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빌립보서 2:1~4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설교: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빌립보교회가 왜 하나 되지 못했는지,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바울은 결코 서신에서 그 내용을 공개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아마 그렇게 하면 빌립보 교회에 큰 상처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그들 안에는 분명히 서로 하나 되지 못하는 것들이 있기에 바울은 한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합니다.
우리는 모두 다양한 기질과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어서 하나 되려고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하나 됨은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어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면 언젠가는 불만으로 표출될 수 있고 그런 불만은 교회에 깊은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어떻게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 될 수 있는지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래서 늘 교회들이 “하나 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약 교회의 특징은 어디서나 영과 진리로 예배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기만 하면 교회가 되고 예배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신약 교회의 특징은 하나 됨이었습니다. 문제는 무엇으로 교회가 하나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한 마음을 품어’ 믿음생활하시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방법을 아시는 귀한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구 예루살렘 황금사원 옆에는 통곡의 벽이 있고, 하루 종일 일도 하지 않고 기도만 하는 정통 유대인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의 특별한 복장 뿐 아니라, 613개의 율법을 지키는 삶을 살아간다는 점에서 구별된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우리 기독자들은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첫 이방교회였던 안디옥 교회 교인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는 별칭을 얻었는데,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았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물어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힘을 얻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위안을 받습니까?” “성령의 감화로 서로 교제하십니까?” “서로 사랑하며 동정하고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참으로 많은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통계에 따라서는 그리스도인 인구가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4분의 1이 된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또 우리 사회의 그리스도인 중에는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그리스도인이 교회 안에서는 ‘평신도’라는 이름으로 불릴 때가 많습니다. 원래 평신도는 성직자와 대립된 개념에서 나온 것인데, 성직자가 교회의 주된 역할을 감당한다면, 평신도는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느 곳에도 ‘평신도’라는 말은 없습니다. 성경에는 성직자나 평신도의 구별 없이 ‘성도’(saint)라는 표현이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되지 못하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직분도 엉터리 직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목사나 장로나 집사라는 직분 타이틀 이전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성도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단 성도가 된 후에 교회 안에서 직분이 있는 것이며, 그 후에 사회 속에서 여러 가지 직업이나 직책으로 봉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다가 죽으면 그 관 위에다 ‘성도 000 ’이라고 쓰는 것이 예사였습니다. 그만큼 성도라는 이름은 아름다우며 축복된 이름입니다. 우리는 부활할 때 교회의 직분을 가지고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다 하나님의 성도로서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2절의 말씀입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같은 생각 같은 사랑을 나누고 한 마음으로 사는 일, 이기심이나 허영을 버리고 겸손으로 남을 높여주는 일, 제 실속만 차리지 말고 남의 이익도 돌보는 일이란 무슨 말입니까?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이 되는 일입니다(마 5:13-16). 주님은 그리스도인의 사는 모습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은 악마의 소굴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할 유일한 터전입니다. 그러나 소금의 맛을 낼 때 세상은 즐거움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빛의 구실을 할 때 세상은 평화로울 것입니다. 예수 믿고 부자가 되고 출세는 했는지 몰라도, 얌체족이나 거짓말쟁이나 갑질하는 사람이라면 세상은 절망할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어지럽히는 목사들과 장로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앙의 목표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많은 교회지도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엄히 책망을 듣게 될 것입니다. 교회성장 제일주의자들, 성공과 출세를 신앙의 목표처럼 강조한 이들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교회에 초대하고, 전도를 하고, 그것도 모자라 선교에 참여하는 분명한 이유는, 우리가 믿는 신앙이 유일한 진리일 뿐 아니라 너무 자랑스럽고 귀한 것이어서, 그 확실한 증거물로 자기 자신의 향기 나는 삶을 보여주면서 내가 믿는 이 신앙을 따라 살아보라고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이 진리이기에, 기독교 신앙생활이 가장 멋지고 아름답기 때문에, 그런 삶을 실천하고 있음을 보여주려고 교회에 초대하고 전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년의 한 신사가 예수를 영접했습니다. 종가집 종손인 그는 예수의 ‘예’자만 들어도 손사래를 치던 사람이었죠. 친구들 중 예수 믿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는 비정상인과 정상인의 기준을 예수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두었을 정도로 기독교 신앙에 배타적이었습니다.
2002년 2월3일. 이 사람이 교회에 첫 출석한 날입니다. 어머니 아내 자녀들은 이 완고한 가장을 위해 오랫동안 눈물의 기도를 드려왔습니다. 그는 이날 하루만큼은 비정상인의 대열에 합류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기계총 걸린 소년의 머리처럼 빈 자리가 듬성듬성한 예배당을 보고 특유의 도전정신이 발동했다고 합니다. 예배 참석 첫날, 그는 담임목사와 제직들을 음식점에 초대하고 일장 훈계를 했다고 합니다.
“교회를 이렇게 잘 지어놓고 빈 자리가 많으면 어떡합니까? 여러분이 새 신자 한 사람씩만 데려오세요. 나머지는 제가 책임집니다. 연말까지 예배당을 가득 채웁시다. 좀 열심을 내세요.”
목사도 장로도 모두 웃었다고 합니다.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에게 한 대 얻어맞은 것같기도 하고 그 순진무구한 당돌함에 어의가 없기도 하고…. 초신자가 사람 잡겠다고 수군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한마음으로 열정적으로 더 많이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열심히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열심히 어떻게 나타나야할까요? 3~4절에 보면, 잘 나와있습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권면이나 사랑이나 긍휼이나 자비는 겉으로 확인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라 그 본인이 마음에 담고 있는 영적인 자질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물론 물질이나 건강으로도 남을 도울 수 있지만 바울사도는 성령과 말씀으로 다듬어진 자신을 통해 남을 도와야 할 것을 여기서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조건으로 남을 돕는 것은 소수의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정신적으로 남을 돕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누구나 가능한 봉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더 귀한 것은 우리들이 갖추게 되는 영적 자질은 선천적인 조건보다 후천적인 조건이 더 많다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한 때는 타락자요 죄인이요 정신적인 장애인과 같이 불행한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은혜 받고 회개하고 거듭남으로 새로워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한 이 사람들이 남의 도움을 받고 남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었으나 이제는 남을 돕고 남을 보살필 수 있는 사람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남을 권면하고 위로하고 긍휼과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상담자요 영적인 교사로 쓰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슈바이처는 ?사람의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 인간의 최대의 선?이라고 말했습니다. 남을 돕고 붙들어 준다고 하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봉사라는 뜻입니다.
한 분이 소록도에 가서 나환자를 치료하고 있는 간호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 간호사에게 묻기를 ?어떻게 이렇게 귀한 일을 하십니까? 나는 보수를 많이 준다고 해도 이런 일을 못 할 겁니다.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그 말을 들은 간호사가 ?나도 이런 일을 못합니다.? 그 때에 손님이 ?지금 하고 있지 않습니까?? 라고 말하자 간호사는 다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지금 내가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이 이 일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함께 신앙에 대한 감사를 드렸으며 신앙으로는 누구나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을 새롭게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 사람들을 섬기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사시기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로우신 주님!
우리가 그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았습니다. 우리도 그 이름에 걸맞게 주님의 은혜 안에서 주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며 한마음 한 뜻으로 주님의 교회를 섬기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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