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베드로전서 2:18-25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설교: 순종하라
리이튼 포드라는 미국에서 아주 유명한 목사가 있습니다. 그는 자기 생애에 잊을 수 없는 사건 하나를 "사귀는 전도,나누는 전도"에서 공개를 합니다. 그가 서부 아프리카 다카 공항에서 비행기에 기름을 넣기 위하여 잠시 기다리는 동안 프랑스 출신 선교사가 찾아와 교제를 나누었답니다. 그 선교사가 자신은 모슬렘 지역에서 10년 동안을 일했다고 자신을 소개하자, 리이튼 포드 목사의 일행 중 한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그동안 얼마나 많은 회심자가 있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두명"이라고 말했습니다. 십년 선교활동 중에 2명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또 다시 일행중 한사람이 불쑥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답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때문에 이곳에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 프랑스 출신 선교사가 매우 놀란듯 다음과 같이 대답을 하였답니다. "이곳에 왜 있느냐구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이곳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 때문에 제가 이곳에 있습니다."
리이튼 포드 목사는 공항에서의 그 경험을 자신의 생애 속에 일어난 일 중에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고 간증을 했습니다. 10년 동안 사역의 열매가 단 2명밖에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곳에 두셨기 때문에 이곳을 떠날 수 없고,이곳에 있어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는 그 선교사의 대답에 이 목사는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참으로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오늘 베드로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합니다. 우리가 그분의 고난을 생각하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는지 잘 알 수 있다고 베드로는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순종하라는 명령에 우리가 진정 하나님 앞에서 순종해야 하는지 함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18~20절의 말씀입니다.
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베드로가 편지를 썼을 당시에 “사환”은 ‘노예’, ‘종’을 가리킵니다. 당시 교회 안에 부와 명예가 높은 사람이 많지 않았으니 아마도 이 편지를 읽었을 사람들은 대부분 이러한 사람들(노예층)이었을 것입니다. 로마 제국은 영토를 확장하며 여러 민족을 침략하면서 그곳의 포로들을 노예로 삼았습니다. 길거리에 유리된 사람들이 노예가 되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빚이 너무 많은 사람은 스스로 노예가 되기도 했고, 어머니가 노예인 사람의 자식은 자동적으로 노예가 되었습니다. 로마 시대의 노예는 많게는 전체 인구의 반이었고, 적게는 1/5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교회 안에도 노예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사환들’은 어떤 집에 소속된 노예들입니다(눅 16:13, 행 10:17, 롬 14:4).
여러분들은 아마도 ‘나는 노예가 아닌데’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제가 당시 노예들이 했던 일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들은 건축업 관련업자, 교사, 어린이 돌보는 사람, 학원, 의사, 농부, 광부, 어부, 요리사, 상인, 경호원, 주택관리, 음악가 등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하시는 일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도 당시에 사셨다면 대부분 노예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로마 사회를 경제적으로 지탱하고 있었던 계급이었습니다. 로마 시대의 노예들은 봉사에 대한 급료를 받았습니다. 주인으로부터 받은 급료를 모아 자유권을 사서 일반 평민보다 나은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전반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기회가 평민보다 낮은 계층이었고 법적 문제에 있어서 보호받을 수 있는 권리가 없고 원하는 곳에서 일할 수 있는 권리와 이주할 수 있는 권리가 없었습니다.
이들은 주인에게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들을 가리켜 “살아있는 도구”라고 말했는데, 그들이 일하는 성과에 따라 주인의 명예가 높아지고 사회적으로 대우를 받는 시스템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주인이 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에 따라 종에게 신체적인 폭력을 가하거나 생명을 빼앗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부당하게 죽임을 당하는 노예들, 화형이나 십자가 형을 당하는 노예들도 많았습니다.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종의 대우가 달라졌던 것입니다. 선하고 너그러운 주인을 만나면 명예와 지위를 누리지만, 까다롭고 악독한 주인을 만난다면 부당한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 많은 노예들이 있었던 교회에 베드로가 이와 같은 명령을 한 것입니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18). 이것은 앞에서 “인간의 모든 제도에 순종하라”(13)와 같은 명령입니다. 이 순종은 즉각적이고 자발적이며 의지적인 순종입니다. 마지못해서 억지로 하는 순종이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순종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무슨 명령이든지 순종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나 법을 어기는 것,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일에 순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인을 신처럼 여겨 순종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상사 위에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을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들의 권위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참아야 합니까? 19절에 나와 있습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19).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참는 이유는 이것이 하나님 앞에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당시 성도들도 많은 부당한 고난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분노와 슬픔, 낙심, 원망이 들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상사의 부당한 대우에 이러한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참아야 하는 순간들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를 갈면서 억지로 참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습니다. 하나님께 그들을 벌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맺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20). 직장에서 우리가 지각을 하거나 성실하게 일하지 않아서 고난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상사에게 순종하지 않고 부정직하게 일하며, 성격이 별나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악행을 하여 고난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스스로의 죄 때문에 받는 고난, 그것을 참는 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그래서 20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여기서 말하는 “선을 행함”은 단순히 좋은 일이 아니라 앞에서 강조했던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말합니다. 즉 ‘순종하라’는 명령을 말합니다. 주인에게 순종할 때 고난 받는 것, 그리고 그것을 참는 것이 하나님 앞에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21~25절의 말씀입니다.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것은 우리가 구원받은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입니다.
‘우리의 일터 안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뜻을 품고 계실까’로 고민하고 계십니까? 고민하지 마십시오. 선을 행하는 것, 고난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이것이 구원의 목적이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유입니다. 이제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우리를 위해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이 계명은 성경 전체에서 중요한 두 번째 명령,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입니다. 이 때 여러분의 직장 상사와 동료들은 여러분의 이웃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요구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오늘 말씀을 통해 명령하시는 것은 여러분의 상관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편지를 받을 성도들, 노예들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받고 있는 부당함과 불공정함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서 전체의 주제는 ‘고난 가운데 성도의 기쁨’입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라고 명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너희를 빛 가운데로 불러내신 목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다시 세상의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겪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고난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칭찬받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기회 말입니다. 나태함이나 게으름이 아닌,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를 인정하는 겸손한 태도로 직장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구원의 목적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깊이 묵상하신다면 이 무겁고 힘든 일을 해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것 되시는 주님!
“순종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받듭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승리할 줄을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선하신 뜻이 우리의 인생 안에 나타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으로 하나님의 모든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오며 이모든 말씀 주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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