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요한 3서 1:5-8
5.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
6.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그들을 전송하면 좋으리로다
7. 이는 그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함이라
8. 그러므로 우리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
설교: 주의 이름을 위하여
유명한 인도의 간디가 “예수의 교리도, 예수의 교훈도, 예수의 가르침도 훌륭한데 너희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가지 못하느냐?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고 고백을 했다합니다. 내가 사관학교에 잠깐 들어갔다가 나왔다고 내가 군인이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내가 의과대학에 잠시 다니러 갔다가 왔다고 해서 의사가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오늘 우리가 교회에 들락날락 했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 대한 정의는 성경을 찾아봐야 됩니다. 어떤 새 신자가 성경을 두 번 통독하고 난 다음에 먼저 믿는 신자에게 교회사 책을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왜 그러냐?”라고 물으니 “읽어봐야 되겠다.”고 해서 “왜 읽으려고 하느냐?”고 다시 물으니 “언제부터 그리스도인들이 전혀 그리스도를 닮지 않는 모습으로 살기 시작했는지 궁금해서 교회사를 한번 읽어보려고 한다.”라고 했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명칭에 걸맞는 삶을 살아야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내 삶에 그리스도가 전부인 삶을 살아갑시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부업이 아니라 전업이 되도록 합시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으로 우리가 함께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사는 방법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5절 함께 읽습니다.
5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
여기에서 ‘사랑하는 자’는 1절의 ‘가이오’입니다. 그리고 가이오가 도운 ‘나그네 된 자’는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던 ‘순회 전도자’를 뜻합니다. 오늘 본문이 기록될 당시는 복음이 많이 전해지지 않았던 때였기에, 주의 종인 목회자들의 대부분은 순회 전도자가 되어 세계 곳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습니다.
가이오는 그러한 순회 전도자들이 찾아오면 그들을 최선을 다해 도왔는데, 그 일이 ‘신실한 일’이라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신실한’이라는 말은 헬라어 ‘피스톤 πιστον’을 번역한 것으로 ‘믿을 만한’, ‘신뢰할 수 있는’, ‘충성스러운’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순회 전도자들을 도운 일은 신앙에 기초한 형제 사랑의 실천으로 그에게 참 믿음이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이러한 가이오의 선행을 알게 된 것은 6절에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그들’은 5절에 언급된 ‘나그네들’, 곧 순회 전도자들입니다.
순회 전도자들이 정해진 선교일정을 마치고 교회로 돌아와 담임 목회자였던 사도요한에게 선교보고를 하면서 가이오가 자신들을 어떠한 사랑으로 도왔는지 낱낱이 보고했습니다. 가이오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소리없이 선행을 베풀었지만, 그럼에도 순회 전도자들이 가이오의 선행을 온 교회에 보고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가이오의 선행이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순회 전도자들은 가이오의 선행만을 보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9절에 ‘디오드레베’라는 사람의 악행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보고 했습니다. 그래서 순회 전도자의 보고에 의해 누가 진정한 성도인지 온 교회가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말씀을 대하면서, 한 가지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가이오와 디오드레베의 행실이 온 교회에 낱낱이 알려졌듯이, “우리의 모든 행실 역시 하나님께 낱낱이 알려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단순한 추측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시편 139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행위를 다 아신다”고 말씀하고, 마태복음 10:30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신다”, 누가복음 12장에 “우리가 아무리 감추고 숨겨도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다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로마서 14장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죄를 범하면 죄 자체를 부끄러워하기보다는 죄로 인해 자신이 당할 수치를 부끄러워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죄를 감추려고 합니다. 또, 그와 반대로 선을 행하면 다른 사람들이 몰라줄까 하여 전전긍긍합니다. 악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그것을 숨기고 선한 척하는가 하면, 작은 선을 행하고서도 그것을 자랑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이것은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모습입니다. 아무리 감춰도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부디 여러분은 혹, 죄를 범하거나 선을 행하였을 경우, 세상 사람들처럼 어리석게 행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죄를 범했을 경우, 속히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며 회개하고, 상대방에게는 용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반면, 선을 행한 경우에는 선을 행할 만큼 삶의 넉넉함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겸손하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시면, 오늘 본문에서도 보듯이 반드시 여러분의 선행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와 이를 증언함으로써 오히려 더 큰 칭찬과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한 시골 여인이 항상 성경을 옆에 끼고 주위를 걸어 다니곤 했는데, 그러한 그녀를 보며 이웃들이 비웃는 투로 물었다고 합니다. “너는 왜 언제나 성경을 가지고 다니니? 네가 읽을 수 있는 다른 책들도 많은데…” 그때 그녀는 무릎을 꿇고 성경을 머리 위로 높이 들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맞아. 내가 읽을 수 있는 책은 많지, 하지만 나를 읽는 책은 오직 하나뿐이야”
이 이야기는 우리가 성경을 읽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이유를 매우 감동적으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아프리카 탄자니아 시골에 사는 여인의 입에서 이러한 고백이 나왔는지 놀랍기만 합니다. 그런데 제가 외교부 자료를 찾아보니까, 탄자니아는 인구 6,100만명, 기독교 인구 30%로, 인구도 기독교인도 우리나라 보다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고백이 그냥 나오는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이 여인의 고백처럼 성경에서 무엇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무슨 처세술이나 삶의 교훈을 얻기 위해 읽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한 것들은 다 부수적인 것입니다. 성경은 읽는 사람에게 ‘나는 누구인지?’, ‘나는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 땅의 삶을 마치고 난 후 나는 어디로 가는지?’ 우리의 근본을 알게 해 줍니다. 우리가 마음 문을 열고 집중하여 성경을 읽으면 성경이 나를 읽기 시작합니다. 나의 문제를 읽고, 나의 필요를 읽고,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읽습니다. 그리고 깨닫게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바르게 읽은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어 그의 삶이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진정한 삶을 살게 됩니다. 성경은 이러한 우리 성도들의 삶을 ‘거듭난 삶’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이 교회 앞에서 가이오의 사랑을 증언했습니다. 그들은 순회전도자들입니다. 그들이 가이오의 사랑을 증언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편지를 들고 가이오에게 간 순회전도자들도 잘 대접해주고 사랑을 베풀어 주면 좋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 합당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합당하게"는 "하나님께 어울리게"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해가 더 쉽습니다 하나님께 하듯이 순회전도자들에게 대접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7절에서 이는 그들이 주의 이름을 위해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것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순회전도자들을 도와야 하는 이유가 여기 나옵니다. 즉 그들이 주의 이름을 위해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순회전도자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자신의 모든 영광을 포기하고 나가서 일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목숨을 내놓고 일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누가 먹을 것을 줍니까? 물론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늘에서 먹을 것을 던져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를 통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어디든지 복음을 전하는 곳에서 먹을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들을 돕지 않고 성도가 그들을 돕지 않으면 순회전도자들은 굶어야 했고 결국 굶어 죽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을 위해서 먹을 것을 주는 것은 성도의 도리이고 교회이 의무인 것입니다. 이는 자랑도 아니고 반드시 이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복을 받는 조건, 구원의 조건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감동을 주시는 자들이 나서서 순회전도자들을 도왔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은혜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순회전도자들을 성도가 돕고 영접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로 진리를 위해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기 진리는 바로 영생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함께 일하는 자들이 교회이고 성도이고 순회전도자들입니다. 순회전도자들은 목숨을 걸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생활은 어떻게 하는가? 이 부분을 교회가 책임져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생활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을 중단하고 먹고 사는 일을 위해 팔을 걷어붙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의 무게를 달아보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헌신의 무게도 달아보시지 않습니다. 오직 여러분의 믿음과 헌신이 진정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보십니다. 오늘, 진정한 믿음과 헌신을 고백하고 다짐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죄를 범했을 경우 속히 하나님과 상대방에게 용서를 구하고, 선을 행한 경우에는 가이오처럼 선을 행할 만큼 삶의 넉넉함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겸손하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지키는 일에 있어서 자신의 역할과 사명에 대하여 깊이 돌아보되, 하나님의 일에 있어 전후방이 따로 없음을 알아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해 헌신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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