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베드로전서 3:10-12
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1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설교: 악에서 떠나
고대 그리스에 육상 경기가 아주 인기가 높았을 때, 실력이 비슷한 두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시합에서 우승을 놓고 서로 경쟁했고, 서로 라이벌 의식이 높았습니다.
그러던 중 큰 시합에 두 선수가 참가했고, 당연히 한 선수만 우승의 월계관을 썼습니다.
그 승리자는 영광을 얻었고, 또 우승 기념으로 그 선수의 동상까지 세워졌습니다.
간발의 차이로 우승하지 못한 경쟁자는, 그 마음에 시기심과 미움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우승한 선수를 위해 세워진 동상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저 동상을 내가 무너뜨리리라!’ 이렇게 결심하고는 그래서 남들이 보지 않는 한 밤중에, 그 동상이 세워진 곳에 가서, 매일 밤 그 동상 아래 흙을 조금씩 파내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그 동상을 무너뜨리려고 그랬던 것입니다.
마침내 어느 날 그 동상이 넘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동상이 넘어지면서, 그 밑에서 땅을 파고 있던 그 사람을 덮쳐서 그만 그가 동상에 깔려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동상을 넘어뜨리는 데는 성공했는데, 자신이 그 동상에 깔려 죽을 줄은 미처 몰랐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어리석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스스로의 꾀에 넘어지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과연 어떤 것인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0~11절의 말씀입니다.
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여러분 중에 생명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 있습니까? 복 받길 원하지 않는 사람 있습니까? 시편에서는 “생명을 사모하고 연수를 사랑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34:12)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 모든 사람은 생명을 사랑하고 복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생명을 사랑하는 것과 복된 삶이 과연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오래 사는 것이 행복일까요? 오래 사는데 자식들은 속을 썩이고 몸은 아픕니다. 돈이 많은 것은 행복일까요? 사람들은 건강과 돈, 명예 등이 우리의 행복을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잘 먹고 잘 살고 잘 입는 것은 사는데 필요한 것일뿐 그것이 가치 있는 삶의 목적은 아닙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눅 12:23). 우선순위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권력, 부, 무병장수는 하나님 앞에서 가치 있는 삶과 관계가 없습니다. 진정 가치 있는 삶과 의미 있는 삶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이 우리의 삶의 목표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위해 우리를 지으셨고 우리는 그 목적대로 살아갈 때 가장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연장을 만들 때 목적을 가지고 만듭니다. 망치는 못을 박기 위한 것인데 그것으로 글씨를 쓴다면 어떨까요. 뭔가를 세게 긁거나 또는 흙에 쓴다면 글씨를 쓸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망치가 만들어진 목적에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고 그것으로 만족하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 목적대로 살아갈 때 가장 의미 있고 가치 있습니다.
우리는 복된 삶을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영생이 주어졌습니다. 이 땅에서는 영생의 맛을 보는 삶이고 이후에는 영생을 누리는 삶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가치 있는 삶을 살기를 바라야 합니다. ‘내가 세례 요한이나 베드로처럼 극단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기도 하지만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싶다는 소원이 있지 않습니까? 하늘나라에 가서 이 땅에서의 삶을 말할 때,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와 같은 삶이었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명령에 귀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가 인용한 시편 34편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고대의 레시피’라고 합니다. 그 레시피에는 다섯 가지 재료가 들어가 있습니다.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10-11).
다섯 개의 명령어가 있는데, 저는 그것을 세 가지로 정리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악을 떠나라’와, ‘선을 행하라’, 그리고 ‘화평을 구하라’입니다.
그럼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악에서 떠나라”
베드로는 입술과 행위, 두 가지를 다 금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비난, 중상모략(이간질), 기만, 남의 평판을 깎아내림, 비방, 모욕, 조롱, 비꼬는 말 등 혀로 저지를 수 있는 죄는 매우 많습니다. 잠깐 혀를 조금 움직이는 것으로 많은 죄를 쏟아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금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는데 잠그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다윗이 시편 141:3에서 말한 것처럼 내 입에 파수꾼을 두어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행동으로 표출되는 악에 대해서도 그것을 떠나라고 명합니다. 폭력, 성적인 죄, 도적질, 간음, 살인 등의 행위로 저지르는 죄들도 떠나라고 말합니다. 떠난다는 것은 박차고 나가는 것입니다. 마치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친 것과 같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버티고 있지 않았습니다. “내 어찌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 39:9)
이 편지를 받았던 소아시아의 성도들은 믿지 않는 주인과 사회를 통해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을 향해 입술로 죄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며 욕할 수 있었습니다. 때론 행동으로 되갚아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들 중 하나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가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나의 복수로 당장은 해결되는 것 같아 보여도, 그것은 악을 더욱 늘리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은 악한 말과 행동에 대해 ‘그럴 만 했다’라고 말씀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기에 어떤 악도 있을 수 없습니다.
둘쨰, “선을 행하라”
입술로 행위로 죄를 짓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치 않습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은 죄에서 멀리 떠나는 것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한다면, 앞에서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갓난아기가 젖을 사모하는 것처럼 말씀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성경에 기록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이 기뻐하실지 모르겠어’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시면 됩니다. 말씀에 그것에 대해 기록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으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과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세에는 성경을 덜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가 연합하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시스템의 문제, 프로그램과 리더십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교회가 성경적인 교회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은 이 단순한 두 가지 명령, 선을 행하고 악을 떠나라는 명령에 있습니다. 교회가 죄에서 멀어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사모하며 그 말씀에서 얻은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성경적인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셋째 “화평을 구하라”
이 명령에는 ‘구하라’와 ‘따르라’는 두 개의 명령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구한다’는 것은 소원하는 것, 바라는 것입니다. ‘따른다’는 것은 사냥꾼이 사냥감을 끝까지 추격해서 잡으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화평을 간절히 바라고 그것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이 세운 불합리한 제도에 순종하고, 고집스러운 주인에게 순종하며 남편과 아내가 화평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평안 때문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연합하고 겸손할 수 있는 이유, 서로 사랑하고 불쌍히 여길 수 있는 이유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평안을 구하고 그것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세 가지를 명령하면서 그 이유에 대해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12)고 말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모든 것을 보상하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눈을 들어서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간구를 들으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많은 명령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때로는 짐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명령을 주시기에 앞서 우리에게 놀라운 사랑의 관계를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주시기 앞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어떻게 사랑했는지 잊지 마라’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악을 떠나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추구하는 이유는 주님이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자비하심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 순종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을 더욱 맛보게 될 것이고, 그러면 더 큰 힘을 얻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인생은 한 번 뿐입니다. 그래서 참 소중합니다. 그런데 누구나 꼭 한 번은 주님 앞에서 우리의 삶을 말해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명령을 잊지 마시고 마지막 날에 주님 앞에 설때에 이 세가지 명령을 실천한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가 살아갈 때 진실로 우리가 주님의 명령을 제대로 행하지 못하고 산 것을 고백합니다. 이 시간 우리는 주님의 귀한 말씀을 받았습니다. 말씀대로 행하게 하시어, 주님의 백성으로 복을 받게 하시고 마지막 주님 앞에서 서는 날 “참 잘했다. 나의 착한 종아!”라는 말을 듣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온누리선교교회 > 한국어예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온라인예배 20231119 (0) | 2023.11.19 |
---|---|
욕심을 버리게 하소서 (약1:15, 주일예배 20231119) (0) | 2023.11.19 |
온라인예배 20231112 (0) | 2023.11.12 |
베드로전서 강해 12) 그리스도인 공동체 (벧전 3:8-9, 수요기도회 20231107) (1) | 2023.11.08 |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갈 2:16-17, 주일예배 20231105) (0) | 2023.1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