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마가복음 5: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설교: 달리다굼의 신앙
주님의 기적을 우리 모두는 보고 싶어합니다. 주님의 능력을 우리는 경험하고 싶어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주님의 이러한 축복을 받기 위한 방법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지혜와 은혜를 받으시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군대 귀신” 에게 괴로움을 당하던 사람을 구하셨습니다.(막 5:15) 그 당시 군대는 약 6,000명이었는데, 그 사람 몸에 귀신이 하나도 아니고 그만큼 많던 귀신을 예수님께서 쫓아내셨습니다.
그 능력과 권세가 사람들에게 소문이 퍼졌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보통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회당장였습니다.
“회당장”이란 유대인들로 말하면 어른 중에 어른이며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종교지도자였습니다. 이렇게 높은 위치에 있는 지도자가 와서 당시 사람들의 인기만 가지고 있는 야인같은 사람인 예수님께 와서 아주 겸손하게 발 아래 엎드렸습니다.
자신의 자존심을 다 버리고 말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바로 야이로의 어린 딸 때문이었습니다. 그 어린 딸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아버지의 사랑은 너무나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는 분명 그 마음을 아시고 받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회당장은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받아 살게 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저렇게 해주면, 내 딸이 살아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 회당장의 마음을 잘 알 것 같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힘든 일을 겪을 때 우리도 한 번쯤은 이렇게 말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곰곰이 생각하면, 도움을 받아야하는 주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 “뭐해달라, 이렇게 해달라” 요구하는 자체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도움을 구할 때 늘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외국인 노동자의 집”에서 일할 때 한 중국동포 한분이 오셔서 국적 신청을 해달라고 졸랐습니다.
그 당시에 국적을 얻으려면 과정도 많이 힘들뿐 아니라 길어서 쉽게 얻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조금 있으면 중국이 많이 발전할 것이니 좀 더 쉬운 F-4 영주권 비자를 만드시는 게 더 낫지 않겠냐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2등 국민으로 중국에서 산 것도 억울한데 여기서도 가짜 한민족처럼 산다고 국적을 만들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하도 고집을 부리고 해달라는 데로 안해주어서 결국은 힘들게 그 과정을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영주권을 신청한 다른 사람들보다 국적이 더 안나오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H-2 비자기간이 넘어버려 중국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들어가게 되자 오셔서 저의 센터를 비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왜 영주권 비자로 강하게 이야기 하지 않았냐고 따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사람들은 그 누구에게 도움을 구할 때 자신이 진짜 필요한 도움이 무엇인지를 잘 모릅니다. 그리고 자신이 어떠한 처지에 처해 있는지 생각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필요한 도움만을 받으려 하고 받는 도움도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받으려고 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도움 그 이상의 도움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도움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온전히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도와줄 수 있도록 자신을 낮추고 도와주는 사람이 하는데로 기다려주고 따라주어야 완벽하게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부리고 싶어하는 야이로의 생각을 아셨지만 뜨거운 부성애 때문에 예수님은 그와 함께 그의 집으로 향합니다. 이 때 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많은 무리가 에워싼 그 길에서 말입니다.
12년동안 흐르는 피가 멈추지 않는 병인 혈루증걸린 여인이 가만히 다가와 예수님의 옷을 만졌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 여인은 불쌍하고 병들은 여인입니다.
회당장 야이로 정도나 되야 당당히 예수님 앞에 나가서 병을 고쳐달라고 하지 돈도 권력도 건강도 아무것도 없는 여인은 예수님 앞에 감히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며 병고치고 자신을 구원할 큰 능력을 가진 자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믿음을 가지고 그 많은 젊은 남자들 사이를 겨우겨우 지나 예수님의 옷을 만지게 된 것입니다.
이 예수님께서 급히 야이로의 딸을 구하러 가시다가 갑자기 가던 길을 멈추셨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능력이 나간 줄을 아시고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제야 이 여인이 예수님 앞에 나가 병이 고쳐진 사실을 말하였습니다. 그것도 아주 많은 사람들과 회당장 야이로 앞에서 말입니다.
그리고나서 야이로는 집으로 가던 도중 그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러면서 이 소식을 전한 사람들이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35절)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와도 죽은 자를 살릴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가운데에서도 회당장 야이로에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36절)
야이로는 이미 혈루증 걸린 여인이 예수님의 옷깃만 잡아도 낫겠다는 믿음으로 나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야이로는 예수님이 집안으로 들어가시는 것을 막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제 그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만 보입니다. 자기 생각, 자기 판단, 그런 것이 이제 있지도 않습니다.
그리하여 울음소리로 가득한 자신의 집에 예수님과 세 명의 제자들과 함께 믿음을 가지고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야이로의 가족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야이로를 위해 “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확실하게 한 번 더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아버지인 야이로와 그의 아내,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보는 앞에서 말씀하십니다.
“달리다굼”
소녀가 일어났습니다! 살아났습니다! 야이로의 딸이 살아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야이로가 원하는 방식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구원하게 하소서‘로 그 딸을 살리신 것이 아닙니다. 그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셔서 12살의 이 아이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방식대로 구원하신 것입니다.
저는 야이로와 관련된 이야기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통해 세 가지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야이로를 인격적으로 대하였다는 것입니다.
간절히 구하는 사람이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 저렇게 치료해 달라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의 마음을 아셨기에 그러한 실수에도 말없이 대답 없이 함께 그 길을 걸어가 주셨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야이로를 사랑하셨기에 진실한 믿음과 이적을 보여주시기 위해 혈루증여인의 치료를 목격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급하게 촉각을 다투며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할 수 있도록 예수님은 혈루증 여인의 나음을 허락하셨고 그것을 통해 야이로가 구원받는 믿음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셋째로,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흔들릴 수 있는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셨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자칫 기적을 보고도 다른 이들의 말을 통해 역사하는 사단의 장난질에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것을 막으신 것입니다.
야이로가 믿음을 잃지 않고 그 자신의 딸이 살아나는 것을 직접보고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릴 수 있는 기회를 끝까지 갖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 속에서 이 아이를 살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살리시는 구원의 역사를 보고도 진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들 앞에서 이 아이를 살린 것입니다.
얼마나 치밀하고도 세밀하게 야이로를 설득하시고 진실된 믿음으로 이끄셔서 축복을 받게 하시는 예수님이십니까? 정말 너무나도 사랑이 많으시고 세밀하게 신경써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왜 고난 앞에서 ”달리다굼“ 할 수 없을까요? 예수님의 능력이 문제입니까? 내 방식대로 구원해주지 않는 주님과의 갈등이 문제입니까? 내가 원하는 때에 바로 내가 바라는 데로 해주지 않는 전능하신 주님께서 나를 낙심하게 만들기 때문입니까?
이런 문제를 거꾸로 보면, 바로 해답이 나옵니다.
첫째, 대부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경험을 중요하게만 여기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온전한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야이로와 같이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라는 요구를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께 기도하면서 요구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해하고 제가 아는 수준에서 이렇게 저렇게 해결해 주세요’라고 구체적으로 아주 세밀하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열심히 기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응답이 없으십니다. 우리의 주님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칩니다. 그리고 왜 응답하시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그리고 속이 상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안나오기도 하거나 하나님을 떠나기도 합니다.
누구 때문에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올바른 요구와 기도를 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혈루증 걸린 여인처럼 깨끗하게 그 근원까지 말라버리는 기적을 보이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 기적을 보지 못하는 것은 바로 올바를 기도를 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 때문입니다.
둘째, 우리가 원하는 것과 다른 예수님의 행하심 때문에 우리는 낙심합니다. 어쩔 때는 무응답이 응답일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와 우리가 바라는 시기가 다를 수도 있는데 그것에 대해 섭섭해 하고 시험에 드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참으로 어리석은 짓을 하는데 내 바람대로 되지 않는 주 예수님의 응답에 대해 실망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왜요?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그 많은 피를 흘리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나를 위한 주, 우리를 위한 주, 사망가운데 있는 하나님 자녀들을 위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고 “달리다굼, 일어나라!”
우리도 야이로의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주님을 향한 믿음을 더 든든히 해서, 세상 살면서 고난에 처할때마다 “달리다굼”하면서 매순간 일어설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앞으로 어떤 일을 당하고 어떤 어려움 가운데 있어도, 이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믿고 따라서, 주님의 은혜를 충만히 받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가 충만하신 주님,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른다 하면서 우리 머릿속에 우리 마음속에 우리 것으로 가득차 살아갔던 것 용서하여 주소서!
이제부터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그 방식과 그 길대로 따라가겠사오니 주여! 우리의 두 손을 꼭 잡고 가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주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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