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고린도후서 7: 5 ~ 10
5.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6.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7. 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8.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9.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설교: 두 가지의 근심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는 "근심은 생명의 적이다"라고 했습니다. 염려는 우리의 건강을 해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를 파괴하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명을 단축시킬 뿐 아니라 새로운 창조적인 일에 전념할 수 없도록 만듭니다. 시카고 러쉬대학교 메디컬 센터에서는 65세 이상의 노인 1064명을 대상으로 걱정 및 스트레스에 대한 반응을 조사한 후 3년부터 6년이 경과된 시점에 이들 중에서 누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있는지를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결과는 걱정이 많고 스트레스에 민감한 사람들일수록 노년기에 알츠하이머병에 걸릴 위험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배 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근심자체를 잊어버리라고 조언합니다. 근심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세상의 것을 놓고 근심하면 스스로 죽이는 일이 되지만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무엇을 걱정하고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서 열심히 살아야 할지를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상의 기나긴 길을 걸어갈 때 어떤 목적으로 가지고 어떤 길을 가야할지 헤메고 있다면 주님의 길로 걸어가는 방법을 오늘 귀한 주님의 말씀으로 아시기를 바랍니다.
5~7절의 말씀입니다.
5.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6.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7. 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을 때 엄청난 고난을 겪었고, 이를 안 고린도 교인들이 보내준 위로 때문에 힘이 되고 기뻤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실, 바울이 마게노냐에서 복음을 전할 때, 이교도들 뿐 아니라, 거짓 선생들에게 미혹당한 교회들로부터도 엄청난 공격을 당했습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몸이 아팠고, 또 교리 다툼과 같이 거짓 선생들과 홀로 험학한 싸움을 이겨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는 와중에 바울도 사람인지라 이러다 어떠한 해라도 당할까봐, 누가 해코지라도 할까봐 두려웠었다고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누구도 내편이 없는 곳에서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달려들면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게다가 이렇게 불안한데, 고린도 교회로 디도를 보냈으나 약속된 기한까지 돌아오지 않자 굉장히 두려웠을 것입니다. 바울은 디도편에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낸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편지는 고린도 교인들로 근심하게 하는 내용으로 아마도 바울 자신에 대해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잘못하고 있는 것과 거짓 선생들에게 속아 넘어가 복음을 흐리는 일들에 대해 책망하는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 보시기에 옮은 일들이 다 사람들의 욕심이나 오해 때문에 물거품이 될까봐 걱정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합니다. 그 일이 옳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말입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 무너지는 일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 두려움을 극복하면 사람은 ‘왜 내가 두려워했지?’라고 생각들 합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어떻게 이런 두려움을 극복해야할까요?
한 트럭 운전사가 있었습니다.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했던 그는 직장에서도 두터운 신임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그가 사는 지역에 심한 눈보라가 쳤습니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반드시 보내야할 물건이 있었기에 신임할 수 있는 트럭 운전사에게 부탁 했습니다. 아내는 눈보라가 점점 더 심해진다고 뉴스에 나왔으니 이번일은 맡지 말라고 했지만 남편은 회사에 중요한 일이라 어쩔 수 없다며 아내를 안심시키고 떠났습니다. 하지만 눈보라는 점점 심해졌고 목적지의 절반도 가지 못해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운전사는 눈보라가 약해지면 다시 길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으로 차를 길옆에 대놓고 잠시 쉬며 잠을 청했습니다. 눈보라가 점점 심해지는 것도 모른 채 깊은 잠에 빠졌던 그는 잠에서 깬 뒤 깜짝 놀랐습니다. 차 주위가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렇게 차 안에 갇힌 채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목이 마를 땐 눈을 먹으며 버텼습니다. 마침내 5일 만에 구조대가 그를 찾아냈고, 갇혀 있을 동안 정신적인 충격이 걱정되어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을 받게 됐습니다. 의사는 운전사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5일 동안이나 눈 속에 파묻혀 있었습니다. 두렵지 않으셨나요?” 트럭 운전사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저에게는 친한 동생이 있는데 반드시 저를 찾아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내가 살아만 있다면 반드시 저를 찾아낼 것이라고 믿었기에 전혀 두렵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선 우리에게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은 고백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음은 주의 팔과 지팡이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고난의 일들을 축복의 일들로 바꾸시는 유일한 분이 우리 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8~10절입니다.
8.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9.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절망 상태에 빠져 있었던 바울은 기다렸던 디도를 통해서 큰 기쁨을 얻게 된 것입니다. 디도가 돌아 온 것도 반가운 일이지만 디도는 고린도 교회로부터 좋은 소식을 한아름 안고 온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위로'라고 말씀했습니다. '비천한 자'란 원래가 헬라어로 ‘타페이누스’로 지면상 낮은 위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이런 말을 사용한 것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다른 어떤 방법을 택할 길이 없고 오직 하나님께만 의뢰할 수밖에 없는 자들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어려운 곤경 속에서 안과 밖으로 시달림을 받고 있었을 때 디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하나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비천한 자들을 반드시 위로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그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로버트 슐러의 처남 프랭크벤드 마틴은 18세에 아버지가 경영하는 대장간에서 사고를 당하여 왼손의 엄지손가락을 제외한 나머지 네 손가락을 절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고 나머지 손가락들을 사용하여 바이올린을 연주하기에 이르렀고 열심히 연습하여 오하이오주에 있는 수 카운티 교향악단의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현재의 상황에 개의치 아니하고 오히려 그 모든 상황을 하나님이 주신 기회임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맡기면 전화위복의 역사를 맞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즉 희로애락의 어떠한 순간에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분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9절에서 바울은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0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에 이르게 하고 세상의 근심은 죽음만 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지금도 변함없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납니다.
예전에 중국 내지 선교사인 허드슨 테일러도 그리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헌신했습니다. 그러나 일이 점점 많아지면서 협력자와 선교비가 필요했지만 그를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의 정신적 부담은 밤잠을 설치게 했고 마침내는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로 심해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경 요한복음 15장을 읽어 내려가다가 5절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고 하는 이 말씀이 가슴에 와 닿았답니다. 그 순간 갑자기 태양빛이 비취는 것처럼 그의 마음이 환하게 밝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주님은 포도나무이시고 나는 그 가지인데 내가 걱정할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주님께서 수분과 양분을 공급해 주는 나무이므로 가지인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데 가지인 내가 수분과 양분을 공급하려고 애쓰고 있다니 어리석었구나. 주님! 이 시간부터는 염려와 근심을 주님께 맡기겠사오니 책임져 주시옵소서."
이렇게 꿇어 엎드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어리석음을 시인하고 회개하며 모든 문제를 주님께 맡겼습니다. 그러자 마음에 평안이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그는 그 후부터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받고 성공적인 중국 선교를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셔들이고 하나님을 의지한 이상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고 생명의 길로 가야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길이 바로 이 길입니다. 오늘 주신 주님의 이 귀한 말씀 잊지말고 생명의 길로 하루하루 나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로우신 주님!
주님의 뜻대로 이 세상에 살면서 저 하늘나라를 위해 어떻게 나아갈까 항상 생각하며 가게 하옵소서! 없어질 이 세상의 근심으로 스스로를 힘들게 하지 말게 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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