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말씀: 유다서 1:12-16
12. 그들은 기탄 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의 애찬에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13. 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14.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15.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16.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며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설교: 이단과 거짓된 성도들
어느 청년이 목사님과 함께 차를 타고 여행을 갔습니다. 그 청년은
“목사님 저는 십계명을 싫어합니다. 십계명에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왜 그렇게 많습니까?”
하면서 십계명에 대한 저항을 이야기했습니다. 목사님은 어떻게 대답할까하고 생각하는데 바로 앞에서 이정표가 나타났습니다. “동쪽은..이고, 서쪽은..이다”라는 이정표를 보고 목사님은 자기들이 가야 할 목적지와는 반대로 차를 꺾었습니다. 깜짝 놀란 청년은 목사님 그쪽이 아니고 이쪽이라고 소리쳤습니다. 목사님은
“이 사람아. 내 마음대로 가면 되지 뭘 그래”
하며 암시적인 대답을 주었습니다. 자 빨간 신호, 파란 신호가 귀찮게 느껴집니까? 누구를 위한 신호입니까? 법이 누구를 위해서 있느냐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누구 때문에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이 법을 다 지키셨습니다. 그리고 완성하셨습니다. 법의 근본은 하나님의 사랑이며 사랑은 모든 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로 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어느 유대 랍비와 신교인이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그때 신교인이 말하기를
“당신들은 왜 맛있는 새우나 기름진 돼지고기 등을 먹지 않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랍비는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시니 안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먼 훗날 안 먹는 것이 좋다고 하는 것을 알 때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함께 나누고 있는 유다서는 교회에 몰래 들어온 이단과 거짓성도들에 대해 계속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는 단지 초대교회 상황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많이 있습니다.
지금 유다는 교회에 몰래 들어온 이단과 거짓된 성도들의 특징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계속해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믿음을 유지하고 사는데 방해하는 강력한 사탄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사탄을 물리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치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오늘 성경말씀을 통해 알게 될 것입니다.
12~13절 함께 보시겠습니다.
12. 그들은 기탄 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의 애찬에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13. 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오늘 본문에는 ‘암초’, ‘목자’, ‘구름’, ‘나무’, ‘물결’, ‘별’ 이라는 여섯 가지 은유적인 상징과 ‘원망’, ‘불만’, ‘자랑’, ‘아첨’이라는 네 개의 단어를 사용하여 이단들의 정체에 대하여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단들의 특징은 누가 보아도 성경의 가르침과 확연히 구별되는 반대적인 특징들입니다. 다시 말해, 이단들이 아무리 진리와 비슷하게 위장한다고 해도 성경의 가르침을 바로 알고 있다면 그들을 쉽게 구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애찬’은 ‘사랑의 잔치’라는 뜻으로 성도들이 예수 안에서 교제하기 위해 함께 먹는 공동식사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유다는 당시 이단들은 이러한 애찬에 암초와 같은 존재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암초’는 은유적인 표현으로 ‘다른 사람에게 도덕적인 손상을 입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바다 속의 암초가 가까이 다가오는 배를 파괴하는 것처럼 그들을 가까이 하는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범죄하게 하여 신앙을 파괴시키는 암적인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이단들은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아름다운 성도의 교재를 나누는 애찬의 고유목적에는 관심이 없었고, ‘기탄 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여기에서 ‘기탄 없다’는 말은 ‘두려움이나 부끄러움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영적인 두려움이나 부끄러움도 없이, 다른 성도들을 위한 작은 배려도 없이 뻔뻔하게 자기 배만 채우고 술에 취하는 추태까지 부리면서 애찬의 정신을 파괴하며 성도들을 타락의 길로 미혹했고, 유다는 이러한 그들의 모습을 ‘애찬의 암초’로 묘사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단들은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 같다고 말씀합니다.
이단들은 오랜 가뭄에 비를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은 마치 비를 많이 머금고 있는 구름인 것처럼 말하지만 실상은 그 안에 비를 조금도 머금고 있지 않은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과 같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단들이 아무리 자신들만 영적인 지식을 가겼다고 자처 할지라도 실상은 아무것도 없는 무익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도 그 자체로 이미 죽어 있음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혔다’는 것은 결코 생명이 있을 수 없음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은 이단의 거칠고 파괴적인 행위들에 대한 표현으로, 그들은 수치스러운 행동을 하고서도 그것을 반성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큰소리를 치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금 이 시대에도 이러한 사람들이 버젓이 큰소리를 치는 교회가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유리하는 별들’은 타락한 천사들이 빗대어 한 표현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사랑과 가르침에 따라 ‘성령 안에서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고전 12:13).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연약한 자들을 도와주고 성도 간에 서로의 짐을 기꺼이 함께 나누어집니다. 서로 존중함으로 한 마음 한 뜻으로 하나님의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습니다.
그러나 이단은 다릅니다. 그들은 믿음이 연약한 자는 정죄하여 자기 앞에 무릎 꿇게 하고, 믿음이 강한 자는 모함하고 헐뜯어 밀어냅니다. 상대방을 넘어뜨리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으려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자신의 흉계를 철저하게 숨깁니다.
마치 광명한 천사인 것처럼 자신을 위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교회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막아내야 합니다.
이단들이 교회에 흠집을 내지 못하도록 서로를 돕고 일으키고, 생명을 살리는 일들을 계획하여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어서 14-16절의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14.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15.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16.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며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이처럼 거짓 신자들을 기다리는 것은 대심판입니다. 그때 주님은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인데 불신자는 수욕의 부활로 일어나 불못으로 떨어질 것이고, 참 신자는 영광의 부활로 일어나 새하늘과 새땅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 신자들은 모든 악한 행동, 악한 말들에 대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불못에서 그들이 지은 죄악에 비례하는 영원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유다는 16절에서 거짓 신자의 평소 습관을 지적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입니다. 내 뜻대로 안 되면 하나님을 곧바로 원망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사람들을 향해 불만을 토합니다. 이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늘 못마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3-5).
셋째는 정욕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정욕은 “에피쑤미아”입니다. 삶의 목적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욕망과 영광이라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정욕은 우상 숭배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돈이 우상이든지, 여자 또는 남자 등 이성이 우상이든지, 인기가 우상이든지 권력이 우상이든지 학벌이 우상 등입니다.
성경은 ‘에피쑤미아’를 탐심, 또는 욕심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탐심은 언제나 변장과 거짓의 탈을 쓰며 또한 반드시 죄를 낳습니다.
“너희는 탐심의 탈을 쓰지 말라”(참조, 살전 2:5).
넷째는 건방짐과 교만 가운데 자랑하는 말을 하는 자입니다.
여기서 자랑은 세상의 것들을 자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랑은 사랑하기 때문에 자랑합니다. 한글로 자랑과 사랑은 점 하나 차이입니다. 자랑과 사랑은 언제나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거짓 신자는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반드시 세상을 자랑합니다. 주변 사람들을 만날 때 그들이 무엇을 자랑하는지 잘 들어 보기 바랍니다. 바로 그들이 자랑하는 것이 그들에게 소중한 것이요 그들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돈 자랑하는 사람은 돈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학벌을 자랑하는 사람은 학벌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학벌이 그의 가치관이며 그 사람의 인생의 목표입니다. 자녀를 자랑하는 자들은 자녀가 우상인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튼 사람은 자기 맘으로 사랑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자랑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즉, 자랑은 그 사람의 우상이 무엇인지를 쉽게 드러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무엇을 자랑하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가치관이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그가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는지 그 깊은 동기가 자랑을 통하여 노출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무엇을 자랑하며 살아가는지를 보면 그 사람이 진짜 신자인지 가짜 신자인지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단들도 이 세균들과 똑같습니다.
단 한사람의 이단이 수천 명이 모이는 교회를 무너뜨리는데 요구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 같은 작은 교회는 그들에게 있어 더욱 쉬운 먹잇감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단을 철저하게 경계해야 합니다.
단 한 마리의 세균이 순식간에 물통 전체를 오염시키듯이, 그냥 흘려듣는 이단들의 거짓된 가르침이 우리들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아주 작은 죄악과의 타협이 우리의 신앙을 송두리째 무너뜨림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무언가 큰 죄악이 아니라, 무심코 내뱉은 원망과 불평이 한 마리의 세균처럼 나의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림을 명심하고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며, 악한 성품들을 주의 말씀으로 깨끗하게 소독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가득한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내 안에 이단의 잘못된 가르침이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를 깊이 돌아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내 입에서 원망과 불만의 말들이 있지는 않았는지 스스로를 돌아봅니다. ‘주안에서 항상 겸손하라’하신 가르침을 잊고 자기의 공로를 자랑하고 내세운 적은 없는지, 힘있는 자들 앞에서 아첨하며 비굴했던 모습은 없었는지 스스로를 돌아봅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단들의 악한 계획들을 알 되, 그에 앞서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거함으로 경건을 일용할 양식으로 삼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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