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베드로전서 3:8-9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설교: 그리스도인 공동체
유대교의 율법 해설집인 ‘탈무드’에 보면 하나님이 아담의 갈비뼈를 빼내 이브를 만드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머리뼈를 빼냈다면 이브가 아담의 머리 위에서 군림할지도 모른다. 가장 아래에 있는 발가락뼈로 만들었다면 아담이 이브를 짓밟지 않을까. 그래서 몸의 가운데에 있는 갈비뼈를 빼내어 아담의 중심과 이브의 중심을 이은 것이다”라는 설명입니다. 좀 더 추론해보건대 “턱뼈였으면 아마도 말이 많아 싸울지도 모르고, 팔의 뼈였다면 삿대질하며 싸우기에 바빴을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갈비뼈로 이어진 아담과 이브의 모습은 남녀간, 또는 부부간 평등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평등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뼈 속에 불어넣어주신 생명의 입김이고, 생명의 원천은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사랑(요일 4:8)’이시기 때문입니다. 생명과 사랑의 합주가 진정한 인간 공동체의 핵심입니다.
지금까지 특정한 대상에 대해 말씀을 해왔다면 이제는 마지막으로 “너희가 다”라는 구절을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명령을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믿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외 없이 적용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교회로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구원에 합당한 삶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8절의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여기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이 서로 간에 반드시 가져야 할 5가지 미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다섯 가지는 예수님부터 시작해서 제자들까지 계속해서 성도들에게 했던 명령입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다시 다섯 가지로 모아서 성도들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주석가 에드먼드 클라우니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임의로 뽑은 미덕들이 아니다. 손의 다섯 손가락처럼, 그 미덕들은 하나의 중심에서 퍼져나가며 서로 협력한다. 그 모든 것의 비결은 은혜의 사랑이다. 그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사랑, 불쌍히 여김을 반영한다.” 이 다섯 가지 미덕은 한 손에서 뻗어나간 손가락처럼 하나의 중심에서 흘러나와 서로 하나가 되는 미덕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이 강한 동력과 동기가 됩니다.
이제 그 다섯 가지 미덕이 무엇인지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이것은 모든 사람이 같은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자의 생각이 다 다릅니다.
성도간에 연합한다는 것은 획일적인 하나를 만들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의 분명한 목적을 위해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됨의 아름다운 모델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각자 독립적으로 완벽하신 분이고 각자 주권과 성품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의 뜻을 위해 세분이 완벽하게 연합하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마지막 날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언급하십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2).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연합을 이루시는 것처럼 구원받은 우리들이 하나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를 하나로 묶어주신 분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그 한 성령 안에서 한 세례를 받았고 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한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또한 그 하나님 안에서 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것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우리가 당연히 연합해야 하는 것입니다.
“동정하며”
공감한다는 것은 감정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고통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우리는 이렇게 감정을 나누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는 우리를 한 몸으로 비유하는데, 한 몸이라면 더욱 고통을 분담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발이나 손을 다쳤는데 그 부위만 아프고 다른 몸이 멀쩡한 것이 아닙니다. 이가 아파도 밤새 잠을 못자지 않습니까. 한 부분이 아프면 몸 전체가 힘든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교회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한 지체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그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느껴야 할 것입니다.
성도는 한 몸된 원리에 따라 감정을 공유해야 합니다. 말세에 이렇게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말세의 특징이 바로 자기만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느끼고 살아가는데 바빠서 다른 사람을 생각할 수 없게 만드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을 살아가고 교회의 규모가 커질수록 우리는 성도간의 감정을 공유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구역집회를 통해 성도들이 서로 삶을 나누게 하고 있습니다. 지체들과 삶을 나누고 고통을 분담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미덕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형제를 사랑하며”
이 사랑은 가족으로서 느끼는 끈끈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여러 미덕 중 사랑이 가장 핵심적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공감하기도 어렵고 연합하기도 어려우며 동정이나 겸손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처음부터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이것이라고 말합니다. “거짓없이 형제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벧전 1:22). 구원받은 사람은 성도에 대한 사랑이 자연스레 솟아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 생겨나는 본능입니다. 이것이 지극히 당연한 이유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가족의 일원으로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히 2:10).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이 말씀을 주목해보십시오.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주님은 자신의 모든 권리를 부인하고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이 크신 사랑을 생각할 때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동력이 됩니다.
“불쌍히 여기며”
이것은 상대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이해해주며 나아가 용서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미덕의 모델이 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귀신들린 사람들에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이유도 바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긍휼(불쌍히 여김)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서로를 불쌍히 여겨, 새로 더해진 성도가 있을 때 자신의 물건을 팔아서 부족한 성도의 필요를 공급했습니다.
“겸손하며”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마 11:29)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겸손은 위대합니다. 제자들이 서로 누가 높으냐고 싸우고 있을 때 예수님은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인이라고 부르지만 서로 누가 크냐고 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 발을 씻긴 것처럼 너희도 서로 섬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성도들이 따라야 할 본입니다. (빌 2:6-8). 우리 모두는 이 예수님을 겸손히 따라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서 서로에게 가져야 하는 미덕입니다. 성도들은 한 목적을 가지고 연합되어야 하고, 서로의 삶을 공유하며 감정을 나눠야 합니다. 또한 피차 뜨겁게 사랑해야 하고, 서로 동정하고 불쌍히 여기며 용서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겸손히 낮추고 섬겨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교회는 구원에 합당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 밖에서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9절의 말씀입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교회가 반드시 하지 말아야 할 것과 반드시 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되갚는 것’이고 해야 할 것은 ‘축복’입니다.
되갚는다는 것은 복수하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되갚아주고 싶어합니다. 복수를 완벽하게 할 때 후련함을 느낍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우리의 본능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세상의 원리에 반합니다. 절대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그것이 당연하다, 나에게 그러할 권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할 때 정의가 실현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복수는 악을 풍성하게 늘리는 일입니다. 절대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핍박하는 세상에 대해 교회는 되갚는 것으로 반응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서 사람들이 깜짝 놀랄만한 설교를 하십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38-44). 사도 바울도 동일한 명령을 합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 12:17).
교회가 반드시 할 일은 ‘축복’ 즉 복을 빌어주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수많은 모욕과 핍박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열두 영의 천사들을 ‘오라’ 한 마디만 하시면 끝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예수님을 감히 모욕했던 수많은 이들에게 보복할 수 있는 능력과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입을 여셔서 하신 말씀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였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갚으신 모습입니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3). 예수님이 바로 오늘 이 명령에 따라 그대로 순종하신 분입니다. 스데반도 예수님의 본에 따라 순종했습니다. 우리는 악을 악으로 되갚는 것이 아니라 선을 베푸는 일로 갚아야 합니다. 그럴 때 악이 종식되고 선이 선포되는 결과가 나타납니다.
우리는 왜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할까요? 그 이유와 목적이 다음 말씀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천국에 가는 티켓이나 얻고 이 땅에서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살고자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주님은 자신이 가신 그 길을 동일하게 걸어오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미덕들이 모두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부르심에 따르겠다고 동의하신 분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우리가 이 명령에 순종하는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영광도 되지만 우리에게 가장 큰 복이기도 합니다.
한 막사에서 함께 군생활을 하는 병사들이 있었습니다. 한 그리스도인 병사가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데 그것을 못마땅해 하는 다른 병사가 있었습니다. 욕을 하기도 하고 괴롭히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기도를 하고 있는데 진흙이 묻은 군화를 던졌다고 합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대응하시겠습니까? 그는 진흙 묻은 군화를 잘 씻어 말려서 다음날 주인 곁에 가져다 두었다고 합니다. 그를 괴롭혔던 병사는 부끄러워했고 그 일로 몇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에게 요구하시는 삶입니다.
어찌보면 나약하고 연약해 보이는 삶입니다. 사람들은 바보 같다고 할 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크신 권능과 영광을 가지고 계신 분인데 왜 그런 처절한 죽음을 택하셨을까요? 그분이 그렇게 하심으로 이곳에 계신 모든 분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고 온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덕이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동일한 길을 걸을 것을 요구하십니다. 세상이 손가락질 하더라도 이 길을 걸어가시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우리 주님의 본을 따라서 이 길을 함께 걸어가길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로우신 주님! 당신의 뜻을 따라 우리가 순종하며 살겠사오니, 우리에게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시고, 당신의 축복 가운데 살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주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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