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갈라디아서 2:16-17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설교: 그리스도를 믿기 떄문에
1학년 2학기가 시작되어 방과후 프로그램에 많은 러시아계 부모님들이 우리 교회를 찾습니다. 그들은 우리 교회의 프로그램을 마치 고려인문화센터에서 하는 프로그램이나 학원 프로그램으로 오해하여 올가 선생님에게 문의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이고, 교인의 자녀들을 위해 방과후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교회의 예산지원이 있다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많은 부모님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우리의 사역을 비디오로 보여주어도 ”아이들이 이렇게 한국말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는 것을 보니 놀랍다!“라고 할 뿐 주일에 교회예배를 참석하고 입학원서를 쓰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그 답을 압니다. 하나님도 알고, 교회도 알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진짜인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세상에는 믿을 존재가 절대로 없다! 그러므로 나 자신을 믿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떻게 믿습니까? 나 혼자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까? 내가 능력이 없다면 ‘난 어쩔 수 없어!’라며 포기하는 인생을 사실 겁니까?
우리가 우리 스스로 살아갈 힘이 없다면 진짜 능력있는 분을 만나야 합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아시고,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 안에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환상을 보고 이방인 고넬료의 집으로 가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행 10:19~44)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임하여 구원을 얻는 사건들은 유대인들에게는 차믕로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상상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신다"(행 10:34~35)을 깨달았습니다.
그 사실로 베드로는 할례를 받은 자나 못 받은 자나 아무 상관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무할례자들과 함께 자유롭게 식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안디옥에 갔을 때도 이방인들과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식탁교제를 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야고보가 보낸 몇몇 사람들 오기 전까지는 식사 때마다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형제였던 야고보로부터 보냄 받은 몇몇 사람들이 안디옥에서 온 일로 인해 상황이 복잡하게 꼬였습니다.
베드로가 항상 해오던 대로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데 예루살렘에서 온 자들이 들어온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이방인 형제들과 함께 먹던 자리에서 슬그머니 물러났습니다.
그러자 바나바를 비롯한 다른 유대인 신자들도 슬슬 자리를 떴습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이 딱 분리되는 상황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 모습을 알게 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책망을 했습니다. 16절입니다.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베드로를 향해 사도 바울은 공개적으로 이방인의 식자자리에서 물러난 것을 책망했습니다. 풀어서 말하자면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유대인으로서 유대인처럼 살지 않고 이방인처럼 살았습니다. 이방인처럼 하나님이 정한 음식 규례와 상관없이 먹고 마셨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방인의 자리를 떠나는 것입니까?
그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르는 것이고 이방인으로 하여금 유대인처럼 살라고 강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압니다. 우리가 유대인이지만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이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었습니다!!'
왜 바울은 베드로 앞에서 사람들이 다 보는 곳에서 이렇게 말했을까요? 치밀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해서였을까요? 다혈질이라 그래서였을까요? 베드로의 권위를 짓밟고 올라설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해서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올곧게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진리를 알면서 복음의 진리에서 어긋나는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복음의 영광과 복음의 본질을 훼손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베드로만 그 식사 자리를 피한 것이 아니라 다른 유대인들도 그런 베드로를 보고 함께 그 식사 자리를 피했습니다. 심지어 바나바까지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바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진정한 복음의 자유에 대해서 가르쳤는데, 수제자라는 베드로가 율법에 얽매인 모습을 보임으로써 엄청난 파장을 가져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바울은 베드로의 체면를 고려하여 모른 척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베드로의 위신보다 중요한 것은 복음의 진리와 교회의 평화를 깨뜨리는 편견에 대해서는 절대 묵과하지 않고 단호하게 수호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율법에 관해서는 베드로보다 바울에게 오히려 민감한 사안이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요 당대의 존경받는 랍비였던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뭣이 중한디'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바울에게 복음이 무엇이요? 라고 묻는다면 무엇이라 대답할 것인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롬 1:17)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또 “왜 예수를 믿느냐”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이냐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16), 한마디로 “의롭다함을 얻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가끔 저는 이런 말을 듣습니다. “아니 사람이 착하고 정직하게 살게 해주는데가 교회 아니에요?” 그런데 사실은 죄인들이 가장 많은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분명한 것은 어떻게 사람들이 자신들이 죄인인 것을 알고 “교회”에 모였느냐가 중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이슬람을 믿는 사람도 하나님을 “알라”라고 부르면서 하나님을 압니다. 불교도 “세상의 이치”를 만든 존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교도 세상을 만들고 다스리는 신성한 존재, “신선” 또는 “천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자신들이 “죄인”, 즉, 하나님 앞에서 죄가 많은 존재라는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축복을 주실 수 없습니다. 그 자신들이 죄인인 것을 모르는데 어떻게 구원해주시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때문에 구원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옭아매는 죄의 법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절대로 기뻐하시지 않는 일입니다. 우리는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죄 없다 하심을 입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구원받은 것입니다. 마치 간단히 예를 들면, 교통 사고를 내어서 벌점이 많아 한국에서 비자연장을 할 수 없는데, 친한 한국분 하나가 보증을 서 주어서 그 벌점이 탕감되어 한국체류 비자 연장이 된 것과 같습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그 친한 한국 분에게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그 한국 분이 보증 서준 것, 믿어준 것에 감사해서 다시는 핸들을 잡지 않거나, 차를 운전한다하더라도 조심히 운전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보증 선 사람을 무시하고 또 사고나면 보증 서주겠지 하면서 전에처럼 함부로 운전하고 산다면 그것은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유치원에 다니는 여자아이가 있었습니다. 아이는 잠자리에 들기 전이면 언제나 예쁘게 무릎을 꿇고 또 두 손을 깍지끼고 고개를 수그리고는 경건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오늘밤에 우리 가족 모두를 지켜 주셔서 잠 잘 자게 해 주세요. 우리 아빠 하시는 사업도 잘 되게 해 주시고, 우리 가족들의 건강도 지켜 주세요’
그리고 나서 그 아이는 그대로 잠자리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는 다시금 일어나서 그 날 유치원에서 배운 율동과 노래를 멋있게 한 번 하고는 잠자리에 들곤 했습니다.
하루는 그의 어머니가 아이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겨 그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너는 기도가 다 끝났으면 잠자리에 들어야지, 왜 자기 전에 꼭 그렇게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르느냐?‘
아이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기도하는 동안에는 그저 하나님께 내 부탁만 드렸잖아요.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어요. 그래서 유치원에서 배운 노래와 율동으로 하나님을 잠시라도 기쁘게 해 드리고 싶어서요'
얼마나 예쁩니까? 우리보다 나은 줄 압니다.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께 "이것도 해 주시고 저것도 해 주시고"라며 무척이나 졸라대면서 많은 요구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기도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족한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을 결코 배신하지 않고 믿음으로 항상 주님이 기뻐하시는 자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로우신 주님!
주님의 놀라우신 사랑으로 구원을 받은 자로 살아가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끝나지 않고 우리에게 만나와 메추라기 같은 세상의 축복도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죄인이었던 모습대로 살지 않도록 결단하오니 주님 받아주옵소서!
이 모든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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