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로마서 9: 14~18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설교: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오늘은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에 대해 함께 은혜 나누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럼 ‘긍휼’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불쌍하고 가엾게 여겨서 도와준다는 말입니다.
긍휼히 여긴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성 프란시스의 이야기를 통해 그 뜻이 무엇인지 아시기를 바랍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는 자기의 성당 주변에 강도들이 진을 치고 있다가 예배 드리러 오는 사람들을 털어 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른 수도승들이 어서 경찰에 알려 그들을 잡아가게 하자고 말했으나 성 프란시스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수도승들에게 말하기를, 음식과 술을 좀 가지고 강도들에게 가서 사람들의 재물을 훔치기는 하되, 죽이지는 말 것을 약속받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런 다음 얼마 뒤에 다시 그들을 보내 주일과 축제일에만은 물건을 훔치지 않기로 약속 받고 오게했습니다. 그렇게 천천히, 천천히 그는 그들을 회개 시켰습니다.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도 이렇게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다해서 바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가지고, 서서히 좀 더 선하고 의로운 사람으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단숨에 자신의 죄를 깨닫고 모든 나쁜 습관이며, 죄짓는 일들을 끊어낸다면 그 사람은 정말 복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단번에 죄짓는 일을 끊어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이런 우리를 아십니다. 긍휼이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합니다. 자꾸 내맘 대로 안되고 잘 살고 싶은데도 나쁜 습관 때문에 나 자신 스스로 엉망이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결코 절망하거나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엉망인 우리를 예수님께서 살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는 새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축복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바울의 간증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정말로 사랑하십니다.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시면서 힘을 얻고 능력을 얻고 위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14~15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구원에는 하나님의 긍휼이 없으면 안 되는데 그 긍휼을 누가 베풀기로 하십니까? 하나님이 하십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이 주권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긍휼은 오로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하는데 네가 왜 감 내놔라, 콩 내놔라 하느냐’고 하십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떠하든지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는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지 않는다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선택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에 대해 소중히 생각하지 않으신다면 다음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인디안 청년이 영국 런던에 있는 버킹검궁전을 찾아갔습니다. 그의 평생 소원은 궁 안에 들어가서 임금님을 알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청년이 궁전의 수위에게 말하기를 “나는 인디안 출신 알리라는 사람인데 궁전 안에 들어가서 왕을 뵙기를 원합니다.”
그러자 수위는 한마디로 거절합니다. 왜 내가 거절을 당했을까? 영국식이 아니어서 그런가보다고 개명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찾아가서 이제 내 이름은 빌림이라는 영국식 이름으로 바꾸었으니 좀 들어가게 해 달라고 사정을 했습니다. 그래도 안 된다고 거절했습니다.
이 청년이 다시 생각하기를 아마 내 말이 영국식 발음이 아니고 사투리를 쓰기 때문에 그런가 보다 해서 그 날부터 열심히 영국 어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영국인 이상으로 실력이 늘었습니다.
그리해서 다시 궁전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수위가 못 들어가게 막습니다. 사정을 해도 안 됩니다. 풀이 죽어서 멍하니 다른 사람을 쳐다보니 자신과 영국인의 다른 점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곧 복장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아하, 옷이 다르기 때문이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고 즉시 양복점을 찾아가서 최신형으로 영국 제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이제는 들여보내 주겠지 하고는 다시 궁전으로 갑니다. 처음에는 수위가 몰라 봤습니다.
그러나 저만큼 들어갔을 때 여보시오 하고 부르더니 청년을 붙들고 신분증을 보자고 합니다. 신분증을 보이자 영국 시민증이 아니어서 안 된다 어서 나가라고 합니다. 그제야 청년이 깨닫고 영국 시민권을 얻기를 노력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영국시민권을 얻어서 비로소 궁전으로 들어가서 왕을 알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새 이름을 얻는 것입니다. 그 새 이름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으로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모세의 이야기를 예를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많은 자들 중에서 모세를 택하셨습니다.
사실 모세는 절대 민족의 지도자가 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동족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신음하고 있을 때 모세는 인생의 전반 40년을 어떻게 살았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을 학대하는 이집트의 왕자 신분으로 살았습니다.
호의호식하며 민족의 고통에 동참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민족의 독립을 이끄는 지도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당시 이집트에서 노예생활 하던 사람은 장정만 60만 명이었습니다.
그 장정들 중에서 민족의 자존심을 투철하게 지키는 젊은이들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매국노같이 왕궁에서 왕자의 신분으로 호의호식하던 모세를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지도자로 적합하다고 보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 긍휼을 베풀어 지도자로 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은혜로 선택 받고 은혜로 구원받고 은혜로 주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마 18 : 21~35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천국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일만달란트 빚진 자가 있었습니다. 갚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엎드려 자비를 구합니다.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이 말씀이 바로 우리가 은혜의 선물로 얻은 구원을 보여 줍니다.
이 종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그가 돈을 단 한푼이라도 가져다 바친 것이 아닙니다. 그냥 아무 수고도 노력도 없이, 마치 십자가의 흉악한 강도가 주님을 인정하는 믿음만으로 구원받음 같이 용서받았습니다.
이 종이 빚진 일만 달란트는 우리 죄의 짐을 상징합니다. 갚을 수 없는 죄의 무게를 상징합니다.
솔로몬 대왕의 전성기에 그가 거두어 들인 일년 세수입이 금 666달란트 였습니다. 그러니, 일만 달란트를 과연 누가 갚을 수 있습니까?
전적인 은혜로, 예수그리스도의 한량없는 보혈의 공로로만 우리의 무거운 죄짐을 벗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구원받았다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이 탕감받은 종은 분명히 모든 빚을 탕감받았습니다. 완벽한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나가다가 자신에게 백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납니다.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니까, 요즘 시세로 한 5백만원쯤 되는 빚입니다. 이 동료도 당장 갚을 능력이 없었습니다.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주소서"
그러나 배은망덕하게도 용서받았던 종은 그의 동료를 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임금님이 이 이야기를 듣고 너무나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하고 빚을 갚을 때까지 감옥에 넣어버립니다.
이렇게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던 마음을 접으십니다. 또 하나님의 긍휼을 받았으면 그 긍휼을 배워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해야하는데 못했다면 하나님께서는 꾸짖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17~18절입니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이집트 바로 왕이 하나님 앞에서 강팍하게 행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강팍함으로 대하지만 하나님은 그 바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시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드러내도록 사용하신다는 사실이, 그러나 그 강팍한 바로는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됩니다. 강팍했던 가룟유다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의로운 도구로 선하심의 도구로 우리가 쓰임을 받느냐? 하나님의 강팍한 도구로 쓰임을 받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가룟유다와 바로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은 모두가 하나님 앞에 회개할 기회를 있었습니다.
우리 제자들은 하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가룟유다가 있는 모든 제자들에게 이 자리에 나를 팔 자가 있느니라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결정적으로 가룟유다가 자신이 하는 행동이 잘 못 되었다는 지적을 하시면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가룟유다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여러차례 가룟유다에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말씀해 주셨지만, 가룟유다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열가지 재앙을 주셨다는 말씀은 역으로 말하면 제가 하나님 앞에 대적하지 않고, 창조주 하나님 앞에 열 번씩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끝까지 우리를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이 모두가 영원히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말씀 속에 깨닫게 하시고, 성령으로 알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원대로가 아니라 우리의 달음질로 인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인해서 오늘 여기까지 우리가 있음을 기억하게 하시고, 감사하게 하시고, 그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옵소서. 바울사도의 고백처럼 나의 나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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