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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74)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 베뢰아 사람들 (수요예배 20151014)

by 온누리선교 2015. 10. 12.

 

성경본문: 사도행전 17: 10~15

10.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11.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12.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13.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

14.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

15.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니라

 

 

설교: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 베뢰아 사람들

뿌리 있는 믿음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기적을 보아야할까요? 귀신이 떠나가고, 병이 낫고, 사람이 변하는 것을 보아야 믿음을 생긴다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병이 낫는 것을 보았고, 또 홍해가 갈라지는 것도 보았고, 죽은 자가 일어나는 것을 보았어도 온전히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을 성경의 이야기에서 많이 우리가 보아왔습니다.

신뢰함으로 의리로 믿음을 지켜야할까요? 괴로울 때도 힘들 때도 기쁠 때도 하나님에 대한 의리로 억지로 믿으며 살아야할까요? 마음 없는 신앙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베드로는 믿음으로 의리를 지키려는 사람이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모두가 복음서에서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던 그때의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세 사람은 똑같이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갔다"고 말입니다. 주님의 수제자며, 가장 충성스러웠던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다닐 때에는 주와 함께 죽겠다고 했습니다. 또한 그는 예수를 잡으려는 사람들에게 칼을 들만큼 담대하고 의리를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잡혀가시고, 재판을 받아 죽을 위기가 되니, 멀찍이 뒤따라 간 베드로는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주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예수를 멀찍이 따라갔더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주님께서 말씀으로 주시는 평안과 능력 없이는 뿌리 있는 믿음을 가지기 어렵습니다. 요즘 가을이라 강가나 바닷가 근처에 가면 갈대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갈대도 바람이 많이 불어 흔들리지만 결코 뿌리 뽑혀지거나 말라 죽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바람에 흔들려 이리저리 세차게 줄기가 흔들리나 뿌리가 든든히 땅에 박혀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세찬 바람이 불어옵니다. 악한 사단의 장난들이 우리를 강하게 몰아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이 하나님 말씀에 뿌리를 박고 믿음으로 그 바람의 물결을 타면 영원히 하나님 나라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을 발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찬 세상의 물결을 거슬러 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0~11절의 말씀입니다.

10.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저희가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11.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사도행전 16~17장의 내용을 보면,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히고 고난을 당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감옥에서 찬송하고 기도했더니 옥문이 열리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이 일 후에 그는 빌립보를 떠나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그를 반대하는 유대인들이 이곳에까지 쫓아옵니다.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거리의 불량배들을 모아다가 소요를 일으켜서 성을 혼란에 빠뜨리고 바울과 믿음의 사람들을 박해합니다. 결국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떠나 서쪽으로 75km정도 떨어져 있는 베뢰아로 갑니다. 베뢰아에 온 바울은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베뢰아에 사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첫째로, 베뢰아 사람들은 '매우 너그러운 사람들이었다' 라고 했습니다.

개역한글로 보면, 11절에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너그럽다는 말대신 신사적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여기에서 '신사적'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태생적으로 고상한'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의 의미를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천성적으로 심성이 좋다는 말입니다. 인간됨의 바탕이 좋다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신사라는 말은 세 가지의 인격적인 요소가 갖추어져야 신사라고 합니다. 그 중에 한 가지는 '생각이 깊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깊다는 것은 심사숙고한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생각이 깊지 못하면 경박합니다. 그래서 자꾸만 실수를 하고 속단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감정이 먼저 앞섭니다. 언제나 감정 주도적입니다. 화부터 내고 보자는 식입니다. 무슨 일이나 화부터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리부터 지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신사적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신사적이라는 말은 감정에 메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신사는 언제나 생각이 깊은 사람입니다.

또 한 가지는 '마음이 깊어야' 신사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깊다는 말은 온유하고 부드럽다는 말입니다. 넓은 아량이 있고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안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깊다는 말은 편견 없이 마음이 열려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에 보면, 신사적이라는 말을 마음이 트인 사람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깊어서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확 뜨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사적이라는 말은 편견이 없다는 말입니다. 편견은 무지의 자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가진 경험과 자기가 가진 지식만을 고집합니다. 그런 사람은 앞뒤가 꽉 막혀 있습니다. 이런 사람과는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을 우리는 신사적인 사람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행동하는 사람이어야' 신사적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지식으로 알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때에 따라서는 행동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실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말만 있고 행동이 없는 사람을 우리는 실없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우리는 신사적인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것만 보아서도 베뢰아 사람들은 말씀을 받고 구원받을 만한 기본 심성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비유로 말씀하신 옥토, 아주 좋은 밭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 13:3-9)

반면에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어떻다고 본문에서 말하고 있습니까? 베뢰아 사람들이 데살로니가 사람들 보다 더 신사적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별로 신사적이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이들은 거칠었습니다. 생각이 부정적이었습니다. 또한 아주 편협하여 믿는 자들은 박해하였습니다. 그래서 일을 방해하고 어그러뜨리는 일을 했습니다. 마치 주님의 비유에서 나오는 것처럼 길가나 가시덩굴과 같은 마음 밭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복음의 은혜를 받으려면 이러한 베뢰아 사람들 같은 마음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말씀은 어떤 사람에게는 지식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지혜로, 어떤 사람에게는 영적인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게 됩니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잘 팔리는 베스트셀러는 바로 성경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이 성경의 말씀을 재미있어 하고 유익하다고 생각하고 꼭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성경을 성서, 즉 거룩한 책으로 받듭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하나님의 귀한 말씀으로 우리의 영혼이 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믿음이 굳건해 지고 또 승리의 하루하루를 살기 위해 우리는 베뢰아 사람들처럼 마음이 온전히 주님을 향해 있어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베뢰아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간절한 마음으로 들었다. 여러분,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여기에서 '간절'이라는 말은 헬라어에 보면 '열망하여 사모한다, 심히 매우 좋아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말씀을 열망하면서 사모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심히 매우 좋아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집중적으로 들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말입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배고픈 아기가 어머니의 젖을 사모하듯이, 여종이 주인의 손길을 바라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였다는 것입니다. 시편 119:123을 보면, “내 눈이 주의 구원과 주의 의로운 말씀을 사모하기에 피곤하니이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같은 말씀을 들어도 사모하는 마음의 정도에 따라 말씀의 무게가 다르게 느껴집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마다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이 놀라운 능력으로, 위대한 권세로, 복된 은총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셋째로, 베뢰아 사람들은 말씀을 상고하였다고 합니다.

11절 하반부부터 13절에 이르기까지 보니, 성경말씀을 베뢰아 사람들은 보고 또 보고, 묵상하고 또 묵상하고 하는데 열심인 모습이 보입니다. 남자들뿐만 아니라, 헬라의 귀부인들까지도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공부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경말씀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갖게 될 정도로 성경을 보게 되니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와서 방해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글자들이 있는 책에 불가했던 성경이 바로 바울과 실라의 복음전도가 더하여지니,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것이 무엇으로 나타납니까?

시편 119편 165절에 보면, "주의 법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리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큰 평안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큰 평안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의 평안을 주시고 영적인 평안을 주십니다. 재물이나 지식이나 명예로 평안을 얻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할 때 하나님이 평안을 주십니다.

그래서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우리들의 모든 번민의 95%는 성경을 읽지 않는데서 생겨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라고 역설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에 번민이 있으십니까? 성경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말씀을 깊이 읽고 그 안에서 영으로 오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 곳곳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성경은 오래전부터 사람들 곁에 있어왔습니다. 수백가지 언어로도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받고 심고 키우고 자라나게 하는 마음밭이 있지 않으면 우리에게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뿌리 깊은 믿음이 없이는 성령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늘 베뢰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상고하며 나아감을 보면서 우리도 늘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에 평안과 위로,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능력의 주님이시여! 말씀으로 임하여 주셔서 우리에게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세상을 이길 능력을 나타내 주소서! 우리가 연약하고 게을러서 하나님의 말씀을 늘 곁에 두지 못하고 늘 즐거워하며 늘 행하기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가 늘 주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행할 수 있는 주님의 백성으로 축복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 받들어 기도드립니다. 아멘.