도 이 관계가 항상 유지되는 것이 아니고 언젠가는 깨질 수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너 사이에 언제나 이러한 관계를 중매하는 촉매자가 필요한데 그것을 영원자인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마찬가지입니다. 그 관계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으면 깨지게 됩니다. 모든 관계가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져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교제는 믿는 자들과 많이 다릅니다. 서로의 이익을 위하여 술로 교제합니다. 골프와 화투로 교제합니다. 성도의 교제는 다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성도의 교제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사랑의 교제입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할 때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라고 나옵니다. 교통이 바로 교제입니다. 신앙생활에는 예배와 기도도 중요하지만 성도간의 교제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 때 마케도니아의 수도인 데살로니가에 갑니다. 그곳에서 3주 동안 있으면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강론하며 증거하였습니다. 그때 경건한 헬라파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서 믿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베뢰아로 피신하였습니다. 그곳에서 데살로니가교회를 생각하면서 이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그는 떠나 있었지만 성도들이 보고 싶어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교제는 보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 성도의 교제는 이성간의 에로스의 사랑이 아니라 아가페사랑으로 교제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영적인 교제입니다. 믿는 사람들의 교제는 세속적인 교제와 다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신령한 교제,영적인 교제를 해야 합니다. 사단은 이러한 교제를 훼방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제는 성도의 영혼을 살찌게 하고 교회를 부흥하게 하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셋째로 자랑의 교제입니다. 나의 자랑은 조심해야 하지만 상대에 대한 자랑은 많이 해도 좋습니다. 오늘 본문 1920절을 보면 바울이 얼마나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자랑하는지 모릅니다. 교회 자랑은 할수록 좋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교회와 성도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랑의 교제,영적인 교제,자랑의 교제를 통하여 주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의 향기를 날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로우신 주님!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갖은 어려움과 또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고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편협함으로 주님의 사람들을 실족하지 않게 하옵소서! 또 서로를 도우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 드러내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