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창세기 12:4-7
4 그래서 아브람은 여호와께서 지시하신 대로 롯과 함께 하란을 떠났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75세였다.
5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그리고 하란에서 얻은 모든 재산과 종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6 세겜의 모레 상수리나무가 있는 곳에 이르니 그 곳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7 그러나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아브람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 곳에 단을 쌓았다.
제목: 상수리나무의 추억
저에게서 교회는 아주 특별합니다. 저에게 ‘교회’는 장소가 아닙니다. 그 곳은 하나님과 소통하는 곳입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나를 맞아주시는 환대를 기억나게 하는 곳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교회’는 저의 놀이터였습니다. 어렸을 때 놀이터는 세상의 전부입니다. 놀이터는 사람들에게 편안하고, 좋고, 매력적인 장소입니다. 저에게 교회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만약에 교회가 단순히 어떤 장소나 건축물이라면 사람들에게 의미가 없습니다. 초대교회를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초대교회가 있었던 자리와 건축물은 현재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나오는 교회의 형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에서 가장 최초의 교회는 에덴동산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노아의 방주가 있었습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사건에 분명히 보여지는 ‘시내산이 떨기 나무’가 있습니다.
그 이후에도 ‘성막’이 형태로 교회는 존재했었습니다. 그러다가 다윗왕부터 솔로몬왕까지 건축했던 ‘성전’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하셨던 시대에도 존재했던 ”회당“이 있었던 것을 여러분은 신약성서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난 뒤,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 이루어진 신앙공동체, ‘에클레시아(교회)’가 우리에게 지금까지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이야기 할 때, 사람들은 ‘상수리 나무’에 대해 잘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상수리나무’가 ‘교회’의 개념을 이야기할 때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상수리 나무’는 역사적으로 보면, 가나안 족속들의 신성한 제사 장소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의 우상숭배의 예배 장소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하란을 떠난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했을 때, 이 상수리 나무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이 ‘가나안’이 이미 가나안 족속들이 차지하고 사는 땅임을 알았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명령하신 땅이니 쉽게 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아브라함은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현실은 아브라함에게 단 한 평의 땅도 이 가나안 땅에서 주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단 1%도 가능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환경에서 유일하게 제공되는 ”쉼“의 자리가 이 상수리 나무였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이런 환경 속에서 이방인들의 우상숭배의 더러운 장소인 상수리 나무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만나주셨다는 것입니다.
한번만이 아니고, 여러번 이 상수리 나무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정확히는 성경에 이 단어가 31번 나옵니다.
첫째, ‘상수리 나무’는 이주민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서 처음 하나님을 만나고 제사 드리고 살던 터전입니다.
(창12:6-7)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창13:4)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둘째, ‘상수리나무’는 롯에게 재산을 주고 다시 하나님과 소통하는 삶으로 다시 정착한 곳입니다.
(창13:18)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셋째, ‘상수리 나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나서 주님을 환대하였고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창18:1-10)
주님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한창 더운 대낮에, 아브라함은 자기의 장막 어귀에 앉아 있었다. ...
그 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다음 해 이맘때에, 내가 반드시 너를 다시 찾아오겠다. 그 때에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사라는, 아브라함이 등지고 서 있는 장막 어귀에서 이 말을 들었다.
넷째, ‘상수리 나무’는 야곱이 이방 신상(神象)을 묻고 금붙이를 묻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 회개의 장소입니다.
(창35:4)
“그들이 자기들의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다섯째, ‘상수리 나무’는 죽어서도 묻히고 싶은 곳이었습니다.
(창35;8)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
(창35:27-29)
야곱이 기럇아르바 근처 마므레로 가서, 자기 아버지 이삭에게 이르렀다. 기럇아르바는 아브라함과 이삭이 살던 헤브론이다. 이삭의 나이는 백여든 살이었다.
이삭은 늙고, 나이가 들어서, 목숨이 다하자, 죽어서 조상들 곁으로 갔다. 아들에서와 야곱이 그를 안장하였다.
(Бытие 35:27-29)
(수 24:32)
이스라엘 자손은 이집트에서 가져 온 요셉의 유해를 세겜에 묻었다. 그 곳은 야곱이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자손에게 금 백 냥을 주고 산 땅인데, 요셉 자손의 유산이 된 곳이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한국의 전통에는 사람들이 죽으면 고향에 묻히고 싶어하는 것이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태어난 곳에서 인생의 마지막을 마치고 싶어합니다.
갈대아우르를 떠난 아브라함은 그 고향이 그립지 않았을까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는 이 ‘상수리나무’에서 인생의 마지막을 마무리하고 싶어했습니다.
그 ‘상수리나무’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가나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세상적으로 의지할 것 없었던 아브라함이 온전히 하나님을 만나 복을 누렸습니다.
여섯째, ‘상수리 나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새기는 곳이었습니다.
(수24:26)
여호수아가 이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율법책에 기록하고, 큰 돌을 가져다가 주님의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에 두고,
그러므로 ‘상수리나무’는 우르와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이주한 이주민 아브라함에게 쉼과 안식처였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 쉴 곳 한 평 없었던 그에게는 이방인들의 우상 숭배 장소였던 것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곳은 다른 가나안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 자신의 안식을 취할 수 있었던 유일한 장소였으며 여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새로운 꿈을 꾸고 하나님과 소통하며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하며 살았던 곳입니다.
주님의 자녀이신 온누리선교교회 성도여러분!
‘교회’는 장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추억과 기억이 전부 담겨져 있는 것이 교회입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나타나셨고, 그들과 대화하셨으며, 그들에게 피난처요, 안식을 허락하셨던 추억의 장소가 ‘상수리 나무’였습니다.
그런 곳이 바로 현대의 ‘교회’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교회’가 아주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아주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장소가 기억나는 것이 아니라 장소에서 만난 분과 그 때 느낀 기쁨과 소통을 기억하는 추억이 이 ‘교회’에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매 순간 기억나게 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이런 추억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함께 하나님의 뜻에 따라 손잡고 하나님의 길을 걸어가게 하는 힘을 ‘교회’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신앙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의 삭개오 사건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해 준 유일한 존재는 ‘뽕나무(돌무화과나무)’였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해 모여든 많은 군중 눈에 삭개오는 관심의 대상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경멸과 멸시의 대상이었습니다. 예수를 간절히 보기 원했던 키가 작은 삭개오에게 군중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만날 수 없는 장벽이었고 그분을 볼 수도 없었습니다. 그때 뽕나무(돌무화과나무)만이 삭개오의 유일한 친구가 되고 연결 다리가 되어 준 것입니다.
‘교회’는 뽕나무(돌무화과나무)처럼 이어주는 도구이며 하나님을 만나서 환대받은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추억과 기억의 도구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누가복음 22:19)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 예식을 행하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교회’를 통해 우리가 진정해야 할 일은 바로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예배하고 그 분과 더불어 죽기까지 함께 살아가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주민이었던 아브라함에게 ‘상수리나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신앙의 선배를 추억하는 멋진 도구가 된 것처럼 ‘온누리선교교회’가 하나님의 사랑과 환대 그리고 소통이 기억되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함께 기도합시다!
전능하신 주 하나님! 당신의 기적을 이 곳에서 봅니다. 아브라함의 ‘상수리나무’를 보게 하신 주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올립니다.
귀하고 귀한 온누리선교교회 성도님들의 가정마다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놀라운 축복을 주옵소서! 하나님의 교회를 지키며 그들이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지니며 살게 하옵소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을 믿고 의지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 살아가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멈추지 않고 영원히 일하심에 감사하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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