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고린도후서 8:1~7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그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 그가 이미 너희 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하게 하라 하였노라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설교: 풍성한 이 은혜
안산제일교회 고훈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교회에 건축헌금을 드려라.”
한 교회학교 여선생님이 이런 꿈을 꾸었습니다.
그녀는 공단 사무실에 근무하며 10년간 모은 혼수비용을 모두 건축헌금으로 드렸습니다. 당시 노처녀였던 선생님은 좋은 상대를 한명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성전이 완공되는 것을 보고 서울로 이사갔습니다. 그때 나이 서른둘…. 1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어느 주일, 그 여선생님이 건실한 남편, 아이 둘과 함께 고훈 목사님를 찾아왔습니다. 이 목사님은 대뜸 어떻게 됐느냐고 물었습니다.
“결혼이 좀 늦었지요. 남편은 대학병원 원무과장이고, 아이 둘은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어요. 집도 장만했구요. 안수집사 직분도 받았어요.”
제일 궁금한 건축헌금으로 바친 혼수비용 때문에, 혼수는 어떻게 해갔느냐고 물었습니다.
“남편될 사람에게 혼수비용은 건축헌금으로 바쳤다고 고백했어요. 그랬더니 혼수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라는 것이었어요. 하나님께서 참 좋은 남편을 주셨어요.”
그날 남편은 “하나님이 이런 아내를 주신 것에 늘 감사해요”라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는 항상 인간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헌금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현실적으로 가장 힘든 문제 중 하나가 헌금입니다. 가장 민감한 주제입니다. 그래서 대부분 교회의 목사님들은 헌금에 대한 설교는 안 하려고 합니다. 헌금에 대한 언급은 고의로 피하려고 합니다. 자칫하면 교인들이 상처를 받을 수 있고, 이것으로 인해 교회를 떠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에는 헌금에 대해 여러 번 언급되어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우리가 제대로 회개하려면 지갑부터 철저한 회개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헌금문제가 우리의 영적 성장에 발목을 잡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을 통해 말씀하신 헌금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아시고 이를 통해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받으시기 간절히 바랍니다.
1~2절입니다.
1.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바울 당시의 고린도 교회에도 헌금 생활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헌금에 대한 인식, 태도가 모범적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에 재정적인 위기가 와서 소아시아 여러 교회가 돕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헌금을 당부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도 재정적으로는 넉넉했기에 구제헌금에 동참하도록 바울이 모범사례로 마게도냐 교회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너희도 마게도냐 교회처럼 너희도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일에 동참하라는 것입니다.
왜요? “은혜”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드림의 은혜”입니다. 은혜라고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받는 선물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바울이 가리키는 마게도냐 교회의 은혜는 하나님께 드리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선물도 귀합니다만, 우리가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릴 수 있다는 것도 대단한 은혜입니다. 구체적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이 더 없이 값지고 보배로운 은혜라는 겁니다.
성경에 이 “드림의 은혜”에 대해서 아주 잘 나타나 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향유를 주 예수께 부어드린 마리아의 이야기입니다.
마리아는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제자들이 그녀를 그렇게 혹독하게 비난했을 때 마리아의 마음은 많이 다쳤을 것입니다.
사실 이 마리아에게는 여러 가지 선택권이 있었습니다. 향유를 팔아 현금으로 바꿔서 그것으로 뭔가 “유용한” 일을 하거나, 그것을 저축해서 노년을 대비한다거나, 주님 보시기에 아름답도록 자신을 가꾸는 일에 쓸 수 있었으며, 너무 오래 두어서 쓰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습니다.
잘 생각해보면, 주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우리에게도 이와 똑같은 선택권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처럼 그렇게 경제적이고 실리적이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창조물에서 보면 얼마나 낭비이고 대범하십니까? 그러나 현금으로 측정할 수 없는 마음과 영혼의 것들이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선물을 자신의 치장에 쓰는가 아니면 그분의 발에 붓는가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마리아와 같은 마음을 마게도냐 교회들이 실천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3~5절입니다.
3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5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예루살렘 교회가 도와 달라고 간청한 것이 아닙니다. 이방지역의 교회들 가난을 알기 때문에 사도 바울도 나눔헌금을 요청하지 않은 듯합니다. 그런데, 이 교회들이 먼저, “바울 사도님, 저희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구제하는 일에 참여하도록 해 주세요.” 간절히 구했습니다. ‘간절히 구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파라칼레시스”는 ‘간청한다’는 뜻도 되고 “위로”라는 말도 됩니다. 이 교회들의 마음에서 성령님이 주시는 위로, 성령님의 기쁨이 넘쳤습니다. 성령님의 위로가, 헌금하겠다는 간청으로 흘러나왔습니다. “구한다”라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우리에게 구제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간청하고 메어 달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구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제헌금을 받는 사람도 은혜받습니다. 구제하는 자신들도 은혜를 받습니다. 구제하는 일은 성도를 향한 섬김/직분입니다. 섬김은, 노예가 자기 주인이 식사할 때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마케도니아 성도들은 핍박받는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노예처럼 섬기기 원했습니다. 그 먼 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은 “성도”였기 때문입니다. 성도, 거룩한 무리, 성전 성소라는 말도 됩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특별히 거룩하게 삼습니다. 그들 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을 구제하는 일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섬기는 일입니다. 거룩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은혜 받은 것입니다. 섬김은 “직분”이라는 뜻도 됩니다. 교회의 직분은 말씀으로 교회를 세우는 일입니다. 구제는 물질로 교회와 성도를 세우는 교회의 공적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또한, 4절 말씀에 보면, 구제하는 것을 은혜라 하고, 또 “참여”라고 합니다. 참여는 “코이노니아” , 교제입니다. 교제, 코이노니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어 가지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자기 생활이나 생각을 말한다고 자동으로 교제 코이노니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로 다른 성도에게 유익을 주는 행동입니다. 말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어 주면 교제가 됩니다. 물질로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전달하면, 물질적 교제입니다. 구제는 가난한 성도들도 하나님 나라의 자유와 기쁨에 참여할 수 있도록 물질로 돕는 것은 신령한 영적 교제입니다.
그래서 5절을 보면, 마게도냐의 교회들은 주께 먼저 자신을 드렸습니다. 그다음에 헌금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헌금입니다. 물질 이전에 먼저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돈을 드리는 것보다 헌신이 먼저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기대하십니다. 돈 이전에 우리 자신을 먼저 바쳐야 합니다.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이 바로 이렇게 했다는 겁니다. 이것이 진정한 드림의 은혜를 성취하는 것입니다. 헌금은 우리 자신을 드리는 하나의 수단입니다. 이것이 올바로 되지 않으면 복채일 뿐입니다. 돈이나 물질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우리 헌금이 하나님이 흠향하시기에 합당한 산 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거기에 우리 자신을 담아야 합니다. 은혜 가운데서 가장 값진 은혜, 헌금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헌금은 나 자신을 주께 드리는 헌신임을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6~7절입니다.
6 그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 그가 이미 너희 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하게 하라 하였노라
7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마게도냐 교회들이 간절히 구하고 위로하여 헌금한 것은 사도 바울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환란 가운데 있던 교회공동체에, 그들의 물질적 헌신을 통해 성령님의 위로는 연쇄반응을 일으킵니다. 사도 바울은 디도를 고린도에 보냅니다. 디도는 이미 1년 전에 고린도 교회에서 헌금 모금을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중단된 상태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후서 편지를 디도의 손에 들려 보냅니다. 고린도 교회에 그 헌금 모금을 완성하라고 합니다. 헌금 모금을 “이 은혜”라고 강조합니다.
원래 고린도 교회에는 원래 말씀의 은사가 흘러넘쳤습니다. 여기서 믿음은 그리스도를 믿고 죄용서 받는 믿음 아니라, 병을 고치고 능력과 기적을 행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고전 12:9-10) 말은 예언과 방언 등의 은사를 말합니다. (고전 12:10). 지식은 말씀을 말합니다. (고전 12:8, 8:1-7). 그런데 이러한 은사로 인해 실천이 없었습니다. 도리어 바울을 오해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오해도 풀리고 한 발짝 더 그 은사에게 감사하고 진정으로 바울을 참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멈추지 말고 사도 바울은 “ ‘이 은혜’ , 물질 나눔의 은혜에서 흘러넘치게 하라, 열심을 내라.”고 격려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구제와 나눔은 상식 이상의 세계, 은혜와 기적의 세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를 섬기는 은혜에 우리는 참여해야합니다. 그래야 함께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한 성도와 교회들 안에서 물질의 교제도 풍성히 일어나게 하실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신 주님의 말씀 잊지 않고 더욱 더 주님의 주신 드림의 은혜를 꼭 실천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풍성하신 하나님!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데 인색하였다면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잃어버린 영혼들과 백성들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였다면 이 시간 회개하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 드림의 은혜를 입기를 원하오니 풍성한 이 은혜를 누리기를 원합니다. 이끌어 주옵소서! 이 모든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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