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말씀: 갈라디아서 5: 13~15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설교: 죄의 종에서 사랑의 종으로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죄의 종에서 사랑의 종으로 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그 많은 죄를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로워졌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얻은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것입니다. 죄에서 자유로워진 우리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예전과 달라진 것이 있습니까?
정신과 의사들은 경험상 말합니다. ‘사람은 결코 달라질 수 없다’고 말입니다. 물론 이 말은 사람의 의지로 다른 사람이 될 수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태어난 본성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격이 못되고 자기밖에 모르던 사람이 자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또 자기도 힘들어졌을 때, ‘아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하면 죽기살기로 성격을 고쳐서 삽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다가도 불쑥 불쑥 옛날 성격이 나오고 폭발하면 그동안 참고 쌓아놨던 모든 것이 다 날라가기도 합니다. 그러면 사람의 힘으로 인생이 달라지겠습니까? 소위 말하는 팔자가 바뀌겠습니까? 사단이 끝까지 붙잡고 지옥으로 끌고 가려는 이 상황이 달라지겠습니까? 내 힘으로 안됩니다. 사람의 힘으로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힘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그 희생의 피로만 되는 것입니다.
오늘 그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십니다. 죄의 종에서 사랑의 종으로 서는 방법을 알게 해주십니다. 말씀에 귀기울이시고 그 뜻을 마음에 담아 하나님 말씀대로 사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13절 말씀입니다.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옛날에 세 자매를 둔 사람이 있었습니다. 세 자매는 모두 예뻤으나, 그들은 제각기 한 가지씩 결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큰딸은 게으름뱅이이고, 둘째딸은 훔치는 버릇이 있고, 셋째 딸은 험담하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한편, 아들 삼형제를 둔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세 딸을 모두 자기네 집으로 결혼시키지 않겠느냐고 청해 왔습니다. 세 자매의 아버지는 자기 딸들이 가지고 있는 결점을 그대로 말하자 부자는 그런 점은 자기가 책임지고 그것을 고쳐가겠다고 장담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세 자매는 시집을 가게 되었는데, 시아버지는 게으름뱅이 첫째 며느리에게는 여러 명의 하녀들을 고용해 주었고, 남의 것을 훔치는 버릇이 있는 둘째 며느리에게는 큰 창고의 열쇠를 주어 무엇이든지 갖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남을 헐뜯기를 좋아하는 셋째 며느리에게는 매일같이 오늘은 험담할 것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어느 날 친정아버지는 딸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여 사돈집을 찾아갔습니다. 큰딸은 얼마든지 게으름을 피울 수 있어 즐겁다고 말했고, 둘째 딸은 갖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가질 수 있어 좋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셋째 딸은 시아버지가 자기에게 남녀 관계를 꼬치꼬치 묻기 때문에 귀찮다는 대답이었습니다.
그런데 친정아버지는 자기 셋째 딸의 말만은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셋째 딸은 시아버지까지도 헐뜯고 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자유를 못 느끼는 이유는 그 자유를 자기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세 딸에 대해 말씀 드렸습니다. 기회를 주었고,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두 딸은 그 안에서 자유를 감사히 누렸지만 셋째 딸은 자유를 헛되이 썼습니다.
왜냐하면 탈무드에서 남을 비판 하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남을 비방하는 것은 살인보다도 위험한 일이다. 살인은 한 사람밖에 죽이지 않지만 비방은 세 사람을 죽인다. 비방하는 사람 자신, 그것을 듣고 있는 사람, 그리고 화제가 되는 사람이다”라고 했다.
내가 남을 비판하면 나에게는 열배, 스무배로 되돌아오게 마련입니다.
비판은 이렇게 자기 살을 깎아 먹는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자기 영혼을 메마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비판 하지 말고 도리어 드러내서 부딪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만큼 사람의 말이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 말합니다. 속된 것, 즉 거룩하지 못한 것은 스스로가 아니라 속되다고 말하는 사람이 거룩하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즉, 비판하는 그 순간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그 사람보다 더 잘못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간음한 여자를 끌고 와서 욕하고 비난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 우리는 주님 앞에서 아무도 거룩한 사람이 없습니다. 다 속된 사람입니다. 다 죄지은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당당한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자유를 받았지만 육체의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축복받으라고 사단에게서 벗어나 하나님 자녀가 되라고 자유를 주었더니 육체의 기회를 삼아 예전보다 더 쎈 죄를 짓습니다.
교회에서 우리는 종종 안타까운 일들을 봅니다.
너무 지치고 힘들어 교회에 왔지만 자유를 누린다면서 함부로 남을 비판하고 또 조심하지 않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러나 로마서 14장 13~14절을 보면, 유대인으로서 살다가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이 헬라인이나 이방인들이 교회에 와서 신앙생활 할 때 먹는 것이나 말하는 데 있어서 율법적이지 않은 걸로 비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산 귀한 사람들인 것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어떻게 예수님께서 이들을 하나님 믿고 구원받게 했는데 한낱 우리가 좀 먼저 믿었다고 유대인으로 태어나 하나님 율법 좀 안다고 이래저래 위에 있는 사람인 양 가르쳐들고 비난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께 받은 자유에 대해서 마르틴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노예 의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받은 자유는 노예 의지에 있지 마음대로 ‘내 하나님에게 가고 내가 하나님 믿고’라는 식으로 내가 선택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루터가 이런 비유를 한 적이 있습니다.
말이 하나 있는데 이 말은 건강하고 아주 좋은 말입니다. 말은 자기 발로 뛰고 걷고 하고 또 간혹 수레나 마차도 끕니다. 다 말의 힘으로 합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그 말을 누가 모느냐에 따라 멋진 트랙을 모는 경주마가 될 수 있고, 아니면 시골길을 걸어 퇴비를 실어나르는 그런 농가의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를 이끄는 자가 사단이라면 아무리 교회를 다니고 하나님을 외치지만 나는 육체의 삶, 즉 지옥으로 끌려가는 인생을 살 수밖에 없고, 나를 이끄시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라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로 향해 가는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에 우리가 누구를 태우느냐, 누가 우리의 주인이 되느냐에 따라 가는 방향, 사는 일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을 보면, 예수께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을 때 사용하셨던 중요한 무기가 있습니다. 바로 말씀의 무기입니다. 사탄이 시험을 하면 예수께서는 "기록 된 바" 라고 하시며 말씀으로 사탄을 대적하셨습니다. 말씀은 세상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사탄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참된 자유는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때에 있습니다.
마치 물고기가 물에 있어야 자유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 곧 하나님의 말씀안에 있을 때에 최고로 자유할 수 있도록 지음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살아가니까 방황하게 되고 부자유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온전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사랑의 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14~15절입니다.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모든 율법은 내가 아닌, ‘나의 이웃’을 사랑함으로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전날 밤에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당시 발을 씻어주는 일은 종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종이 되어 섬김의 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스스로 종이 되어 다른 사람을 섬기고 있습니까? 아니면 종을 부리는 주인의 행세를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종이 되라고 요구만 하는 사람입니까?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유케 된 자들이 당연히 해야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종노릇이라고 말합니다.
종노릇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것은 강제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면 자연스럽게 종노릇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 부모가 자녀들은 양육할 때에 그 일은 마치 종이 주인을 섬기는 것보다 훨씬 수고스러운 일들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종노릇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러한 행동은 대수롭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도, 죄인된 사람들을 사랑하시니까 스스로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이들을 사랑하면 종노릇해도 그 안에서 자유함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종노릇이라는 표현을 쓰기는 했지만 사랑으로 섬기는 이들은 그것을 종노릇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부르심의 사명이요, 예수님을 따르는 삶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늘 겸손하고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위해 조심 또 조심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담배나 술 문제 같은 것들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담배를 피지 말라~’라고 성경에 있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5:18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다’라고 했지 술 먹지 말라는 말은 없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포도주를 마셨고 예수님께서도 포도주를 드셨습니다. 그래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말합니다. 담배 피는 것이 죄가 되지 않고 또 술 먹는 것도 죄가 아닌데 뭐 그러냐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시험에 든다면 결과적으로 죄입니다. 형제를 신앙적으로 시험에 들게 해서 넘어지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 안에 덕을 세워야 합니다. 덕이란 상대방을 이롭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상대방에게 불이익을 주고 어려움을 준다면 그것은 덕스러운 행동이 아닙니다. 덕을 세우면 모든 문제들은 하나님께서 해결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일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서도 저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살려면 이것 저것 꼬집어 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알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나도 살고 우리가 살고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는 길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의 종에서 사랑의 종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자유를 주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어떤 아들이 ‘나 스스로 태어나고 나 스스로 크고 나 스스로 맘대로 산다’라고 하면 어떠시겠습니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사서 귀한 생명 얻고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를 잊지 마시고 주 안에서 사시는 축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하루하루를 살게 하시고 주 은혜로 살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주시는 축복 받게 하시고 늘 구원의 기쁨을 가지고 온전히 살게 하옵소서.. 사랑의 종으로 서게 하옵시고 늘 주님 주신 자유를 누리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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