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말씀: 디모데후서 4:19-22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러 있고 드로비모는 병들어서 밀레도에 두었노니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다 네게 문안하느니라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설교: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가장 마지막에 기록한 서신입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 본문은 마지막 장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거침없고 담대한 모습과는 달리 한 인간으로서의 연약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젊고 강할 때는 자신이 연약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늙고 약해지면 자신의 연약함을 알게 되고 마음속의 진솔한 이야기를 쉽게 꺼내기도 합니다.
이러한 경우와 비슷하게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사역의 마지막 시기에 이전보다 약해진 육체와 여러 어려운 상황 속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이 본문을 가볍게 다루거나 중요하지 않는 내용으로 치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할 때, 하나님을 찾으라 말씀하시고 기꺼이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위해 다양한 은사를 가진 사람들을 함께 부르시며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이끄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단순히 한 인간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넘어 사도 바울의 깊숙한 곳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복음의 동역자에 대한 사랑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바울을 통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그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 함께 생각해보시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누구입니까? 젊은 시절 유대교를 광신했던 율법선생이였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기독교 신앙을 박멸하는데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초대교회 열심 있는 사역자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데 한 몫을 한 사람입니다. 교회가 다메섹까지 퍼져 나갔을 때 그곳의 교회를 없애는데 앞장을 선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예상치 않았던 사건이 일어납니다. 자기가 그렇게 박해하던 예수 그리스도를 직면하게 됩니다. 그 순간 바울은 눈이 멀고 자기의 삶을, 바로 자기가 박해하던 그리스도를 위해 바치도록 도전을 받게 됩니다.
사흘이나 다메섹에 머무는 동안 아나니아 라는 사람이 와서 예수를 믿는 신자가 되라고 권유합니다. 이 권유를 받아들여 예수를 믿고 따르겠다고 결심하던 그 순간, 바울은 사랑과 봉사와 선교의 사도로서 그의 온 생애를 바치게 됩니다. 바울은 그의 생애동안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에게 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던 사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어떠한 시험과 고통도 견디어 냈습니다. 때로는 돌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깁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사랑에 감격하여 자기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섬겼으며, 그리스도안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가는 곳마다 전파했습니다.
그렇게 얄밉게 굴던 초대 교회의 적이요, 원수였던 바울이 성경의 ‘사랑장’ 이라고 부르는 고린도전서 13장을 쓴 사랑의 사도가 됩니다.
그런데 이런 사도 바울도 로마 감옥에 갇혀 마지막 날들을 보내면서 마지막 편지를 쓰게 될 때 갑자기 걷잡을 수 없는 고독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마지막 재판결과가 사형선고로 떨어지자 바울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은 제 고향으로 뿔뿔이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앞 10절에 보면,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만이 낯선 타향의 감옥에서 쓸쓸하게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마지막 순간에도 바울이 잊을 수 없는 친구로는 3사람을 꼽습니다. 첫째 친구는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요, 둘째 친구는 바울의 전도여행을 늘 수반했고, 그의 약한 건강을 항상 돌보아 주던 누가라는 의사, 셋째 친구는 디모데였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항상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고 까지 불렀습니다.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돌매를 맞고 시궁창에 버림을 받았을 때 그를 구출해 준 사람이 디모데였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바울을 찾아 상처를 싸매 주고, 먹을 것을 갖다주고, 집에 모셔다가 그의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 돌봐 준 사람이 곧 디모데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점에, 수 천 리 타향 로마의 감옥에서 마지막 처형을 기다리는 순간 세 친구 중, 디모데만 자기 옆에 있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디모데에게 두 번째이자 마지막인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의 사연인즉, 디모데에게 로마로 속히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오래 살 것 같지 못한 예감이 들었던 것입니다.
21절의 말씀입니다.
21.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다 네게 문안하느니라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며 심리학자인 폴 뜨루니에(Paul Tournier)가 쓴 『인생의 4계절』이란 책이 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자연의 4계절이 있듯이 인생도 4계절로 나눌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연의 4계절과 인생의 4계절이 구분되는 점을 두 가지로 말했습니다.
인생의 4계절은 한 번 지나가면 다시 올 수 없다는 것과 그리고 인생의 4계절은 꼭 차례대로 오는 것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의 봄을 맞이했는데 여름, 가을을 무시한 채 겨울을 만나서 세상을 떠나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계절이 있습니다. 봄은 유년기, 소년기, 청소년기, 여름은 청년기, 청장년기, 가을은 장년기, 겨울은 노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시간이 흐르면서 겨울이라는 절기(인생의 계절)를 맞게 됩니다.
요즘에는 사건과 사고도 많아 우리는 언제, 어느 때 이 세상을 떠날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다 겨울이라는 인생의 계절을 맞고, 또 인생의 종말을 맞습니다. 누군가 이야기하기를 ‘시간은 금이다’ 라고 했는데, 나는 ‘시간은 생명이다’ 라고 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이 인생의 계절들은 바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사도 바울도 인생의 계절의 막바지를 경험하고 있는 듯합니다.
왜 “겨울 전에” 오라고 했을까요? 추워지니까 겉옷 생각이 나서일까요? 아마도 그것은 자기가 처형당할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되어서 그랬을 것입니다. 당시 겨울이 되면 지중해의 항해 사정이 어려웠습니다. 그 전 해 겨울에도 이 지중해에서 바울이 풍랑을 만나 고생을 했습니다. 지중해는 10월이 지나면 작은 배의 항해는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만일 디모데가 겨울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면 그 이듬해 봄까지는 로마에 가는 배도 없고, 바울 자신이 이듬해 봄까지 살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던 것이기에 바울은 “겨울 전에 어서 오라”고 편지를 한 것입니다. 지금 오지 않으면 나를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옥중에서 이런 편지를 써 보낸 것입니다.
디모데가 이 편지를 받고 어떻게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추측과 상상을 해 보면, 디모데가 이 편지를 받고 하루도 지체하지 않고 드로아로 가서 바울의 책과 겉옷을 찾아 가지고 로마를 향해 곧장 떠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바울이 갇혀있는 감옥으로 달려가 그를 기쁨으로 만났고, 바울과 더불어 책도 읽고 마지막 편지도 썼을 것입니다. 바울의 그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불굴의 신앙을 배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는 바울과 함께 그의 사형장에까지 가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 버리는 장엄한 순간까지도 목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디모데가 겨울 전에 왔으니까 가능했지 조금만 늦었더라도 바울을 볼 수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비추어 우리들이 생각할 것은 우리들에게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영영 할 기회가 없는 일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생 동안 단 한 번밖에 없는 기회, 지금 놓치면 다시는 붙잡을 수 없는 기회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 중에도 봄이 오기 전에 세상을 달리할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겨울이 오고 또 지나면 봄이 옵니다. 그 다음에는 여름이 오고.. 그 계절의 변화는 늘 있는 것이지만 그 계절이 오고 감에 따라 우리의 기회도 오고 갑니다. 지금의 계절이야말로 우리의 인생을 비유합니다. 아름답던 단풍도 벌써 떨어져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번 주에 좋은 일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기회를 놓치면 그 기회는 영영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놓쳐서는 안될 기회는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림 성화 가운데 문밖에서 노크하시는 예수님의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에는 문이 단단히 닫혀 있고, 또 문 밖에는 문고리가 없어서 문을 열 수도 없습니다. 그 문은 안에서 누군가가 열어 주어야 하는 문입니다. 주님은 자기의 길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길은 사랑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노크만 하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그 문을 열면 주님께서 오셔서 좌정하시고 우리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 자기를 따르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는 그저 내일, 내일 하다가 예수님이 노크하는 소리가 사라지든가 아니면 우리에게 내일이 없는 때까지도 내일, 내일만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디모데에게도 그랬고, 우리에게도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인간다운 인간이 되라는 요청, 사랑과 우정의 부름, 심지어는 예수님의 부르심까지도 내일, 내일하고 미뤄둘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것을 호소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 부름에 지금 응하라고 하십니다.
미국에서 어느 해 필라델피아 의과대학 학생이 매카트니의 이 설교를 듣고 깨달은 바가 있어서 기숙사로 달려가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제가 공부한다고 여태 편지도 못 드려 죄송합니다. 저는 어머니가 제 공부를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시고 날마다 저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저만을 소망으로 살고 계신 것을 잘 압니다. 제가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의사가 되어서 어머니 슬하에 돌아가 효도하며 살겠습니다.’ 하고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를 보낸 지 한달 후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전보가 왔습니다. 그래서 기차를 타고 며칠을 걸려 고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이미 어머니는 돌아가신 후였습니다.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누워 계신 베개 밑에 얼마 전 자신이 보낸 편지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보낸 편지를 끝까지 읽으며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것을 보며 아들은 ‘그나마 편지마저 안 보내 드렸다면 얼마나 큰 불효를 범할 뻔했는가… ’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돌아가서 목사님께 감사인사를 드렸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겨울이 다가올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언젠가 겨울이 올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이 바로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인생의 겨울을 맞이하는 사도 바울을 통해 말씀하시는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는 부르심에 너무 늦도록 기다리지 말고, 바로 응답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로우신 주님!
사도바울의 절절한 고백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길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기회를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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