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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강해 7)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수요기도회 20210901)

by 온누리선교 2021. 8. 31.

 

성경말씀: 데살로니가전서 3: 8~10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

 

설교: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겨울이 시작되면 독감 백신을 예방접종을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독감 바이러스가 들어와도 이길 수 있는 힘을 기르기 위해서입니다. 마찬가지로 환난과 고통이라는 바이러스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는 믿음이라는 백신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믿음의 백신을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해야할지 오늘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급하게 데살로니가를 떠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안위를 늘 걱정하였습니다. 그들이 당하고 있는 환난을 믿음으로 잘 극복하고 있는지, 아니면 해체되고 말았는지 불안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였습니다. 혹시 그들이 잘못되어 지금까지 한 모든 수고가 헛것이 되는 것은 아닌지 염려하였습니다.

그래서 빠른 시간 내에 그들에게 돌아가 그들을 다시 돌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즉 사탄이 가로막아 갈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참다못하여 자신을 대신하여 디모데를 보냈습니다. 본 장의 2절과 3절에서는 그를 보내는 분명한 목회적 목적을 설명하였습니다. 디모데를 통해 그들의 약해진 믿음을 굳건하게 하고, 상한 심령을 위로하여 새로운 소망 가운데 격려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사도 바울을 통해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놀라운 은혜를 우리도 함께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이 시간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8절의 말씀입니다.

8.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여기 굳게 선다는 말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말할 때 바울이 자주 쓰던 관용어입니다. 그리고 주 안에그리스도 안에라는 용어와 함께 참된 신앙의 근거해야 할 정당한 위치를 밝히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것이 그 교인들의 신앙이었습니다. 즉 그들은 예수 말고는 구원자가 없다.’,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어떤 핍박이 와도 예수를 믿고 하나님 경외하며 살겠다.’는 굳센 믿음을 가졌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얼마나 유대인들의 잘못 가르침에 미혹을 받았습니까? 자기 민족도 아니면서 세계 곳곳에까지 흩어져 신앙을 방해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유대인의 훼방과 자기 동족들의 핍박이라는 이중적인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렇지만 요동치 않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바울의 첫 마디가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여러분이 주 안에 굳게 섰다니 우리는 정말 사는 보람이 있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디모데가 전해준 그 소식이 바울에게 새로운 활력을 주었으며 그 소식은 바울로 하여금 궁핍과 환난을 감내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이처럼 인생의 최고의 기쁨은 전도하여 불신자가 회개하여 예수 믿는 것이고, 다음은 성도들이 흔들리지 않고 주 안에 거하여 참된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여 돌아오면 환영하는 천국의 종들이 일제히 울리며 모두가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눅 15:7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하셨고, 10절에도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하면서 온전한 믿음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이 이와 같이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전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어서 9~10절을 보겠습니다.

9.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

10.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

 

노먼 빈센트 필 목사가 한 의사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의사로서 한 일 중에서 가장 보람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의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제 인생을 변화시킨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살아날 확률이 10퍼센트밖에 없는 약한 소녀가 수술대에서 제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부탁이 있습니다. 저는 매일 잠자기 전에 기도합니다. 지금 기도해도 괜찮죠?’”

그때 저의 마음은 매우 괴로웠습니다. 저는 평소 주를 잘 섬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소녀에게 나를 위해서도 기도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 소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예수님, 나의 기도를 들어주세요. 오늘밤 당신의 어린 양을 지켜주소서. 그리고 의사 선생님에게도 복을 내려 주세요.' 이 기도가 저를 변화시켰습니다. 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눈물로 하며 소녀의 수술이 잘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 결과 소녀는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했고, 저는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간증입니다. 기도가 이루어낸 기적이었습니다.

 

그래서 10절의 보면, 바울이 쉬지 않고 열심히 기도한 이유는 부족한 부분이 있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의 부분을 무장시키고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동안 성도들의 신앙을 심히 고무적인 어조로 평가했지만 그래도 그들에게 어떤 부족함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보충해야 할 부분이란 예를 들면 4장에 나오는 대로 세파에 물들지 않고 더욱 거룩하며, 재림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아무리 믿음 생활 잘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이 목회자의 눈에 보인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사역자에게 할 일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야로 심히 간구하면서 또 다시 만나기를 갈망했습니다.

그런데 타인의 약점이 보인다는 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좋은 점만 보고 싶은데 자꾸만 단점이 보이면 낙심도 되고 정도 떨어지고 때로는 비판의 시험도 오려고 합니다. 더구나 관록이 있고 비판 잘하는 사람들 끼리 모이면 비판은 더 쉬워집니다. 죄에 대해 더 지혜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죄에 대해서는 미련한 자가 되라고 말씀합니다.

그래도 눈에 타인의 약점이 보인다면 그것은 기도하라고 주신 영분별로 생각하시고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영분별을 감당하는 최고의 비결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어떤 은사를 가졌어도 사랑으로 감당하지 않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와 같고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이 때 한 마디 충고보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고요히 기도해 줍니다. 그것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눈에 문제가 보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할 일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할 일이 있을 때 보람됩니다. 세상일에는 날아다니면서 교회 일에는 아프다고 핑계 치지 말고 어둠이 오기 전에 밝고 젊은 날 하나님께서 기회 주실 때 남은 여생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통해 위로를 얻었을 때, 그 내용이 과연 무엇이었겠습니까? 교회가 이젠 아무렇지 않게 고난에서 벗어났기 때문일까요? 단지 외형이 커지고 많은 돈과 힘을 얻었기 때문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여전히 현실은 고달프고 삶은 버겁지만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궁극적인 힘과 용기를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교회의 모습을 통해 복음의 위대함을 다시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교회들이 가져야할 정체성입니다. 교회는 위로의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군가를 위로해야할 때 보통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부담을 갖습니다. 그러다보면 자칫 함부로 가르치려들게 되고 그 결과 위로는커녕 더 깊은 상처를 안기는 실수를 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알려주시는 참된 위로의 길은 다름 아닌 8절 말씀처럼 주님 안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위로의 힘과 근원은 나에게 있지 않습니다. 오직 위대하신 만유의 주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그 분 안에서 위로의 주체가 아닌 통로가 될 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진정한 위로를 받은 사람만이 비로소 다른 이들에게 위로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드넓은 품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안겨본 사람만이 다른 이들을 넉넉히 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나눔과 섬김이 한 곳에 모일 때 교회는 마침내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고 전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참된 해방과 쉼을 깨닫지 못한 채 여전히 나의 능력을 과시하며 인정욕구에 시달린다면, 함께 공동체를 이루는 성도들의 아픔과 눈물에 공감하지 않고 오로지 나의 이익에만 관심을 가진다면 위로자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에서 한 참 벗어나 있음을 반드시 깨닫고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환난이 닥쳐올 때, 낙심하고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애써 피하거나 도망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것을 위해 진리를 왜곡하고 악용해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그 대신 우리를 사랑하시어 몸소 고난당하고 죽임 당하신 주님의 십자가 그늘 아래서 참된 위로를 얻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위로로 말미암아 서로를 진실로 격려하며 함께 주님 안에 굳게 서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로우신 주님!

우리가 고난과 환란 가운데에서도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죽겠다고 아래만 바라보고 현실의 고통에만 사로잡히지 않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믿음으로 언제나 일어서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십자가를 보며 고난 속에서도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승리하신 주님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