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한2서 1: 7- 13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대면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택하심을 받은 네 자매의 자녀들이 네게 문안하느니라
설교: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
최용우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작은딸이 학교 육상부 대표 선수가 되어서 무슨 대회에 나가 달리기를 하고 온 모양입니다. 학년 구분 없이 여자, 남자만 구분하여 달리기를 하는 바람에 3학년인 딸은 5-6학년들과 함께 뛰느라 등수 안에는 들지 못했다고 합니다.
"내가 우리학교 육상 대표선수야. 대표선수!" 하면서 학교 대표인 것이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초기교회시대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것이 마치 학교 대표선수나 된 것처럼 그렇게 자랑스러운 이름이었습니다.(행11:26) 복음서를 읽다보면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은 참으로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이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학교 대표 육상선수란 이름을 얻기가 어디 쉽습니까? 그건 돈으로도 안됩니다. 그래도 달리기를 제법 잘해야 대표선수가 될 수 있지요.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란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니었고,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그대로 행하는 사람들(엡2:10)을 '그리스도인'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요즘엔 그 자랑스러운 이름이 '개독'이라 조롱거리가 되어버렸네요. 언제부터 '그리스도인'이란 호칭 속에서 '그리스도'가 빠져버리고 무늬만 남게 되었을까요? 마치 달리기 실력은 전혀 없으면서 '육상 대표선수'라 불리는 것과 같은 꼴입니다. 달리기도 못하는 이름뿐인 육상 대표 선수는 대회에 나가면 나갈수록 조롱 꺼리가 될 뿐입니다.
오늘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백성된 그리스도인은 온전한 상을 주님으로부터 받으라고 합니다.
그 상을 받기 위해 우리는 어떠한 노력을 할지 생각해봅시다!
7-8절의 말씀입니다.
7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8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
8절에서 '너희는 너희를 삼가라'고 했습니다. 신앙 생활에는 언제나 삼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삼가란 말은 모든 일에 절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벧후1:6절 말씀에는 '지식에 절제'를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지식은 뻗어나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절제가 따르지 않으면 진리에서 이탈하기 쉬운 것입니다. 요즘 성경을 인위적으로 해석하는 신 신학이나 말씀의 범위를 뛰어넘는 이단들은 거의 절제가 없는 무질서의 신앙이나 지식에서 온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삼가하는 자세를 가지고 말씀의 테두리 안에서 믿고 순종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요한은 9절에서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교훈을 지나치면 안됩니다. 교훈을 지나친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해야 할바를 말씀으로 나타나셨는데 그것을 인간적인 지식이나 규례로 변질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리새인들의 신앙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도 없는 규례를 만들어 장로의 유전이라 하여 율법보다 더 중한 생활 지침으로 삼게 했습니다. 우상 숭배는 범죄 행위입니다. 그런데도 부모님을 공경한다는 이유로 제사상을 차려 놓고 큰절하는 것이 우상 숭배가 아니라 효도하는 일이라고 가르친다면 이런 교훈이야말로 그리스도의 교훈을 지내치는 일입니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지내치는 것입니까?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데서 지내치는 교훈이 나옵니다. 성경은 올바로 계시된 말씀대로 해석해야 합니다. 새로운 계시를 받는데서 지내치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말씀으로 완성되었고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나 장래의 모든 일들이 계시 안에서 이미 나타내셨습니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새로운 계시를 받아 미혹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그리스도의 교훈을 지내치는 일입니다.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한다는 말씀을 잘 명심해야 합니다. 교훈 안에 거하는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신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 들은 어떤 경우에도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계13장에서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생기기는 양처럼 생겼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용의 말이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용의 말을 구별할 수 있는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늘 말씀을 가까이하고 주의 종들이 가르치는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 당시에는 노스틱 파라고 일컽는 이단이 머리를 들고 성경을 인간의 철학적 지혜로 해석하는 일에 힘썼는데 이들의 주장이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일을 부인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앙의 중심을 어떻게 잡아야 할까요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대면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택하심을 받은 네 자매의 자녀들이 네게 문안하느니라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참으로 많은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통계에 따라서는 그리스도인 인구가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4분의 1이 된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또 우리 사회의 그리스도인 중에는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그리스도인이 교회 안에서는 ‘평신도’라는 이름으로 불릴 때가 많습니다. 원래 평신도는 성직자와 대립된 개념에서 나온 것인데, 성직자가 교회의 주된 역할을 감당한다면, 평신도는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느 곳에도 ‘평신도’라는 말은 없습니다. 성경에는 성직자나 평신도의 구별 없이 ‘성도’(saint)라는 표현이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되지 못하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직분도 엉터리 직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목사나 장로나 집사라는 직분 타이틀 이전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성도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단 성도가 된 후에 교회 안에서 직분이 있는 것이며, 그 후에 사회 속에서 여러 가지 직업이나 직책으로 봉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다가 죽으면 그 관 위에다 ‘성도 000 ’이라고 쓰는 것이 예사였습니다. 그만큼 성도라는 이름은 아름다우며 축복된 이름입니다. 우리는 부활할 때 교회의 직분을 가지고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다 하나님의 성도로서 부활하는 것입니다.
9절에서는 구원받지 못한 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살아가지 못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요 2:9).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기에 구원받지 못한 자를 의미합니다. ‘지내쳐’라는 의미는 복음의 진리에서 떠나 거짓 교리를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요한이 언급한 거짓 교사들은 자신을 탁월한 사상가로 간주하곤 했습니다. 또는 그들은 진보주의적인 사고로 기독교의 부족한 부분을 변화시킨다고 미혹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진리를 뛰어 넘는 급진적인 사고는 비진리로 변질되는 것이고 결국 복음을 부인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들은 한번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을 얻지 못했기에, 성경의 가르침에 만족하지 못하고 철학적인 사고를 결합하여 성경의 가르침을 세상의 철학과 혼합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당시의 진보적인 사고는 모든 사람은 결국 구원받을 것이라는 생각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외에 특별한 계시를 깨달아야 구원받는 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성경에 위배되는 것으로 거짓 교리에 속한 것입니다.
요한 2서 10-11절은 거짓 교사들이 우리를 미혹하려고 할 때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요 2:10-11). 첫째, 우리는 그들을 집으로 영접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우리는 그들에게 인사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거짓 교사들, 즉 이단들을 집에 들이고 인사하는 것은 그들의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짓 교리들을 가지고 와서 가르치는 자들을 집에 들이지 말거나 인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그들의 나쁜 영향력에 미혹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 2서를 통하여 형제를 사랑하는 일을 계속하고, 거짓 교리들을 경계하고 거짓 교사들을 거절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랑과 진리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해야 하며 진리를 사랑하고 지켜가야 합니다. 사랑은 진리에 순종하는 자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사랑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 하나님과 형제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들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 보다는 그들을 대면하여 말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치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면대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케 하려 함이라”(요 2:12). 사도 요한이 그들을 대면하여 말하려 했던 이유는 글보다는 대면함으로 오해를 줄일 수 있고, 서로 만남에서 찾아오는 기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남은 기쁨을 충만하게 하는 비결입니다. 사도 요한은 진리를 가르치면서 동시에 그들과 개인적으로 교제하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도 사도 요한에게서 교제의 소중함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종이와 먹보다는 만나서 교제하며 기쁨을 누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오늘날의 표현으로는 자신이 카톡이나 전화 보다는 만나서 교제함으로 풍성한 은혜를 누리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카톡이나 메시지 보다는 전화가 좋고, 전화 보다는 만나서 대화하며 서로를 격려하고 차나 식사 하면서 은혜를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서로가 필요하고 서로를 위해서 섬기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사도 요한이 마지막으로 한 구절을 잊지마십시오. “택하심을 입은 네 자매의 자녀가 네게 문안하느니라”(요 2: 13)라고 했습니다.
택하심을 받은 자녀로 온전한 상을 맏고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로우신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시고 택하심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우리에게 한없는 은혜와 영분별을 주셔서 이 세상에서 주님의 백성으로 살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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