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본문: 누가복음 2:30~32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설교: 주의 구원을 본 시므온
앞의 영상에서 보셨듯이 많은 사람들이 그 뉴욕 거리를 지나갔지만, 노숙자를 리차드 기어라고 생각도 못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본 것이 진짜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의 눈이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모릅니다. 겉모습만 보고 현재, 지금만 보지 그 안의 것을 보지 못합니다. 앞으로의 것도 보지 못합니다.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우리는 인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사람은 죄가 있어 문제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완벽하게 만들어 놓으셨지만 죄로 인해 완벽하게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우리의 영적인 눈을 열어주십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 안에 있기만 하면 진짜인 것을 보여주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양심이라고 가볍게 부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자, 함께 생각해 봅시다! 양심이 있었던 프랑스 여인 카린이 쓰레기통을 뒤지는 가엾은 노숙자에게 피자를 주었습니다. 카린은 꿈꾸던 뉴욕 여행을 하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 주셨던 양심을 지니고 있었던 카린은 평생 만날 수도 없었던 할리우드 스타를 만났고, 노숙자 역할을 했던 리차드 기어는 그 카린이 주었던 피자를 결코 잊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카린도 리차드 기어도 서로에게 아주 복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성탄절을 맞이하며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야할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이 살아있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히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구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주 하나님의 구원을 본 시므온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도 크리스마스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축복 가운데 기다리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시므온의 고백이 나옵니다. 그럼 이 사람은 누굴까요? 누가복음 2:25~27을 보면 이 시므온에 대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시므온은 평소의 삶이 의롭고 경건했습니다. ‘의롭고’에 해당하는 ‘디카이오스’는 옳은, 공의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의로운’자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우선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입니다.
‘경건하다’는 말 “율라베스”는 취하다, 꽉잡다는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따라서 경건한 사람은 좋은 것 곧 하나님의 말씀을 꽉잡고 살아가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누가 의롭고 경건한 사람입니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자 하나님의 말씀을 꽉잡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시므온은 하나님의 말씀을 꽉잡고, 약속의 말씀을 굳게 믿고 메세야를 기다렸던 사람입니다.
성령이 누구에게 역사합니까? 누구에게 지시하고 감동합니까? 성령은 불의한 사람에게 절대로 역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빗나간 삶을 사는 사람에게 지시하거나 감동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자 거룩한 능력을 버리고 세상의 것을 따라가는 사람에게는 성령님께서는 일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그 날이 될 때까지 참고 인내하고 죄짓지 않고 살려고 노력하며 경건하게 살려고 합니다. 믿음을 속이지 않고 절대로 버리지도 않습니다.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 . .”(눅2:25절)라는 말은 시므온은 나이는 들었으나 늘 경건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하실 때 의인 열 명을 찾으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멸망 하실 때 예레미야에게 의인 한 사람을 찾으면 예루살렘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의롭고 경건한 자 한 사람은 백만 명의 군대보다 더 강하고, 수천억 달라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은 의롭고 경건한 시므온에게 죽기 전에 메시야를 볼 수 있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둘째로, 시므온은 성령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시므온은 성전에 들어가는 것부터 성령의 감동으로 들어갔습니다.
노인 시므온은 평생 소원이 메시야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왜 메시야를 기다린 것입니까?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 메시야를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그는 메시야, 즉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실 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왜 그리스도가 내게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나의 삶의 환경을 바꿔주시고 나의 삶을 풍족하게 해 주시기를 바라는 기다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나를 구원해 주시고 온 사람들, 즉 인류를 구원해 주시기를 믿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시므온은 예전부터 예언되어왔던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성공, 자신의 즐거움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기다렸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이가 먹으면 더 오래 살려고 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사는 소망을 잃고 빨리 죽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시므온은 달랐습니다. 늙도록 성령 충만하였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가지는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알아볼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꿈을 꾸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는 게 지겹지도 않고 사는게 힘들지 않았습니다.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고 하나하나 하나님의 뜻대로 변해가는 것을 보는 그런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다리는 게 결코 힘들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도 이런 시므온과 같은 기다림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이 다 성탄절을 맞이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아기 예수를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은 아기 예수를 만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생각대로, 자기 주관대로 사는 사람은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을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의 지시를 받는 사람만이 아기 예수를 만나고 품에 안는 영광과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시므온은 성령의 지시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성령 충만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영적인 눈이 열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이렇게 성령이 충만한 시므온이 어떻게 고백하는지 보겠습니다.
30~32절의 말씀입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성령이 충만한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보고 구원을 보았습니다.
성전에는 마리아와 요셉만 온 것이 아닐 텐데 수십 명, 수백 명의 아기들이 있었을 텐데, 많은 부부들이 아기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고 예루살렘 성전에 왔을 것인데 말입니다. 성전 안에는 수많은 백성들도 있었고, 제사장들도 있었고, 바리새인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 누구하나, 하던 일을 멈추고, 아기 예수 앞에 와서 경배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어떻게 한 눈에 메시야를 알아보았을까? 시므온보다 더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어찌하여, 모든 면에서 둔감한 늙은 노인이 아기 예수를 메시아로 보는 영적 통찰력을 가질 수가 있었을 까? 그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품에 안았습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안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모하고 기다리는 성도는 시므온처럼 하나님을 안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창조주시오, 세상의 주인이시며, 우주보다 더 크고 위대하신 분, 이런 아기 예수님을 가슴에 안은 자는 얼마나 복된 자 입니까? 시므온의 가슴은 예수님을 안은 가슴입니다. 예수님을 안은 시므온은 우주를 안은 것입니다.
이렇게 우주를 안은 시므온은 이 아기 예수에 대하여 무엇이라는 마지막으로 말하고 있습니까? 시므온은 예수님을 “모든 자들에게 준비된 이방의 빛이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바로 하나님께서 온 인류에게 위로를 준비하신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이방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는 불쌍한 영혼들이며, 이스라엘은 선민 곧 선택받은 백성들을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오직 선택받은 민족들에게만 메시아로 온 것이 아니라 이방까지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시는 메시아로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대림절의 의미를 잘 생각해 봐야합니다. 단지 과거에 우리를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때에 영광의 주님으로 다시 오실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날을 연습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대림절은 즐거움과 기쁨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우리에게 약속하시기를 하늘나라에 가서 너희 있을 곳을 다 예비한 다음에 너희에게 오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의 구주를 믿고 소망하며 인내하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초대교회의 중요한 인사 가운데 하나가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뜻을 가진 "마라나타"였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속히 오리라"고 하신 약속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자세를 나타내는 인사말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의 사회 상황은 교회가 대단히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였습니다. 아주 심한 박해 때문에 교인들이 많이 떠나가고 남아 있는 사람들이 그 신앙을 지키기 어려웠던 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주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 그들이 기다렸던 재림을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재림 신앙을 통해서 그들은 영으로 오시는 주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믿음이 없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아무 소용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 기다리는 것이 너무 힘들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가장 힘든 것이 바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예전에 중국동포 교회에 있을 때 한 성도가 있었습니다. 이 성도는 한국에 오면, 돈도 벌고 한국 드라마에서 봤던 멋진 차도, 멋진 일자리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달이 지났습니다. 두 달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그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실망한 이 사람은 하루하루 술로 보냈습니다. 교회가 거짓말한다고까지 했습니다. 기도하면 일자리도 생기고 하나님 말씀 잘 들으면 멋진 차도 생긴다고 했는데, 왜 빨리 안해주냐고 말입니다. 같은 시기에 온 한 성도는 일자리에 들어가서 생각보다 작은 봉급을 받았습니다. 한국말을 잘 하지 못해서였습니다. 또 남보다 힘든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돈을 벌기는 벌었지만 돈이 금방 모이지 않아서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주일을 지키고 때마다 기도했고, 또 성실히 살려고 없는 살림에 돈을 모으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고 어려운 가운데 나를 지키신다 생각하면서 참고 또 참으면서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성도는 6년째가 되자, 국적 신청을 하게 되었고, 차를 사지 못했지만, 또 집도 사지 못했지만, 전세로 집을 얻어 날마다 이사하지 않고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을 불러서 안정된 한국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기다림은 믿음입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기다림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기다림은 소망입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희망이 있기에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어려워도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참아내는 것입니다. 인내입니다. 아무리 모든 것이 다 바뀐다고 하여도 그 기다림만을 바꾸지 않는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런 기다림 속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된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쉽게 포기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인내하고 소망하며 흔들림 없는 믿음 가운데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 누리는 귀한 믿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참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성도들도 시므온처럼 아기 예수를 간절히 사모하다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아기 예수님을 첫눈에 알아보았던 것처럼 예수님을 알아보는 성도들이 되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성령 충만함을 허락하옵소서! 주님! 경건하게 살고, 또 성령 충만하게 살았던 시므온이 영의 눈이 열려 아기 예수님을 가슴에 안았듯이 우리에게도 이런 은혜와 축복을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이 대림절의 계절에 이 어지럽고 곤한 세상에서 예수님을 기다리며 풍성함을 누리는 우리들이 되게 하소서. 이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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