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요한복음 13: 1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설교 :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
일본의 한 교회에서 가가와 도요히꼬라는 선생이 겨우 몇 명을 앉혀놓고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어처구니 없는 일은 예배가 끝난 후 어ᄄᅠᆫ 사람이 예배에 참석해 주었으니 그 대가로 돈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도박할 돈이 필요하다고 헀습니다. 그런데 이 도요히꼬 선생님은 그러면 그렇거니 하고 또 돈을 주어 보냅니다.
이런 광경을 보고 있던 친구는 “자네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군. 이건 위선이야! 이것이 도덕적으로 옳은 것이며 사회적으로 옳은 것인가? 이것은 오히려 이 사람들로 하여금 죄짓게 만드는 것이잖아!” 하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가가와 도요히꼬 선생은 대답하기를 “다만 예수님꼐서 하시던 일을 조금 흉내내서 하고 있을 뿐이지. 그래도 끝까지 사랑하고 끝까지 믿어 주는 길밖에는 도리가 없지 않아?”라고 했답니다.
오늘 성경말씀을 보니, 예수님께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라고 나옵니다.
그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으십니까? 이 시간 예수님의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심을 진실로 아시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듯이 그래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시간적으로 끝까지요 능력적으로도 끝까지요 인간의 모든 한계를 넘어서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생각하건대 열두시간도 못되어서 십자가에 돌아가십니다. 눈앞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다 알고 계십니다. 십자가의 길을 환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제자들과 함께 저녁 만찬을 잡수십니다. 얼마나 비장합니까? 죽음을 앞둔 그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가지고 십자가를 지고 가지만, 가시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제자들을 걱정하셨습니다. 놀라운 이야기가 아닙니까? 자신은 수난을 당하면서 자신의 고통과 불안과 그 아픔을 다 초월하고 제자를 사랑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 처지와 자기 기분에 매여서 사랑하기도 하고 사랑을 버리기도 합니다.
바로 가룟유다가 그리하였습니다. 가룟유다는 자신의 생각과 달리, 예수님께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공격을 당하고, 자신이 생각한 권력과 능력을 갖춘 지도자가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실속을 차리기로 마음을 먹고, 예수님을 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아마, 그 순간, 예수님과 가룟유다만이 제자들과 함께 하는 이 저녁 만찬이 마지막이 되리라는 것을 알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상황을 아시는 예수님은 가룟유다를 포함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포장되지 않아 흙먼지 나는 길을 샌들 하나만 신고 다니기가 일수였습니다. 따라서 발이 더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집이든 주인은 자기 집을 찾아온 손님에게 의례 발을 깨끗이 씻을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었습니다. 종이 있는 집에서는 손님들의 발을 씻는 일은 당연히 그 종들의 몫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친히 씻어주신 예수님의 이 행동은 겸손과 섬김의 최고의 본보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되어왔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예수님의 그 행동이 갖는 의미는 거기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그 행위를 단지 겸손과 섬김의 본을 보이시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고 만다면 그 행위의 보다 깊고 중요한 의미를 놓치고 마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보다 깊고 중요한 의미란 무엇이겠습니까?
자기 발은 결코 씻지 마시라는 베드로의 말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요 13:6~8)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사실 발을 씻는 것은 종이 주인에게 하는 일이지 결코 주인이 종에게 해주는 일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말도 되지 않는 일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보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의 주님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도 말도 되지 않는 일입니다. 종이 주인을 대신해서 벌을 받거나 죽는 일은 혹 있을 수 있어도 주인이 종 대신 벌 받고나 죽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이 죄 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죽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놀라운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그 완전히 우리의 상식을 뒤집는 구원의 역사를 행하실 것을 보이시는 상징적 행위가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끝까지” 사랑하셨다“라는 말씀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시간적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하셨다는 뜻도 될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으로 있는 힘을 다하여 온전히 사랑하셨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셔서 대신 죽으신 그 역사야말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심”의 표현이고 증거입니다.
한 가족이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아내와 듬직한 남편, 일곱 살의 아들, 다섯 살의 딸이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네 가족은 등산하려고 차를 타고 가다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세 명은 경상이었지만, 아들은 중상을 입었지요. 아들은 응급수술을 받았고, 의사는 피가 부족하므로 긴급수혈을 해야한다고 하였습니다. 조사 결과 의사는 딸이 오빠와 가장 가까운 혈액구조로 되어있으므로 딸의 수혈이 급히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딸은 다섯 살의 어린이였습니다. 아버지는 어린 딸을 앉혀놓고 그녀의 초롱한 눈망울을 보면서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오빠가 많이 다쳤는데 피가 부족하데. 네 피가 제일 좋다는데 오빠를 위해 피를 주겠니? 딸아이는 한참 생각하더니 말없이 고갤 끄덕였습니다. 수술은 대성공이었습니다. 수혈하고 병원의 침대에 누워있는 딸에게 아버지가 그녀의 작고 흰 손을 잡으면서 너 때문에 “오빠가 살아났구나. 새 생명을 얻었어!” 하고 말했습니다. 딸은 아빠의 말을 들으면서 기쁨의 미소를 짓나 싶더니 이내 심각하게 물었습니다. “근데 아빠 저는 언제 죽나요?” 아빠는 어린 딸이 피를 흘리면 죽는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습니다. “피를 뽑으면 죽을줄 알고도 오빠에게 피를 주었니?” 아빠의 물음에 딸은 단호하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오빠를 사랑하잖아요."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죽을 줄 알면서도 십자가에 오르신 그 사랑입니다. 이것이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끝까지 사랑한다”는 말이 잘 이해가 안가신다면, 지금 누구의 발을 닦고 있는지 잘 보십시오.
자신을 배신하고 팔아넘겨 십자가에 죽게 만들 가룟유다의 발을 닦고 계십니다.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이라고 하는 교부의 말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발을 씻길 때에 가룟유다의 발을 제일 먼저 씻겼다고 합니다. 원수며, 자신에게 해를 가할 가룟유다의 발을 씻기시며 제자를 사랑한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가룟유다의 검은 마음을 아시면서도 가룟유다를 섬기고 끝까지 사랑하였습니다. 가룟유다만 검은 마음을 가졌을까요? 우리가 쉽게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거의 아마도 제자들의 마음속에도 가룟유다 비슷한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혀가자, 제자들은 어떻게 했습니다. 예수님을 지키기는커녕, 다 흩어져 버렸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어떠했습니까?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도망갔습니다. 제자들도 다 그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셨습니다.
그리하여도 선과 악은 분명히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요 13:1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잘 생각해보면, 예수님 자신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자는 이미 목욕한 자로 빗대어 이야기 하고 계신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함께 씻음을 받은 자들 가운데에서도 구원받지 못할 자를 이야기 하시는데, 그것은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라는 표현으로 돌려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요한은 빗대어 이야기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압니다. 11절에 이어서 그 깨끗하지 못한 제자가 바로 “가룟유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마태복음 13장에 나타난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가 생각이 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에서 집주인의 알곡을 사랑하시는 법을 보여주시며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셨습니다. 알곡이 상할까봐 가라지들에게 함께 비료도 주고 물도 공급합니다. 똑같은 사랑으로 공급합니다. 그러나 추수의 때가 오면,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주인의 곳간에 넣어질 것입니다. (마 13:24-43)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행하셨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악인까지도 용납하시며 섬기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추수의 때, 심판의 때가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억울하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소망하고 나가신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시고, 자신들을 죽음으로 억울하게 몰아넣은 사람들까지 사랑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너무 사랑하셨기 때문에 결코 한명도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넣었습니다. 주님은 이 사실을 아셨습니다.
주님은 발뿐 아니라 온몸을 씻어주기를 구하는 베드로에게 목욕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시며 이어서 너희는 깨끗하지만, 모두가 깨끗하지 않다고 하시면서 가룟유다의 마음에 찔림이 있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가룟유다가 회개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께서 열두 제자를 택하신 가장 큰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열두 제자를 택하신 후 그중에 누구는 진짜 제자로 삼고 누구는 들러리로 삼기 위하여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한 사람 한 사람 끝까지 사랑하시기 위해서 열두 제자를 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90%도 아니고 99%도 아니고 100% 사랑하십니다. 100% 사랑하는 것은 이웃의 발을 씻는 것입니다. 엄청난 것을 요구할 때 그 요구를 다 들어 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모습 그대로 그를 받아주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끝까지 사랑하였으니, 너희도 사랑하라” 아무리 그 누가 내게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상처를 줬다하더라도, 가룟유다에게서 받은 예수님의 상처만 하겠습니까? 제자들의 배신만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내 안의 상처와 미움을 이 순간 버리시고, 주님의 끝까지 사랑하신 그 영원한 따스함 안에서 거하셔서 차갑고 힘든 세상에서 풍요롭고 평안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시면서 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이 충만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배신하고 죽음으로 몰아넣은 제자들까지 용납하고 그 발을 손수 닦아주셨습니다. 어찌 인간의 힘으로 그리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은혜와 성령의 인도하심 없이는 예수님처럼 우리가 살 수 없고, 그 안에서 평안을 누리지 못하오니, 주여 우리를 축복하여 주셔서 사랑으로 우리의 모든 인생을 채워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날마다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물질적 축복과 영적인 은혜도 누리게 하여 주셔서 예수님을 닮고 따라가는 삶이 지치고 힘들지 않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주 예수님 이름 받들어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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