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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 5:6~9 주일예배 20180729)

by 온누리선교 2018. 7. 27.

성경말씀 : 요한복음 5:6~9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설교: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한덕순이라는 여자분이 계셨습니다.

이 여자분은 19세때 만난 남편을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격과 관심사가 너무나도 잘 맞았기 때문입니다. 가끔씩 이상한 행동을 할 때가 있었지만 연애시절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만난지 3달이 지나고야 남편이 마약중독자인 것을 알았지만 너무도 사랑했기에 오히려 불쌍한 생각이 먼저 들었고 사랑의 힘으로 끊게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는 4년만에 결혼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결혼하고 나서도 10년동안이나 남편은 약을 끊지 못했고, 아내는 수시로 감옥에 들어가는 남편을 옥바라지 하며 보내다 그만 심한 우울증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둘째 아이까지 태어났지만 남편의 중독은 차도가 없었고 심한 우울증에 빠진 아내까지 알코올 중독에 걸리고 심지어 자살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절망에 빠지 부부를 도와준 것은 마약중독자들의 재활을 도와주는 '소망을 나누는 사람들'이라는 단체의 대표인 신용원 목사였습니다. 한씨의 도움 요청을 받고는 또다시 구치소에 들어간 남편을 면회하러 가서 어차피 망친 인생을 목사인 자기에게 걸어보라고 설득했습니다. 결국 주님의 헌신적인 도움을 본받아 사역한 신목사는 두 부부 모두 중독에서 벗어났고 부모님이 회복되자 틱장애를 앓고 있던 아들도 자연스레 치유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자신과 같은 고통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며 도움을 주고 있는 이들 부부는 서로가 있기에 자신들이 있을 수 있다며 지금이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고 고백하며, 주님께서 신목사를 보내어 능력의 손을 일으켜 주심에 감사하다고 고백합니다. 이들 부부에게 보내진 신목사조차도 사실은 17년 동안 마약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성의 사랑도 중독을 이기지 못하고 인간의 노력도 우울한 상황을 바꾸지 못했는데 무엇이 이 한씨 가정을 불행에서 나올 수 있게 했을까요?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주 하나님의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그 깊은 뜻은 무엇일까요?


이를 위해 오늘 주님께서 주신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 당시  '베데스다'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예루살렘에는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는 이름의 연못이 있었습니다. ‘베데스다라는 말은 이름은 은혜의 집또는 자비의 집이라는 뜻을 지닌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곽 동북쪽의 양문(羊門)곁에 있는 이곳은 항상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곤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곳에 오셨습니다.

이 베데스다는 1888년 쉭(Herr Shick)이라는 사람이 발견하여 지금은 그 위에 기념교회가 지어져 있는데 출입문에는 본문말씀을 각국어로 기록해 놓은 것이 있습니다. 이 연못은 BC2세기에 길이 100110m, 너비 6280m, 깊이 78m나 되는 두 개의 쌍둥이 연못을 만들었는데 성전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목적과 더불어 종교적, 의학적 치료를 목적으로 건설되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지역은 기후가 덥고 건조하며 특히 예루살렘은 해발 800m나 되는 언덕위에 위치하고 있어서 물이 귀한 곳입니다. 거기에 물을 가두는 연못을 파고 행각을 지어서 쉼터를 만들어 놓은 것은 더위에 지치고 피곤해 진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안식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인공 연못이며, 쉼터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곳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5:3절에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공원이나 각종 위락시설이 있는 곳에는 사람이 많이 모여듭니다. 베데스다처럼 어려운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주는 목적의 집이라면 도움을 받아야 될 많은 사람들의 집합소가 됩니다. 이곳에 신체적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여러 가지로 딱하고 어려운 형편의 사람들이 저마다 어떤 기대를 가지고 찾아왔을 것입니다. 희망이 없는 세상에서 지푸라기라도 붙잡을 수 있다면 사람들은 몰려들게 되어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목적을 가지고 온 베데스다는 당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인공문명(人工文明)의 현장이었을 것입니다. 세상 나라의 문명은 대개가 사람의 육체적 삶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의 정서와 욕구가 반영되어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편리하고자 하는 의지로 문명이 이루어졌고 발전해 왔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베데스다도 정신적, 영적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문화시설이 아니라 단순히 육체적 피곤과 질병으로 인한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이 일시적으로나마 쉼을 얻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위락시설에 불가했습니다. 세상 나라의 정치나 경제 또는 예술과 문화는 대체로 사람들의 육체적인 욕구나 세상적인 만족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노아의 후손들이 최초로 시날땅 평지에 건축했던 바벨론 성과 탑도 결국 우리의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자는 목적으로서 기독교문명과 반대되는 인공문명의 표본이었습니다(11:1-4).

이러했기에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 베데스다가 이름뿐인 베데스다, 즉 허울좋은 은혜의 집이었을 것입니다. 특히 38년된 병자와의 대화를 통해서 베데스다에 어떠한 처지와 생각을 갖고 온 사람들이 그 곳에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먼저 말씀드리자면, 예루살렘의 베데스다는 그 이름에 걸맞지 않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첫 번째, 맹목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거기 와 있는 무리들은 육체의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입니다. 그중에도 서른여덟 해 동안 앓고 있는 병자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하나같이 가족들의 부축을 받으며 그곳에 와서 온 종일 연못의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온 사람들은 모두 근거 없는 전설을 믿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5:4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고 하였습니다. 하늘에서 천사가 목욕하러 내려온다는 말은 우리나라 전설에도 간혹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가상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이런 전설을 믿고 사는 사람은 육체의 질병보다 더 가련한 정신적 문제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둘째로, 이기적(利己的)인 사람들의 집합소입니다.

6~7절 말씀 함께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베데스다에 오신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에게 다가가신 것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병을 앓으며 불행한 삶을 살았던 이 사람은 베데스다를 찾는 대표적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향하여 다시 네가 낫고자 하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렇게 많은 병자들이 베데스다에 쉼을 얻고 소망을 품으며 왔건만, 아무도 그를 물어 넣어줄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는 처참한 상황이었습니다. 오직 그만 그런 것이 아니라 베데스다에 빽빽이 몰려 온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 하였습니다. 이러한 험학한 분위기에서 어떻게 자비와 사랑을 기대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하여, 외로움과 슬픔에 지친 38년된 병자는 네 낫고자 합니다라고 한 것이 아니라 나를 낫게끔 베데스다 연못에 넣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8~9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 병자가 기대했던 답과는 전혀 다른 답입니다. ‘그래 내가 물이 동할 때 너를 넣어주마, 너의 친구가 되어 주겠다라는 위로의 말이 아니라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만약 38년된 병자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이 사람이 도대체 뭐길래 38년동안 이 방법 저방법 다 쓰고도 모자라, 이제 마음으로도 쉼을 얻고 병을 고쳐보려는 심정으로 이 베데스다에 왔는데, 이 유일한 방법인 베데스다에 넣어줄 생각은 안하고 나보고 일어나 걸으라니... 그것도 네 자리를 들고 걸으라니.. 이게 무슨 뜻인가..”

라고 생각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희한한 것은 이 사람이 말씀대로, 조금의 주저함 없이 자리를 들고 걸어나갔다는 것입니다. 대단한 것입니다. 자신의 방식, 자신의 생각을 예수님을 만나자 바로 던져버리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했다는 것입니다.

38년된 병자를 통해, 예수님의 말씀과 함께 능력이 행사된 것입니다. 38년된 병자는 그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인하여 완전히 나음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말씀의 능력을 믿고 순종할 때 우리에게 기적이 반드시 나타납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문제가 생기거나 걱정이 앞서면, 종종 응답받기 위해 기도합니다. 그런데 응답받지 않는 경우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무응답도 응답이라며 위로하기는 하지만, 도대체 말씀과 함께 능력을 발휘하시는 주님께 오는 축복과 응답을 우리는 왜 못받는 걸까요?

주님의 방식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8년된 병자가 그곳에 있으면서 예수님을 만나서 말씀과 능력으로 치유받고 자신의 자리를 걷고 일어나 걸어가는 방법을 한 번이라도 상상이나 해봤겠습니까?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늘 천사들이 와서 저 연못에 물을 동하게 할 때 나를 넣어줄 사람을 보내주십시오.’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봤을 때 그 기도의 응답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습니다. 38년된 병자는 예수님을 만나 그 분의 말씀과 능력으로 그 치유가 되었고, 헛된 베데스다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아직도 헛된 베데스다에서 머물며 천사가 내려와 물을 동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 수 많은 사람들 중에 38년된 병자를 택하여 만나시고, 그보다는 좀 더 건강한 사람들 보다 더 먼저 치유하셔서 그들 속에서 당당히 자신의 자리를 들고 그 베데스다를 걸어나오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 우리 함께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음성을 우리가 들을 때마다 능력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시길 바랍니다.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어떤 것이 또 있나 생각하지 마시고 오직 그 분의 뜻에 순종하셔서 우리 모두 헛된 베데스다에서 나와 하나님의 축복의 자리에 서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오 살아계셔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엉뚱하고 헛된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간구한다면서 인간적인 기준으로 뭉친 자리에 서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였나이다. 38년된 병자처럼 베데스다 연못물만 바라보지 않고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 그 말에 순종하는 축복을 주시옵소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진정한 치유와 회복을 주시는 주님을 따르고자 하오니, 나의 힘이요 나의 방패요 나의 승리되시는 주님만을 섬기며 이 세상 살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